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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여름의 다짐

by 임석희 posted Aug 0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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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와 언어.

이것이 내가 8월에 천문우주+뇌과학 모임에서 발표한 주제다. 그날 설명을 하던 가운데, 뇌의 언어영역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되는가? 라는 부분이 있다.

 

"언어영역은 브로카 영역과 브로니케 영역이 있습니다. 언어의 의미 파악을 관장하는 브로니케 영역에 이상이 생기면 어떻게 될까요?

발성기관에는 문제 없으니, 말은 할 줄 알아요, 글도 읽을 줄 알아요. 그런데,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의미를 도대체 이해 할 수가 없어요."

 

이 말을 하면서, 내 머릿속엔 신문에서 보았던 어느 광고가 그려졌다.

어른들이 하는 말로 된 글을 마구 읽던 다섯살 남짓한 어린 아이가 마지막에 하는 말.

"엄마, 그런데, 청와대가 뭐야?"

어느 학습지 광고로 기억하는데, 난 사실 그 광고를 보면서 학습지의 효과보다는 아이가 참으로 불쌍하다고 여겼다. 우리 교육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뇌와 언어를 공부하고 나니, 이제 그 안타까움이 다르게 이해된다.

아마도 그 어린아이는 아직 청와대라는 개념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은 상태였고, 그래서 청와대라는 언어를 발성할 수는 있지만,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하는... 그러니까, 어쩌면 그 아이의 뇌 속엔 아직 브로니케 영역이 확실히 개발되지 않은 상태겠구나... 라는 생각이 스친다. 

 

그런 생각을 잠시 하면서, 어떻게 어떻게 나의 발표는 마무리 되었다.

발표자의 위치에서 다시 청중의 자리에 돌아와 강의를 듣는다.

마지막 마무리 강의에서 다시 한 번 나는 내 무릎을 탁! 쳤다.

 

"추상성과 구체성.

추상성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

거기에 우리의 목적이 있습니다아~~~"

 

어려운 책.

그동안 만났던 어려운 책들.

일단 두꺼우면 겁을 먹고, 책장이 숙숙 넘어가지지 않으면 짜증을 낸다.

내가 공부 안해서, 내 머릿속에 그 책을 이해 할 수 있는 기본 개념을 넣어놓지 않은 나 자신을 되돌려 보는것이 아니라,

책만 두꺼워가지고, 혹은 저자는 알고 이걸 썼을까?

혹은... 이걸 이해하는 사람이 별루 없겠지? 라며... (니체가 말하는) 약자의 태도로 살아왔더랬다.

추상성으로 들어가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책이 구체적이지 않다고 짜증을 냈던거였다!!

 

청와대라는 단어를 모르는 다섯살 짜리 어린 아이나, 새로운 추상 개념을 몰라서 책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는 서른을 훌쩍 넘긴 임석희나... 다른게 뭐가 있는가 말이다. 나 또한 내 머릿속의 브로니케 영역은 (다친것이 아니라, 손상된 것이 아니라) 아직 덜 발달된 것에 불과하다. 그것도 전적으로 나의 게으름때문에!

 

산에 오를때 정상에 다가가는데에는 꼭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 한번에 오르막으로만 끝나면 좋겠지만, 낮은 봉우리들을 거칠때만, 그런 경우에만 우리는 더 높은 산의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오르면, 당연히 낮은 봉우리에서 바라보았던 세상과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낮은 봉우리에서 안주해왔을런지도 모른다.

지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책에게만 손을 뻗고,

더 높은 봉우리로 가기 위해 심기일전해서 다시 산을 올라야 하는 수고를 피해왔을런지도 모른다.

 

다행히 나는 인생 중반에(초반이라고 말하고 싶다), 운 좋게도 백북스를 만났고,

이젠 어려운 책을 피하지 않고 돌파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얼마전 라디오에서 책갈피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의 사연을 들었다. 책을 읽다만 페이지를 접지도 않고, 책갈피를 꽂아두지도 않는다라고. 다시 펼쳤을때 읽었던 부분을 만나게 되더라도, 다시 한 번 읽고 넘어가는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냐고 일설하는 사람의 이야기. 난, 그때, 시간이 참으로 많은 사람인가보네.. 라고 생각했다. 그 땐 그렇게 여겼다.

 

백북스를 알고 난지 1년 후,

고흥 바닷가의 어느 날.

이곳에서의 주말은 내게 주어지는, 온전히 나에게만 주어지는 자유로운 시간이다.

지나가다 보이는 아름다운 바닷가에 가던 길을 잠시 멈춘다. 그늘을 만들고 책을 펼친다. 어젯밤 읽다만 책을 펼친다. 이젠 나도 책갈피를 사용하지 않는다. 브로니케 영역의 활성화를 위해서, (나에게는 아직은) 어려운 책을 펼치고 다시 읽어야 한다면, 다시 읽는다. 곰씹는다. 이젠 서두르지 않는다.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을 재촉하지 않는다. 한번도 머릿속에 그려보지 않았던 문장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책을 넘긴다. 추상개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또 생각하며, 그렇게

 

나보다 브로니케 영역이 더욱 발달한 사람들에게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어려운 책들을 올해엔 운이 좋게도 여러 권 읽어 나갔다.

그 어렵다라고 하는 의학전공서적을 읽지 않았던가!!

사람 이름만, 그 명성만 알고 있었던 철학자의 책을 결국은 읽어내지 않았던가!!

처음 책을 펼쳤을때의 하얀 막막함을 지나올 수 있지 않았던가!!!

 

어렵다라고 말하는 책들.

남들이 어렵다고 말해서 어려운 책이 아닌 것이다.

전적으로 내가 훈련하지 않아서 어렵다라고 느끼는 책이다.

눈으로 문자를 읽어 내려가는 속도를 내 머릿속의 뇌에서 일어나는 인식의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생겼던 일이다.

 

산에 오를때, 피할 수 없는 이것. 더 높은 곳에서, 한번에 더 많이 내려다 보기 위해서는 한 봉우리, 두 봉우리... 계속 올라가야 하는 것처럼, 이젠 내가 만나게 될 어려운 책들을 피하지 않아야 겠다. 내 머리가 모자라서도 아니고,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니 자학하지 않고, 그냥 꾸준히 산을 오르듯 읽고 또 읽으면 되겠지.

마음의 여유를 찾으니, 어려운 책이 손에 잡혀도 더운 여름의 바닷바람이 그다지 짜증나지만은 않는다. 언젠가는 더 많은 것들이 내 머릿속에서 한순간에 확~ 그려질 그런 날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