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공지
2003.09.08 09:00

한 걸음 늦게 피운 봉숭아

조회 수 2460 추천 수 0 댓글 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비가 그치고 구름도 어느새 다 사라졌는지 갑자기 온 집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더 이상 비가 올 것 같지는 않다. 갑자기 들이닥친 햇살에 베란다 창틀에 살고 있는 한 그루의 봉숭아가 더욱 새빨갛다. 늦은 봄에 큰 아이가 화분에 씨앗을 묻어서 키운 봉숭아. 처음 씨를 묻었을 당시에는 집안에서 키우다가 싹이 나와 좀 줄기가 굵어지고 잎이 나올 쯤 , 초여름부터는 아예 밖 창틀에 내놓아 밤이나 낮이나 밖에서 살게 했다. 비가 자주 오는 여름 덕분에 내 손으로 직접 물을 준 적은 많지 않다. 한여름 뙤약볕이 뜨겁게 내리 쪼일 때 그 때 이틀 간격으로 몇 번을 주었을 뿐이다.

한 여름 뙤약볕에 있을때 봉숭아는 애타게 갈증을 호소하였을 것인데, 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죄 다 아래로 축 늘어뜨린 잎사귀들을 어쩌다 보게 되면 그제서야 "아! 너가 있었지, 죽으면 내 마음이 불편해져, 그냥 죽어버리지 마 "약간은 불안한 마음 , 또 약간은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씽크대로 가 물한 대접을 떠 온다.머리 꼭대기 위에서부터 끼얹어 줄라면 어느새 부쩍 커졌는지 더 높아진 키에 까치발을 서야했다 . 물을 먹자 마자 금새 다시 살아나꼿꼿이 잎을 세우고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어대는 모습이 나를 보며 해해해 웃으면 아양떠는 모습이 마치 우리 작은애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한테 된탕 혼나고나서도 금새 잊어버리고 해해 웃으며 다가와 나를 미소짓게 하는 우리 이쁜 작은애.

자주 내리는 비를 보면서 보살피기를 게을리 했던 주인의 무심함 때문에 여름내내 봉숭아는 울고 웃는 일을 몇 번이나 반복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랬는지 봉숭아는 여름동안 단지 한 송이만을 피웠다. 굵은 줄기와 탐스런 잎사귀를 보며 왜 이 꽃은 더 이상의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일까. 등치에 비해 화분이 너무 작았었나?, 주인의 보살핌이 부족해서?, 아니면 원래부터 나쁜 종자여서?. 알 수 없는 마음에서 점차 내 관심 밖으로 멀어져 있었다.

그러던 봉숭아가 변신하기 시작하는 시점이 있었다. 이제 자기만의 때를 맞이 했다는 듯이 가지마다 이곳 저곳에 부지런히 탐스러운꽃을 매달기 시작하는 것이다. 두 송이만으로도 열손가락 물들이는데 충분하다고 마치 자랑이라도 하는듯 목화솜 만큼의 꽃을 덕지덕지 풍성하게 피워대기 시작했다.

여름이 끝나가는 무렵 탐스런 꽃으로 활짝 웃고 있는 봉숭아가 나에게 가르침을 준다. 모든 것에는 때가 다를 수도 있는 일이니 조급하게 서두르지 말라고.한발 늦게, 한철 늦게 , 일년 아니 그 이상 늦게 갈 수도 있는 일이라고. 꽃이라고 해서 모두 봄에만 피더냐고. 봄에만 피는 꽃, 여름에만 피는 꽃, 가을에만 피는 꽃, 하물며 추운 겨울에 활짝 피우는 꽃도 있지 않느냐구. 터질 듯한 기운을 더 이상 참지 못해, 피울 수밖에 없는 꽃이 되라고. 조급하게 서둘러서 뭘 이루어 낼려고 하지 말라고.


  • ?
    송윤호 2003.09.08 09:00
    봉숭아에게도 이렇게 큰 배울 점이 있었군요. 석련님 감사합니다~ ^^
  • ?
    송봉찬 2003.09.08 09:00
    전우익선생님생각나네요...자연의순응하는삶...작은진리...잘읽었습니다.^^
  • ?
    이선영 2003.09.08 09:00
    여전히 시같이 사시는 석련님을 만날수 있네요. ^^
  • ?
    김영미 2003.09.08 09:00
    쉽게 지나칠수 있는 일이 이렇게 예쁘게 표현되는군요..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44 백북스 facebook 그룹을 개설했습니다.^^가입해주세요~! 김기욱 2011.03.09 1518
543 <카메라로 사유하기> 강좌 "사진 찍기로 인문학적 사유하기" 임민수 2011.03.09 1651
542 <마르크스 자본론 100분만에 읽기> 강연을 합니다. 임승수 2011.03.09 1735
541 <과학뉴스 읽기> 닭도 상대 감정 느낀다 변정구 2011.03.10 1754
540 청춘매뉴얼제작소 이중훈 2011.03.10 1470
539 연세대에서 서산철학강좌를 한다고 해서 공유하고자 ~ 윤서연 2011.03.10 1492
538 우주기반 태양광 발전 실현을 위한 모색1-우주 엘리베이터 1 박경호 2011.03.12 1473
537 <청년포럼> '청년이 묻고, 청년이 답하다' 여현정 2011.03.15 1688
536 Non-rocket spacelaunch 박경호 2011.03.17 1421
535 책 (가장 뛰어난 중년의 뇌) 신청하신 회원들께 알려드립니다. 9 임다정 2011.03.18 1607
534 백북스회원이라면 꼭 봐야 할 동영상은 이런 것이겠죠. 2 조종암 2011.03.18 1732
533 The NewYork Review of Books에 소개된 라마찬드란의 신간 남인호 2011.03.19 1570
532 인지의 과학과 정치학, 스펙타클의 사회, 다지원 정치철학 강좌들을 소개합니다! 1 다지원 2011.03.21 1395
531 생화학 강의하는 곳 없나요 1 홍우식 2011.03.22 1713
530 영상글밭 사하에서 과학 기획세미나를 엽니다 1 이종영 2011.03.22 1440
529 [가장 뛰어난 중년의 뇌] 증정 관련 마지막 공지 4 김미선 2011.03.26 1794
528 [3월28일 개강] 정치, 철학, 예술, 언어 등 다지원 2분학기 프로그램이 곧 시작됩니다! 다지원 2011.03.26 1429
527 혹시 최준식 교수님의 '느끼는 뇌' 강연 동영상을 가지고 계신 분 부탁드립니다. 손재민 2011.03.28 1699
526 '느끼는 뇌' 강연을 듣고나서... 이재민 2011.03.29 1788
525 Liz. 길버트('먹고,기도하고,사랑하라')의 TED 강연 영상으로 보고... 1 이재민 2011.03.30 1702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84 185 186 187 188 189 190 191 192 193 ... 216 Next
/ 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