6월의 사랑방 참여...주변 생각

by 한성호 posted Jun 18,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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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주, 정보석이 나오는 ‘오!수정’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거의 같은 시공을 공유하고 있어도 거기에서 발생하는 참여자들의 기억 차이는 의외로 큰 것 같다. 모든 참여자가 그곳에서 대화의 패턴을 찾고 그것을 적절한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경청한다 하더라도 그 순간의 느낌 혹은 기억의 격차는 쉽게 줄어들 것 같지 않다.

  참여자가 많을수록 각자의 기억속에 각인된 과거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그만큼 현실 그 자체와 다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참여자가 늘어나 정보가 많아지면 패턴화가 더욱 어려워지고, 그 때 공을 들여 시도해보는 패턴화는 여러 가능한 선택중 하나의 형태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어제의 강렬한(!) 화두는 “대화”였다. 내 나름대로 해석하면 사전 경험 공유가 적고, 거리감이 있는 사람들과의 이야기는 우호적이고 잘 풀리는 것 같은데, 정작 끈끈한 공통의 경험을 갖고 있고 그래서 더 잘 통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과의 대화는 잘 안되는 것일까라는 문제제기였다. 적고 나니 나만 이렇게 해석했는가란 생각도 든다.




 암튼 그 강렬하고 긴 표현의 화두에 대해 모인 사람들이 의도적 혹은 돌려서 언급했던 것 같다. 나도 최근에 읽은 'The Power of Body Language'라는 원제의 “왜 그녀는 다리를 꼬았을까 : 숨겨진 마음을 읽는 몸짓의 심리학‘(한글 제목을 단 이의 마음이 읽혀진다. ^^)이란 책의 힘을 빌어 이렇게 언급했다. ”말로 하는 대화는 97%의 말 이외의 다른 자신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먼 암시였던 것 같다.




   집에 오면서 의식과 몸이란 단어를 떠 올려 보았다. 단세포가 진화하여 다세포 생물로 되면서 방향성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생물들은 바깥의 환경에 대해 다가서던가 아니면 물러서던가의 방향을 취한다는 말도 떠 올랐다. 세포들이 몸이라는 막(혹은 형체)를 공동으로 취하면서 같은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고, 그것을 의식이 의식하고 혹은 제어한다고 할 때 그 몸과 의식의 분열이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도 해 보았다.

  의식은 자극이나 환경에 대한 다수세포들의 반응을 대변하거나 결정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것이 제대로(자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들면서 아주 예전에 읽었던 아래의 표현이 생각났다. 나는 지금 아래의 말을 의식에 놀아나는지 몸에 놀아나는지 모르겠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의식은 생존기계가 결정 수행자가 됨으로써 그 궁극적 지배자인 유전자로부터 해방을 향해 나아가는 진화적 경향의 극치라고 생각할 수 있다”(이게 바로 나야, 255쪽)




  손에 닿는대로 내 느낌에 맞게 얇게 독서하다 보니 자주 현상에 대해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범주화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위안받고, 내 방식의 이해를 잘 믿으려 하지 않지만...  특히 과학적 현상에 대해 근거가 충분치 않은 이해를 표현할 때는 더욱 주저하게 된다. 그러나 증명 안된 것을 믿고, 나아가 유사한 주제에 대해 내가 믿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충동이 있고, 그것을 억제하기 어렵다. 자주. 내겐 재미없게도 억제가 좀 강하지만.

  현실에선 최대한 그 주제에 적절한 개념으로 이야기하려는 심적 예의는 갖추지만 그 실효성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러한 경향성과 충동을 최대한 누르고 대화를 하려면 그저 경청하는 방법 뿐이 없다. 물론 이것은 말로 이루어지는 3%의 세계일 뿐이고, 어느 누가 말을 안하고 있는 사람을 통한다고 하거나 좋아할 것인가? Taking no risks is the biggest risk of all!




 내가 표현하려고 하는 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달될 때, 예를 들면 내가 말한 것으로 인해 상대방이 상처를 받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약 상대방이 그 말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고 그 자리에서 바로 표현해 주면, 내가 그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니었고, 당신이 잘못 이해한 것 같은데 그렇게 이해했으니 내가 말을 철회하겠노라고 하면 될 듯하다(여전히 찜찜하지만). 근데 듣는 이가 교묘하게(적절한 표현은 아닌 듯) 본인이 상처받았다는 것을 감추는 데 성공할 경우, 말한 나는 그것을 도데체 언제 어떻게 되돌릴 것인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채로 많은 시간이 흐르면 나는 정말 대화가 잘 되어 왔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내가 의식하고 있는 것을 표현하든 혹은 무의식의 것을 용케 잡아내어 끄집어 표현하든 그 대화의 결과가 그 대화 내용과 무관할 확률이 무관하지 않을 확률보다 높은 것 같다. 상대방이 오래동안 안 사람이면 사람일수록 그럴 것 같다. 노력을 많이 안하고도 시간의 길이와 관계없이 잘 통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을 경험하지만, 동시에 통한다거나 안 통한다고 하는 것이 상당히 우연적이라는 것 같다. 보통 어느 누구와도 전면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전면성의 정도는 공유하는 시공간 거리의 가까움에 비례해야 한다고 하지 않을까? 다만 우리의 의식이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을 뿐이고...




  백북스 혹은 사랑방 대화를 오케스트라처럼 끌고 가는 분들의 노력과 능력에 대해 대단함을 느낀다. 그것의 힘을 빌려 나는 정리안된 표현을 중구난방 올릴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 같다. 좋은 경험의 기억이 쇠할지 모른다는 우려와 서로 다른 악기로 연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거기에 덧붙여졌다는 것으로 위안하면서. 갑자기 칼세이건이 코스모스 표지에서 세 번째 부인인 작가 앤드류얀에게 광대한 우주 무한한 시간 속에 같은 행성에서,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는 표현이 문득 떠오른다.




  기회가 되면 고칠 가능성을 열어두면서(특히 ‘같다’라는 표현이 ‘이다’라는 것으로 바뀔 시간을 기대하면서), 나 아닌 내가 어제의 사랑방 이후의 소감을 적어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