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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 감사, 정직의 삶을 산 나의 아버지

by 강신철 posted Mar 0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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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 감사, 정직의 삶을 산 나의 아버지

그 분의 애국심을 처음 느낀 것은 내가 여덟 살 되던 해였다. 내가 느림봉 위에서 놀다가 떨어져 다리를 다쳤다. 수술비 마련을 위해 온 집안이 벌집을 쑤셔 놓은 듯 했다. 그때 마침 당시 군속으로 있었던 김 아무개라는 한 동네 사람이 미군부대에서 몰래 빼낸 물건을 야행으로 운반해 주면 마차 한 바리에 만원씩 주겠다고 제의해 왔다. 일반 짐삯이 이천원이었던 그 당시, 파격적인 제의였지만 어머니의 설득에도 아랑곳 없이 아버님은 한 마디로 거절하셨다. 그 결과 온 식구들의 사랑을 받았던 애견 '베스'를 팔아 내 수술비를 마련해야 했다.

아버님이 남의 소를 빌려 장짐을 끌기 시작한 게 그분의 나이 열다섯 살 때부터였다 한다. 이른 새벽 마을 뒷길로 덜거덕거리며 지나가는 아버님의 마차바퀴 소리가 나야 비로서 새벽닭이 운다고 했다. 계절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짐을 실어 나른 대가로 마차군 강 아무개 하면 그 고을사람이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 덕에 부모로 물려 받은 외상술값 모두 청산하고 6남매를 키워 가면서도 농토를 넉넉히 장만하게 되었다. 다른 마차군보다도 유난히 주문이 쇄도했던 것은 그 분의 신용과 근면성 때문이었다. 짐 주인이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 한 치도 어김없이 짐을 실어다 주었고 조금이라도 부정한 짐은 아무리 높은 삯을 불러도 결코 응하지 않았다.

그 분이 처음 마련한 땅은 조상을 모실 묘지였다. 그 분에게는 논이나 밭보다도 선친을 모실 묘자리가 더 급했던 것이다. 선조가 모은 그 많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자식에게는 빚만 유산으로 남기고 가신 자신의 아버님을 그토록 극진히 모시는 그 분의 마음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분이 늘 입버릇처럼 뇌이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부모가 못나고 자식이 아무리 잘나도 잘난 자식이 있는 건 못난 부모라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분은 성실한 국수주의자였고 갈 데 없는 단군의 후예였다. 내 민족 이외의 것은 모두 달갑지 않게 여기던 그 분, 교과서에서 배운 것도, 누구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닌 데 그 분의 고집은 남다른 것이었다.
여름내 기껏 땀 흘려 지어 놓은 곡식을 턱없는 명목으로 끼니꺼리도 남기지 않고 착취해 가던 일본인들을 평생 미워하셨다.
6.25동란 때 강보에 싸인 채 논바닥에서 죽어가는 갓난애의 처참한 모습, 징병에 끌려 갔다 장질부사에 걸려 돌아 온 자기 형님이 약도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죽어가는 모습은 그 분을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미 군정하에서 날뛰던 자들의 소행이 아니꼬와 서양인들까지도 싸잡아 미워할 수밖에 없던 그 분, 그 분에게 소중한 것은 우선 식구들이었고 그 다음이 마을 일이었다. 길흉을 가리지 않고 온갖 대소사에 빠짐없이 찾아가 축하하고 위로함에 아낌이 없었다. 동네 공동부역에 당신이 몸이 불편해 몫을 못하게 되면 일군을 사서라도 몫을 해내게 하셨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토록 부드럽기만 해 보이시던 아버님이 자식들에게는 엄하셨다. 노력 없이 얻는 이익이나 부정한 방법으로 취한 것은 무엇이든 엄하게 꾸짖으셨고 필요이상의 사치는 조금도 용납함이 없으셨다. 그 분에게는 도대체 남에게 비난 받는 일은 최대의 수치였던 것이다. 한 편 피땀으로 맺힌 돈이었지만 자녀의 교육비에는 후하셨다.
가슴에 늘 스며 있던 희망은 후손의 영광이었기 때문이다.

성실과 노력 끝에는 밝은 미래가 있음을 몸으로 직접 실천해 보이셨고 뭇사람의 귀감이 되셨다. 애초부터 배움이 없었기에 '애국'이라는 단어조차 그분에게는 생소하고 어찌 보면 사치스런 표현일지도 모른다. 주어진 운명에 불평하지 않고 자기를 존재케 한 모든 것에 다
만 감사하며 묵묵히 미래를 향해 평생을 일구어 오셨을 뿐이다.
자손의 영광과 이웃의 안녕만을 기원하시며 자신을 돌아볼 틈도 없이 그렇게 세월을 다 보내셨다.

농자, 인생의 반려인 소(牛)와 함께 아련히 지나간 날들을 쟁기날 끝에 묻어버리고 이제는 초라해진 노구를 이끌고 땅거미를 길게 드리우며 지는 저녁 해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 가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