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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11 08:53

대나무

조회 수 1516 추천 수 0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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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나무

             - 함민복




나는 테러리스트올시다


광합성 작용을 위해


잎새를 넓적하게 포진하는 치밀함도


바위 절벽에 뿌리내리는 소나무의 비정함도


피침형 잎새로 베어 날리는


나는 테러리스트





마디마디 사이에 공기를 볼모로 잡아놓고


그 공기를 구출하러 오는 공기를


잡아먹으며 하늘을 점거해 나아가는


나는 테러리스트





나의 건축술을 비웃지 말게


나는 나로서만 나를 짓지 않는다네


자유롭고 싶은 공기의 욕망과


나를 죽여버리고 싶은 공기의 살의와


포로로 잡힌 공기의 치욕으로


빚어진 아,


공기, 그 만져지지 않는


허무가 나의 중심 뼈대


나는 결코 나로서만 나를 짓지 않는다네


그래야 비곗살을 버릴 수 있는 법





나는 테러리스트


내 나이를 묻지 말게


뒤돌아 나이테를 헤아리는 그런 감상은


바람처럼 서걱서걱 베어먹은 지 오래


행여 내 죽어 창과 활이 되지 못하고


변절처럼 노래하는 악기가 되어도


한 가슴 후벼파고 마는 피리가 될지니


그래, 이 독한 마음으로


한평생 머리 굽히지 않고 살다가


황갈색 꽃을 머리에 이고


한 족속 일제히 자폭하고야 말


나는 테러리스트





*******


주말, 몸과 마음이 헤질 데로 헤져서 누더기가 되어 출근했다. 오늘은 월요일이다. 주중이라고 인생이 봐주는 법은 없으니, 역시나 하루하루가 콘크리트 바닥에 맨살을 부비는 기분일 것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터벅터벅 사무실로 올라왔을 때 반짝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대나무였다.





작년에 이사 온 새 건물은 1층부터 3층까지 로비가 뚫려 있고 중앙에는 대나무가 심어져 있다. 밀폐된 공간에 인위적으로 만든 작은 대숲은 그 의도는 좋았지만, 심자마자 누렇게 말라가기 시작했다. 3층 복도에서 내려다보면 대나무는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 1년 내내 서걱서걱한 잎을 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줄기도 점차 황갈색으로 변했다.


죽어가는 나무를 실내에 두고 바라보는 기분은 죽어가는 환자를 바라보는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보는 이의 기운을 스러지게 하는 음험한 기운이 풍겨 나오는 것 같다. 나는 바람 한점 통하지 않는 이 곳에 테러리스트의 기상을 가진 대나무를 박아놓은 설계자에게 분노했다. 참혹하게 변한 이들을 빨리 살려내거나 밖으로 내보내기를 원했다.





그런데, 오늘, 난 봤다. 가느다란 대의 꼭대기에 시퍼런 잎이 나 있는 것을! 그 초록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어떤 나무도 흉내 내지 못할 색이었다. 드디어, 그는 우리가 내뱉은 한숨을 대 속에 가두고 서늘한 칼들을 내뽑은 것이다!


1년 동안 그는 죽은 듯이 견뎌냈다. 밀폐된 공기, 부족한 햇빛, 얇은 흙... 그리고는 갑자기 살아나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죽은 잎들 사이에서 시퍼런 빛을 발산하는 댓잎 몇 개를 바라보면서 난 말 못할 강한 기운을 느꼈다. 그 잎들은 내게 ‘난 살아있다!‘ 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살아있다...


나는 그 대나무가 피침형 잎새를 날리며 3층까지 공중을 점거해 나가기를 갈망한다. 나는 그가 서늘한 기운으로 이 숨막히는 공간을 가득 채워버리길 갈망한다. 나는 그가 얇은 토양에서 보란 듯이 죽순을 키워 올리길 갈망한다.





대나무를 내려다보는 내 몸에도 물기가 도는 것 같았다. 비록 내가 한 손에 꺾어질 가는 대에 불과할 지라도 푸른 잎을 품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주어진 의무가 있다면 바로 이것임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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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철 2007.12.11 08:53
    대나무를 심어본 사람은 그 생명력에 감탄합니다. 현영석 교수님이 캐준 몇개 대나무 뿌리를 원봉리 둔덕에 심었습니다. 다 말라 죽은 줄 알았는데, 누렇게 말라 썩어문들어진 댓잎을 비집고 올라와 앙증스럽게 피어나 대나무 폼을 잡은 모습이 제법 의연해 보입니다. 이번 주말에 독서산방에 가시는 분들은 별만 보지 말고 대나무도 한 번 찾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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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지숙 2007.12.11 08:53
    한때 겨울만 되면 누렇게 말라가는 잎사귀를 보면 가슴이 찢어질듯 슬퍼서 울다 울다.
    꽃이며 화초며 다 내다 버린일이 생각이 나네요.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하기위해 억지로 박아놓은 대나무.
    바람부는날 대나무 사이로 나는 바람소릴 좋아하는 저로서 ..이것을 보는 양경화 님으 맘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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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수 2007.12.11 08:53
    함민복 시인 와~! 반가운 이름이네요.^^

    밑에 있는 글을 읽으니 위의 시를 양경화님께서 쓰신것 같네요. 시와 글이 한 호흡에 잘 어울려 있는 것 같습니다. 말라 죽어가는 대나무의 안타까움속에 대나무 잎의 푸른 빛의 재발견을 통해서 저 시를 쓰신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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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원 2007.12.11 08:53
    시도 멋지지만, 글도 멋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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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혁 2007.12.11 08:53
    저는 왜 팬더곰만 생각 나는 걸까요?그리고 "안경벋어" 라는 말까지 연이어...죄송합니다,좀 무거운 듯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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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영석 2007.12.11 08:53
    제가 제일 좋아하는 나무/풀이 대나무입니다. 그래서 다른 카페에서 제 필명이 대나무입니다. 우리 집에 있던 대나무 몇 그루를 강교수님 원봉리 산방에 시집보냈어요. 늘푸르고 곳은 나무, 대나무 사이로 스쳐가는 바람소리를 들으면 왠지 상쾌해집니다. 예전에 학교 연구실 회분에 대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바람이 안통해 시들해져 연구실 앞 복도 그리고 건물 밖으로 이사시키다가 나중에 그 뿌리를 다른 터에 옮겨 놓았고 그것이 새끼쳐서 원봉리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늘푸른 대나무를 보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고 사색할 수 있다면, 또 그렇게 늘상 푸르고 곧게 살 수 있다면, 아무리 허접한 것들의 가식과 허위가 난무하여도 혼자서 스스로 즐거워 하며 지금 여기를 천국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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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동환 2007.12.11 08:53
    저도 집에 몇개의 화초를 키우고 있는데, 얼마전 그중에 하나가 말라 죽고 있습니다.
    물을 줬어야 했는데, 화분이 워낙 작아 존재 자체를 잊고서 두었더니 지금은 살아날
    가망이 없어보입니다. 웬지 그 화초생각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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