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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by 황경신 posted Sep 0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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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받은 책 중에서 제일 먼저 읽은 책입니다.

어쩐지 가장 끌렸다고 할까요. 읽는 내내

여기 나오는 S라는 인물과 저의 공통점을 발견하느라 흥미진진했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가 전투에서 머리를 다친 남자 이야기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막연하게 그 남자의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우울했습니다.

제가 그 책보다 이 책을 먼저 읽은 이유도 그래서고요.

 


어떤 단어나 숫자에 대한 이미지가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글을 쓰면서 수없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글을 쓰다가 잘 안 풀리는 이유는, 이미지가 없거나 불투명하기 때문이죠.

배경이나 캐릭터가 선명하지 않으면

등장인물들은 부유하게 됩니다. 어떤 행동을 해도 어떤 대사를 해도

현실성이 없고 좌충우돌이고 결국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야!> 하게 되거든요.

 


실제로 글을 쓰다 보면

S의 표현법을 많이 사용하게 됩니다.

내가 그랬구나! 하고 깜짝 놀란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말에서 맛과 향과 촉감을 느낀다고 했는데

저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돌아서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깊은 우물에서 지금 막 건져 올린 것 같은, 어두운 물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한없이 무거운 목소리였다.>


<그녀의 어조에는 공격적인 요소가 전혀 없었다. 어째서요, 하고 따지는 것도 아니고 어째서요, 하고 대드는 것도 아니었다. 아기의 살결처럼 부드러운 무엇이, 고양이의 움직임처럼 나긋나긋한 무엇이 그 속에 있었다.>


<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을 갖다 대면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음색이었다. 나는 남은 힘과 마지막 희망을 추슬러, 코앞에 있는 어둠을 노려보았다.>


- '아름다운 무엇' 중에서


 


심지어 '손을 갖다 대면 베일 것 같은'이라는 표현은


책 속에 그대로 나오더군요!


 


그림이나 사진을 볼 때, 음악을 들을 때도

그 안에 숨어 있는 이야기가 이미지로 떠오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써야 하지요.

물론 저는 S와는 달리, 말의 무게라는 말의 이미지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기억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지지만요.

 


S에게 행동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상상의 세계가 현실의 세계보다 강하고, 그 안에서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한 건지 불행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제 경우에는, 인간은 한 가지 인생밖에 살 수 없기 때문에

글을 통해 다양한 삶의 경험을 얻으려고 하는 편입니다.

그 속에서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세상에 없는 사람과 소통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결국, 거기에는 한계가 있는 거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은, 생명으로부터 얻어내야만 하는 무엇이 있으니까요.

다른 생명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아가지 못하니까요.

 


이 책을 통해 여러 가지로 많은 자극을 받았습니다.

책을 들고 다니면서 세 명에게 소개했고, 다들 당장 제 책을 빼앗을 기세더군요.

하지만 좀더 음미해야 할 것들이 있으니 사보라고 했습니다. 하하.


독후감도 비평도 아니지만(저는 그런 것에 영 소질이 없답니다)

<지워진...>을 읽고 나서 또 글 올리겠습니다.

 


서울에는 아침부터 비가 오네요.

이미 등을 돌린 팔월에게 안녕, 손을 흔들고 구월을 향해 팔을 뻗어봅니다.

(팔월도 구월도 저에게는 어떤 존재처럼 생각됩니다.)

 


여긴 참 따뜻하고 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