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공지
2003.06.13 09:00

어느 결혼식장에서...

조회 수 2315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부모님 얘기를 하시니까,
이렇게 날씨가 흐리고 어충충한 금요일엔
이제 곁에 없는분이 그리워지곤 합니다.

얘들이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지...
제자신을 되돌아보며 하늘을 봅니다.
그분은 알고 있겠지.
==========================
어느 결혼식장에서

평생을 혼자 걷지 못하고
목발에만 의지해야 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힘든 걸음을 연습하기
시작했던 건
맏이인 내가 결혼 이야기를 꺼낼 즈음이었다.

사람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의족을 끼우시더니
그날부터 줄곧 앞마당에 나가 걷는 연습을 하셨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얼마나 힘겨워 보이시는지...
땀으로 범벅이 된 아버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땅바닥에 넘어지곤 하셨다.

"아빠, 그렇게 무리하시면 큰일나요."
엄마랑 내가 아무리 모시고 들어가려고 해도
아버지는 진땀어린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얘야, 그래도 니 결혼식날에 애비가
니 손이라도 잡고 들어가려면
다른건 몰라도 걸을 순 있어 야재..."

난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그냥 큰아버지나 삼촌이
그 일을 대신해 주기를 은근히 바랬다.
정원씨나 시부모님, 그리고 친척들,
친구들에게 의족을 끼고
절룩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힘겨운
걸음마 연습이 계속되면서
결혼날짜는 하루하루 다가왔다.
난 조금씩 두려워졌다.
정작 결혼식 날 아버지가 넘어지지나 않을까,
신랑측 사람들이 수근거리지나 않을까...

한숨 속에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결혼식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제일 먼저 현관에 하얀 운동화가 눈에 띄었다.
누구의 신발인지 경황이 없어서
그냥 지나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결국 결혼식장에서 만난 아버지는 걱정했던대로
아침에 현관에 놓여 있던
하얀색 운동화를 신고 계셨다.
난 가슴이 덜컹했다.

`아무리 힘이 든다 해도 잠깐인데 구두를 신지 않으시구선...`

당신의 힘이 모자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떠나는 내게 힘을 내라는 뜻인지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으셨다.
하객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절룩절룩 걸어야했던
그 길이 아버지에겐 얼마나 멀고 고통스러웠을까.
진땀을 흘리시며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하지만 난, 결혼식 내내
아버지의 하얀 운동화만 떠올랐다.
도대체 누가 그런 운동화를 신으라고 했는지..
어머니일까? 왜 구두를 안 사시고...
누구에겐지도 모를 원망에 두볼이 화끈거렸고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아버지의 무안한 듯한 표정도,
뿌듯해 하시는 미소도 미처 보지 못하고
그렇게 결혼식은 끝났다.

그 후에도 난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내 손을 잡고 아버지가 걸음을
떼어놓는 장면이 담긴
결혼 사진을 절대로 펴보지 않았다.
사진 속 아버지의 하얀 운동화만 봐도
마음이 안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아버지가
위독해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비로소 그 하얀 운동화를 선물했던
주인공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내 손을 꼬옥 잡고
천천히 말을 이으셨다.

"지은아, 느이 남편에게 잘 하거라.
니가 결혼을 한다고 했을때,
사실 난 네 손을 잡고
식장으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었단다.
그런데 니 남편이 매일같이 날 찾아와
용기를 주었고 걸음 연습도 도와주더구나.
결혼식 전날에는 행여 내가 넘어질까봐
푹신한 고무가 대어진 하얀 운동화도 사다 주고,
조심해서 천천히 걸어야 한다고
얼마나 당부를 하던지...
난 그때 알았다.
니가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참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공지 어느 결혼식장에서... 오중탁 2003.06.13 2315
903 공지 가입인사 드릴께요..^^ 2 곽승희 2004.11.03 2315
902 공지 기상예보 이선영 2003.06.30 2316
901 공지 저기 질문있는데요.. 4 김명식 2003.10.08 2316
900 호주 학습탐사 - 몇 장의 사진 - 12 오창석 2009.08.23 2316
899 겨울방학 청소년 인문학 특강 TEXT 안내입니다!! file 교육공동체나다 2009.12.12 2316
898 "기억을 찾아서"의 저자 에릭 켄달 최고의 역작 신경과학의 원리 번역판 출간 3 배진우 2011.05.14 2316
897 좋은 책을 권해 드립니다 2 박영주 2009.12.31 2317
896 박문호박사님 BBS불교방송(FM101.9MHz)<BBS초대석>에 초대되시었습니다. 2 변용구 2010.01.25 2317
895 공지 독서토론장, click! 이선영 2003.04.21 2318
894 공지 매경 우리 크럽 소개기사 2003.5.24 현영석 2003.05.25 2318
893 공지 읽고만 가기 미안해서리... 1 오중탁 2003.06.16 2318
892 공지 남도 답사를 다녀와서 1- 소쇄원 1 강신철 2004.11.12 2318
891 *하늘, 땅, 그리고 사람들*(2부) 8 신현숙 2009.09.24 2319
890 공지 지금 하십시요 윤석련 2003.03.02 2320
889 공지 여름 휴가에 CEO가 읽어야 할 책 20권 강신철 2005.07.28 2321
888 공지 첫 만남... 2 문경수 2003.12.04 2322
887 공지 <font color=blue>다음 카페 & 싸이월드 클럽 개설했습니다. 송윤호 2004.09.05 2323
886 공지 생각의 벽(책 소개) 2 박문호 2005.04.13 2323
885 공지 이보디보-발생진화생물학 4 박문호 2007.08.04 2325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66 167 168 169 170 171 172 173 174 175 ... 216 Next
/ 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