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2010.03.17 18:22

기형도...

조회 수 1803 추천 수 0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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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집 기형도


-겨울 판화 1-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 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 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 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 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 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입 속의 검은 입 / 기형도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 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이 시는 분명히 알 수 없는 어떤 사건을 시적 동기로 삼고 있다. 그 해 여름, 화자가 신문에서 한번 본 적이 있는 ‘그’가


‘그 일’이 터진 지 얼마 후 죽었다. 거센 비바람 속에 거행된 ‘그’의 장례식 행렬에 사람들은 악착같이 매달렸고,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다가 나타났으며, 망자의 혀가 거리에 넘쳐흘렀다. 그리고 또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 사건은 80년대 중·후반의 시대상황과 관련이 있다. 정치적인 억압과 사회적 통제가 알게 모르게 강화되었던 당시, 권력에


반대하는 비판 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시 속의 ‘그’와 없어졌다가 나타난 많은 사람들은 바로 그 세력들을 뜻한다.


그들은 저항의 결과 혹독한 고통을 당해야 했는데, 죽음과 일시적인 사라짐―투옥―이 그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채 침묵을 지킨다. 세계의 폭력에 그들은 굴복해 버린 것이다.


‘안개’와 ‘흰 연기’는 진실을 은폐하는 부정적인 현실을, ‘책’과 ‘검은 잎’은 관념적인 지식과 죽음의 징후들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화자 역시 방관자의 한 사람이며, 먼지 낀 책을 읽는 무력한 지식인이었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고,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여기서 ‘먼 지방’과 ‘먼지의 방’의 발음―띄어쓰기의 차이만이 있는―과 의미―현실과 괴리된 공간으로서의―의 양면에 있어서의


유사성이 흥미롭다.




그의 죽음을 목격한 후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으며’,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할 말을 하지 못하는 ‘놀란 자의 침묵 앞에’ 용기 있게 실천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압박감으로 다가온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비판하며, 죽은 ‘그 때문에’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한다.


실천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나약한 방관자들은 부채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이중의 억압을 느끼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사람들은 죽음과 폭력을 비굴한 침묵으로 방어하는 대신, 서로에 대한 믿음을 잃고 파편화되며 방향성을 상실한다.


택시 운전사와 그를 믿지 못하는 ‘나’, ‘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와 나는 서로 먼 거리에 있다.


그러나 더 이상 이런 상태를 지속할 수는 없다. 이제 나는 그가 누구인지, 내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 대답해야만 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모르지만, 예전의 ‘먼 지방/먼지의 방’이 아닌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가서


현실에 직접 관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곳으로 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다.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으로 암시되는 낯설고 황량하며 어두운 현실,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뜻하는 죽음과 굴복, 타협의 징후들이 끝없이 나를 두렵게 하기 때문이다.





 

  • ?
    이기두 2010.03.17 18:22
    .

    시를 이렇게 써야 하는 상황도

    있었나 보다.

    그래도

    이런 시를 만나는 건 싫다.
  • ?
    조기영 2010.03.17 18:22
    시의 묘미는 역시 모든 사람이 내 맘대로 느끼기~~~^^
  • ?
    이병설 2010.03.17 18:22
    젊은날의 치기였는지 아님. 정의에 대한 갈구 였는지 지금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제는 굳어버린 혀가 아닌 내 혀로 돌아와 말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그것이 나에게 닥쳤던 현재였고 그 현재에 좀더 열심히 부딪혀보려는 내 나름의 행위 였음을... 지금도 그럼 상황이면 어쩌겠냐고 묻는 물음은 가장 어리석은 물음이 될것이다. 그때든 지금이든 내가 하는 행동이 진리일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해 볼려 노력할뿐...80년대 학번으로 그 소용돌이에 있지 않았던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마는 그때는 참 어려운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 ?
    조기영 2010.03.17 18:22
    이병설님 잘 지내고 계시죠? 매사에 열심히 임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어제 밤에는 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80년대 학번이라서 그럴까요? 안타까움이 많은 이유는... 어제의 눈처럼 readbook님의 앞날에 축복 가득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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