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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막길. 책을 읽으면서 이건 분명 오르막길이라고 느꼈다. ‘정상에 오르면 뭔가 보이겠지’ 하며 발길을 재촉했는데, 막상 위에 오르니 세상이 뿌연 안개에 싸여 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처음부터 수 백편의 논문을 초록만 읽은 느낌이었다. 개미 떼 같이 많은 학자들이 온 몸을 던져 쓴 논문을 초록만 보고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나의 지식 부족 때문에 그 깊이와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답답했다.





책의 뒷부분에 실려 있는 참고문헌 목록을 훑어봤다. 논문의 수가 세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 중 한 책의 제목이 눈에 띄었다.


“Assembling Pieces of the Puzzle”


‘생명의 기원을 탐구한 일류 학자들의 소논문들을 집대성한 뛰어난 책’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 말을 이 책에 그대로 적용해도 될 것 같다.


이 책은 생명의 탄생부터 캄브리아기의 대폭발에 이르기까지 30억년 동안의 퍼즐 맞추기 결과가 집대성된 책이다. 어찌 보면 한 줄로도 끝낼 수 있는-‘생명은 40억년 경에 탄생되어 캄브리아기에 크게 진화하였다’ 식으로-, 그리고 대중의 관심도 끌지 못할 역사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고 볼 수 있다.





단순하게 보이는 사실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현재 명확히 단순하다해도, 단순한 수준으로 확정되기까지는 오랜 기간 동안 불확실성 속을 헤맨 학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 같다. 불과 몇 권의 개론서만 보고,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하군’ 이라고 잠정적 결론을 내려버린 내가 너무나 어리석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사실(이라고 보여지는 것)들도 여전히 가설로 남아있다. 저자는 여분의 가능성을 남겨 둔 표현(~일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한다. 측정결과가 아직 부족하다. ~할 수 있다. 등등...)을 자주 사용하고, 한 가지 현상을 가지고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여러 논문을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불확실하다고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과학적 사실 중 처음부터 명쾌하게 드러난 것이 무엇이겠는가.





‘지금 단계에서 시생이언의 생물과 환경에 대한 지식은 실망스럽지만 한편 대단한 것이기도 하다. 확실한 게 너무 없어서 실망스럽지만, 어쨌든 뭔가를 알아냈기 때문에 대단하다.’ - p. 107





쉽게 읽히지 않은 책 내용보다도, 나는 먼저 학자들의 열정의 지독함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연구결과와 그 의미가 몇 줄로 요약되었다 할지라도 그 몇 줄이 피와 땀의 결과라는 것을, 어쩌면 한 평생을 바쳐 얻어 낸 결과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생명의 기원을 밝히는 것이 무엇이길래, 그들은 개미떼처럼 연구하고 연구하는 것일까.





‘현재 우리는 많은 단서, 훌륭한 가설들, 10년 전보다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해답은 얻지 못하고 있다. ’결정적 한마디‘가 없다는 데 실망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고생물학자인 나에게는 이것이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이유가 된다. 과학자에게 대답을 찾지 못하는 질문은 오르지 못한 에베레스트 산이요, 억누를 수 없는 유혹이기 때문이다.’ -p. 318





페이지가 많지 않아도, 이 책은 내게 높은 산과 같았다. 물론 여기서 요약하여 소개할 수도 없다. 제대로 이해를 못한 게 많으니까. 하지만, 내게 사실을 바라보는, 또는 책을 읽는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한 줄의 깊이. 그것이 이리도 깊을 수 있다는 것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러니, 아는 척 말라. 너는 산이 있다는 것을 아는 정도일 뿐. 산을 힘들여 오르는 자만이 세상을 볼 수 있다.’





어쩌면 산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다행인지 모른다. 내게도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이유가 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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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준호 2007.06.20 09:41
    참 좋은 글이네요.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양경화님의 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대학자의 좋은 책속에 있는 한줄의 글은 분명 그냥 한줄은 아닙니다. 한 개인 또는 수많은 학자들의 인생과 피와 땜이 배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분명한 것은 대학자들의 깨달음에 도달하는 지름길은 좋은 책을 읽는 것이라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때에도 깨달음의 깊이가 다를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겠지요. 그래서 특히 자신의 전공이 아닐 때에는( 그 분야의 프로가 아니라고 생각할 때에는)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하고 거듭거듭 조심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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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수 2007.06.20 09:41
    양경화님의 글은 항상 공감이 잘 됩니다. 이렇게 매번 독후감 쓰시는 것이 쉽지 않으실 텐데 좋은 독후감을 읽게되어 매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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