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이 있다. 책을 읽다 보니 아무리 대학자의 사상이라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학자의 머릿속에서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라 할지라도 이전의 뿌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 뿌리는 200년, 300년 아니 10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 갈 수도 있다. 우리의 생각은 늘 다른 이의 생각을 좀 변형하거나 짜깁기하는 과정으로부터 생긴다. 아니면 최소한 영감이라도 받는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놀랄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이 바로 인간을 포함한 생물이 살아온(진화해 온) 방식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또는 존재했던) 아무리 기괴한 생물이라 할지라도 다른 생물의 토대가 있기 마련이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매일 과거의 사람들은 상상도 못했을 최첨단의 기기들-컴퓨터, 휴대폰, PDA, 자동차 등-을 다루면 산다. 그리고 때로 몸이 고달팠고 더럽고 배고팠을 과거의 어느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면 무엇하는가? 100년 전 아니 1000년 전에 살았던 어떤 이의 생각의 발 끝에도 못미치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독서를 내가 第二義的이라고 말한 것은 대저 우리의 삶의 길과 이치가 원래 옛부터 완전히 구비된 것, 그 자체로서 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을 읽을려고 하는 사람은 아직 사람의 체험을 충분히 겪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런데 반하여 우리가 존중하는 책들의 저자(=聖人)들은 삶의 체험을 충분히 겪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것을 책 위에 써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독서를 한다는 것은 그 많은 道理가 이해(=理會)되는 데 이르러서는 그 이해가 모두 내 자신이 옛부터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이지 外面的으로 굴러들어온 것이 아니다.
어쩌면 궁극적으로는 생존과 같은 목적을 위해 진화를 해 왔기 때문에 공감대 형성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