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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3 22:30

표해록 - 최부 저, 김찬순 역

조회 수 2657 추천 수 0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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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만난 건 의외의 기쁨이었다. 500년 전 남중국해를 표류한 우리나라 사람의 기록이 있다는 것을 지금까지 몰랐기 때문이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중국의 3대 기행문으로 꼽히는 최부의 <표해록>. 읽는 것이 즐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 하나 특이할만한 것은 옮긴이가 북한의 국문학자 김찬순이라는 점이다. 출판사에서는 남한에서 사용하지 않은 몇몇 용어를 바꾸어 출간했다고 하지만, 낯선 단어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싱싱하게 느껴졌다.





1488년 한겨울, 부친상 소식을 듣고 급히 제주를 떠났다가 폭풍으로 표류하게 되는 조선의 충성스런 관리 최부. 그가 40여 명의 하인들과 함께 겪어낸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너무 생생하게 기록되어서 그런지 생사를 걸고 허둥대는 이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혼자 큭큭거리며 웃곤 했다.


어차피 죽을 거니 일찍 죽겠다고 목을 매는 사람, 배에 물 새는 걸 뭐하러 퍼내느냐고 나자빠지는 사람, 제사를 안 지내서 그렇다느니 서둘러 날을 잡아서 그렇다느니 하며 최부에게 원망을 토하는 하인들. 좁은 배에서 울고 불며 나뒹구는 이들을 애써 이성으로 다스려가며 속으로 눈물을 흘리는 조선 선비. 이 두 부류 - 보이지 않는 것(충, 효, 이성)을 매사의 기본 방침으로 삼는 선비와 눈에 직접 보이는 것만 보고 행동하는 하인들 - 의 행동이 대비되면서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했는지를 아주 잘 들여다볼 수 있다.


또한, 이 책에는 중국과 조선과의 관계, 조선의 풍물과 의식주, 제도에 대해서도 상세히 쓰여 있다. 만나는 중국 관리마다 최부가 왜적인지 진짜 조선선비인지 알아보려고 조선의 다양한 분야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중앙 관리였던 최부의 해박한 대답이 일일이 기록되어 있어서 이 책은 당시의 조선과 중국사를 연구하는데 1차적 사료로 쓰인다고 한다.


중국 남쪽 해안 마을에서 북경까지 압송된 후 압록강을 거쳐 6개월 만에 다시 조선으로 들어오기까지 최부가 말해주는 중국의 풍물도 재미있다. 항주의 화려함에 대해서는 최부 보다 200년 앞서 방문한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이 책을 덮으며 내가 의미심장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기록’의 힘에 대해서이다. 최부에게는 잊고 싶은 개인적 경험이었겠지만, 왕명으로 8일간 급히 써내려간 이 글 때문에 50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그의 이름을 공유하고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적어도 내게 최부는 살아있는 존재로 느껴진다.


인간에게 있어 불멸이라는 원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이성적 방법은 생명수도 생명초도 아닌 딱 하나인 것 같다. 바로 기록이다. 식물이 씨앗을 바람에 날려 보내듯이, 수컷이 정자를 배출하듯이, 인간이 만들어낸 기록은 한 개인의 머릿속을 떠나 세상으로 뿌려진다. 그리고 그것이 타인의 머릿속에서 공유되고 재창조되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선택받은 존재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바로 불멸에의 수단(‘쓰고 싶다’는 욕망)을 하나 더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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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우 2008.01.03 22:30
    '기록은 불멸의 수단이다' 는 말 참 멋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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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원 2008.01.03 22:30
    기록은 불멸의 수단이다...
    작년의 화두가 '소통'이었는데 올해의 화두는 '기록'으로 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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