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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가재미, 낮잠

by 박문호 posted Mar 3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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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미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짧은 낮잠 /문태준


 


낮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꽃을 보내고 남은 나무가 된다


 


혼(魂)이 이렇게 하루에도 몇번


낯선 곳에 혼자 남겨질 때가 있으니


 


오늘도 뒷걸음 뒷걸음치는 겁 많은 노루꿈을 꾸었다


 


꿈은, 멀어져가는 낮꿈은


친정 왔다 돌아가는 눈물 많은 누이 같다


 


잠에서 깨어나 나는 찬물로 입을 한번 헹구고


주먹을 꼭 쥐어보며 아득히 먼 넝쿨에 산다는 산꿩 우는 소리 듣는다


 


오후는 속이 빈 나무처럼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