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예술

by 이중훈 posted Aug 06,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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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예술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 기사 게재 일자 : 2010-05-27 13:48























김종락 / 문화부장

대를 이은 법률가 집안은 흔하다. 의사나 과학자도, 문인이나 음악가, 화가 같은 예술가도 대를 잇는 경우가 많다. 환경 못지않게 유전의 영향이 클 것이다. 이런 사례들을 자주 접하다 보면 유전에는 단순히 머리가 좋고 나쁜 것뿐 아니라 사고성향, 즉 논리·수학적 사고유형이나 예술·감각적 사고유형 같은 세밀한 부분도 포함되는 것으로도 여겨진다.

하지만 그 반대 사례도 드물지 않다. 이를테면 오는 29일 탄생 100주년을 맞는 수필가이자 영문학자 피천득(1910~2007)선생의 딸 피서영 미 보스턴대 교수가 미국에서 손꼽히는 물리학자인 점이 그렇다. 피 교수가 미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로 역시 물리학자인 로만 재키씨와 결혼해 낳은 스테판 피 재키씨가 세계적인 차세대 바이올리니스트인 것도 우리의 상식을 벗어난다. 가야금 연주가인 황병기 예술원 부회장과 작가 한말숙씨의 아들 황준묵 고등수학원 교수가 세계적인 수학자가 된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한국 사학계의 거두였던 이병도(1896~1989)선생은 다섯 아들을 모두 과학자로 길러냈다. 국어학자였던 장지영(1887~1976) 선생의 집안도 전통 학자 집안에서 과학 명가로 바뀐 경우다. 문인이나 예술가의 자녀가 과학자가 되고 과학자의 아들이 다시 예술가가 되기도 하는 것을 보면 두뇌의 사고 유형은 유전과 관계없는 것인가.

이런 의문에 설득력있는 해법을 제시해 온 부부가 한국을 방문 중이다. 지난 2007년 국내에도 번역된 책 ‘생각의 탄생’의 저자 로버트 루트번스타인(미국 미시간 주립대 생리학과 교수)·미셸 루트번스타인(역사학자·작가) 부부다. 지난 25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막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WCAF) 개막식에서 기조연설을 한 루트번스타인 부부에 따르면 과학과 예술은 창조행위라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장인의 경지에 이른 창조행위가 주는 미적 쾌감은 과학 분야에서도 예술분야만큼이나 강력하다고도 한다. “새로운 사실의 발견, 전진과 도약, 무지의 정복은 이성이 아니라 상상력과 직관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상상력이나 직관은 예술가나 시인들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루트번스타인 부부가 ‘생각의 탄생’에서 노벨상을 받은 면역학자 샤를 니콜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책에 따르면 프랑스의 일급 물리학자인 아르망 트루소도 니콜의 말에 다음과 같이 동의한다. “모든 과학은 예술에 닿아 있다. 모든 예술에는 과학적인 측면이 있다. 최악의 과학자는 ‘예술가가 아닌 과학자’이며 최악의 예술가는 ‘과학자가 아닌 예술가’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아인슈타인 같은 학자를 논리수학적 사고유형으로, 문인이나 예술가를 언어나 시각·청각적으로 사고하는 유형으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시나 음악, 미술뿐 아니라 과학적인 연구 성과도 면밀한 의도나 계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부터, 직관적으로 바로 나온다는 점에서 같다는 이야기다. 최근 각 분야의 연구자들이 학문별 영역 구분보다는 학제간 가로지르기를 시도하거나 각급 교육기관이 앞다투어 통합교육에 나서는 것도 이와 관계가 깊다.

문제는 이같은 구호에도 ‘여전히 수학은 오로지 수식 안에서, 글은 오로지 단어 안에서, 음악은 오로지 음표 안에서’만 생각하도록 강요하는 교육이 횡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식은, 단어는, 음표는 내적인 느낌이나 직관을 나타내는 기호일 뿐 본질은 아니다. 교육의 본질은 학생들이 느끼고 창조하게 이끌어내는 것이다. 유네스코 WCAF가 일회성 잔치를 지나 한국의 교육 전반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