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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문명기행 - 정수일

by 양경화 posted Oct 1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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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 넘게 이 책을 붙잡고 있었다. 일을 많이 했고 매일 단잠을 잤다. 짬짬이 만화책 시리즈와 몇 권의 책을 봤지만 생각의 중심은 항상 이 책에 있었다. 저자가 실크로드를 답사하는데 40일이 걸렸는데, 난 읽는데 그만큼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그다지 두껍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은 책이지만, 저자가 보고 듣고 조사한 것을 상상하기 위해선 다른 여행기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했다.





저자 정수일은 세상에 파다했던 간첩 사건과 특이한 학벌, 경력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가 간첩이었든 아니었든 간에, 머나먼 이국땅에서 우리나라의 흔적을 찾아내고자 하는 열정과 애정은 이 땅의 누구보다 덜하지 않을 것 같다. 그의 진솔함과 따뜻함이 매 편의 끝에 잔잔한 여운을 남겼다.


한겨레신문사에서 기획한 이 문명기행에는 기자단과 정수일 교수가 참여했다. 그들은 2005년 여름, 40일 동안 북경에서부터 이스탄불까지 38개 지역을 거치며 인류 문명의 자취를 헤아리고자 했다. 이 기행문은 한겨레신문에 연재되었다고 한다.





<실크로드의 악마들>에서 저자 피터 홉커스가 ‘마지막 남아 있던 신비와 낭만은 실크로드와 함께 영영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버렸다’고 결론내린 것과는 달리 정수일 교수는 이 길은 ‘신 오아시스로’ 혹은 ‘뉴 실크로드’로 부활하고 있다고 글을 맺었다.


그가 본 실크로드는 모래 속에 파묻힌 죽은 길이 아니었다. 타클라마칸 사막에 도로가 깔리고, 생명을 찾아보기 어려운 삭막한 벌판에서 운치 있는 식사를 한다. 사막 위로 관개를 하여 나무를 심고 농사를 짓는다. 오아시스 도시를 따라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왕래하고 무역하며 관광을 하고 있다. 저자는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 인류가 만들어 낸 질곡의 역사, 그리고 그 역사가 낳은 문화를 보며 감복해마지 않았다.





저자는 실크로드를 따라가며 보고 들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만, 결국 그는 인류의 ‘희망’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세계의 정치 문제가 아무리 복잡해도 이 땅 위에는 생존하기 위해 신체적, 지적 활동을 멈추지 않는 인류들이 존재한다. 그 혹독한 사막과 험난한 산 위에도 인류들이 오가고 있다. 그 길의 흔적이 바로 문명의 길이고 실크로드이지 않겠는가.





작은 자극에도 쉽게 물러 터지는 살. 그리고 이 살을 지탱해 주는 작은 뼛조각들. 이 나약한 것들을 가지고 살이 녹아들듯이 뜨거운 곳에서, 두개골이 쪼개질 듯이 추운 곳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인류들이 있다는 것은 실로 감동적인 일이다.


인류는 끊임없이 활동하며 끊임없이 창조하고 끊임없이 소모한다. 어디에서나, 어느 때에도 우리는 멈추지 않고 생명을 이어나갈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며 이 땅 위에 우리의 문명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 하루, 나의 생존의 이유는 더 이상 논할 필요도 없다. 모든 허무는 생명 앞에선 설 자리가 없다.





1200년 전, 눈물을 뿌리며 차가운 파미르 고원을 넘어갔던 혜초를 그리며 그의 발자취를 따라갈 날을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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