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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16 09:00

밤 송이가 널려 있네

조회 수 2116 추천 수 0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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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열려진 창밖 세상은 뿌연 안개 마당이었다. 아스팔트 검은 바닥은 희뿌연 회색으로 보이고 점점 위로 향할 수록 안개는 짙어져 마치 산 정상의 구름을 보는 것 같았다. 안개 속으로 걸어나가며 남편은 "이렇게 짙은 안개가 내린 날은 운동이 별로 좋지 않아. 산에 가지마." 퉁명스러운 한마디를 내뱉았다.남편의 뚱한 한 마디속에서도 전해지는 애정이 있었는지 나의 답변은 " 안개가 짙을 때 , 운전 조심해야 하지요?". 추석명절을 전후로 며칠 열감기에 시달려 고생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 보더니만 아무래도 마누라의 건강이 신경 쓰여지기는 하는모양이다.

바로 옆에는 초등학교가 있기 때문에 내가 맞이하는 아침은 생기발랄한 아이들의 소리로 활기차다 .아이들의 요란한 재잘거림은 한동안 이어지다가 어느순간 뚝. 아이들이 학교속으로 다 들어가버린 것이다. 아주 조용하다. 안개도 다 사라졌고 아침햇살은 눈부시다. 안개가 그렇게 두터웠으니 한낮은 아주 따갑겠지. 오늘따라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많다. 좁을 오솔길 따라 길게 나래비로 일렬로 걸어 오고 있다. 화창한 날씨를 집안에서만 바라 보기에는 아무래도 성에 안찰 것 같았는지 사람들이 다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화창한 날, 상쾌한 아침을 몸으로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을 못하면 그게 비정상이지. 오늘과 같은 날은 다시 없을 테니까.


다니는 길에 종종 발려진 밤송이들이 눈에 띈다. 추석이 바로 지난 작년 이맘 때에 아이들 데리고 남편과 함께 밤을 한 봉투 주웠던 생각이 난다. 정말 재미있었는데. 달려드는 모기떼만 없었다면 하루종일이라도 밤나무를 찾아 온 산을 헤집고 돌아다녔을 것이다. 손에 까시가 박혀도, 부서진 낙엽들로 운동화가 더러워져도, 땀으로 온 몸이 찐득찐득해져도,이런 것들은 하나도 신경이 안쓰였다. 가득가득 채워지는 비닐봉투를 보면서 아이들은 집에 가고 싶다는 소리가 도대체 어디서 나와? 너무 힘들다는 소리가 어디서 나와? 너무 신나고 재미있어 했다. 반쯤 벌어진 밤송이를 찾아 다니다가 나중에는 밤 바르는 일이 너무 힘들고 귀찮아져 떨어진 밤을 찾아 줍기만 했다. 정신없이 밤에 팔려 땀을 흘리다 보니 아이들이 목마름을 더 이상 참기 힘들었는지 엄마인 나에게 '집에 가서 물 가져오라고'. 그렇게 신나게 밤을 줍던 기억이 난다. 작년 그 주 내내 산에 오를 때마다 , 밤나무를 찾아 나무 위를 주욱 둘러보느라 두 눈에 잔뜩 힘을 주고, 고개를 아래로만 처박아 땅만을 쳐다보고 다녔다.

작년에 그랬었는데, 지금 나는 밤수확을 시작 할려나 보다. 지나다니는 길목에까지 쳐들어 온 죄로 그 즉시 까발려졌을 밤송이를 보며 , 모기 때문에 안되지 하는 유혹을 물리칠려고 하지 않으니 말이다. 길에서 나무줄기를 헤치며 몇발자국 걸어 들어가니 밤새동안 사람들 몰래 떨어진 밤송이들이 이곳저곳에 널려 있다. 아직 벌려진 흔적들이 없는 것을 보니 사람들의 눈길이 아직 미치지 않은 것이다. 밤송이가 작은 것을 보니 토종밤임에 틀림없고 까시 투성이의 타원형 밤송이는 세상에 대한 유혹을 견딜수 없었는지 가늘게 실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다. 옆으로 쭉 찢어진 작은 틈 사이로 두알의 풋풋한 밤이 보인다.빨리 발라내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일단 달려드는 모기부터 쫓아내야 할 판이라 팔 다리를 휘휘 흔들어 모기들로 부터 시간을 번 다음 그리고 옆을 두리번거려 길쭉한 돌멩이를 잡아든다. 첫수확으로 밤 두톨. 바로 곁에도 밤송이가 또 있다. 또 한 쪽에는 쏟아진 밤톨 두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편안히 앉아 있다. 떨어진 밤송이들 대부분이 성한 것들이다.이것들을 다 발려내자니 모기때문에 안될것 같고 그냥 두고 가자니 차마 발길이 안 떨어질 것 같고. 사람의 손길이 아직 미치지 않은 밤나무를 처음으로 발견한 내가 얼마나 대견스러운지, 신기하기만 하다. 얼토당토 않은 것 같지만 눈에 이렇게 손타지 않은 밤송이들을 보면 그것도 아닌것같고 . 혼자서만 보기에 너무 아까워 지나가는 누구라도 불러들여 함께 밤을 주우면 재미가 두 배가 될 것 같다. "여기 밤송이가 많이 떨어져 있어요."

이렇게 저렇게 손에 가시를 조금 찔렸지만 모기는 한군데도 안 물리고 바지 양쪽 호주머니 가득 채울 만큼 나는 밤을 주었다. 오늘 저녁 남편이 퇴근하면 알려줘야지. 내일 새벽 일찍부터 남편은 아침운동과 더불어 밤 줍는 일을 즐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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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철 2003.09.16 09:00
    가족들의 오순도순 밤 줍는 모습이 선연히 떠오르는군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일상의 모습을 통해 절묘하게 표현하신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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