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에 구멍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숨을 쉴 수도 없고, 먹을 수도 없고, 몸 안의 노폐물을 내보낼 수도 없을 것이다. 우주도 마찬가지다. 빈 공간이 없다면 모든 물체는 전혀 움직일 수 없고 어떤 변화도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은 비어 있는 구멍, 즉 무(無)나 공(空)에 기대어서만 성립할 수 있다
후반부에서는 마음속의 무를 다루는데, 에테르처럼 몸은 마음의 눈이 만들어낸 모델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감각과 인식에 대한 이러한 성찰은 도가나 불가의 가르침과도 상통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릇은 진흙으로 만들어지지만 쓰임새가 있는 것은 그릇 속의 비어 있는 공간이라는 <도덕경>의 구절처럼, 비어 있음이나 침묵은 단순한 부재나 공백이 아니다. ‘없음’은 ‘있음’의 창조적 모태로서 우리 삶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자석이자 동력이다.
<나희덕 시인·조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