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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는다 - 베르나르 올리비에

by 양경화 posted Jun 17,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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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격렬한 감정에 휩싸였다. 많은 책이 그렇지만, 이 책은 내 생각의 시야를 크게 넓혀주었다고 확신한다. 꼭 실크로드를 걸어가면서 보고 체험한 것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저자와 함께 (간접) 여행을 하면서, 삶과 인간,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4년, 1099일 동안 홀로 걸은 실크로드 12000km. 터키,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중국.


그 길고도 긴 여정, 험하고도 빛나는 여정의 끝을 나는 애타게 기다렸다. 이 사람은 끝에 가서 무엇을 깨닫게 될까. 무엇을 느낄까.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저자 역시 끝을 보기 위해 마지막 날은 뛰는 듯이 걷는다. 옆 뒤도 보지 않고 오직 끝을 향해 내달린다. 그리고 마침내 시안의 종탑을 보았을 때....


대장정의 마지막 페이지에 저자는 이 말을 썼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나는 알 것 같다. 이 말은 그의 긴 여행이 헛되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여행의 끝이라는 건 애초부터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말이다. 여행은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 죽을 때에야 끝을 만나는 법. 살아있다는 것은 곧 전진을 의미한다.





‘종탑은 하나의 단계일 뿐이고, 나는 여기서 지혜를 얻지 못했지만, 어떤 힘을, 혹은 인간으로서 나의 길을 계속 이어가게 해주는 열정을 얻었다.’ -3권, p. 437





그의 결론을 읽으며 나는 대학시절 나의 모든 허무를 단칼에 베어버린 <장 크리스토프>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나아가라, 나아가. 결코 멈추지 마라.


하지만 하느님, 저는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요? 제가 무엇을 하건, 또 어디로 가건, 가 닿는 곳은 언제나 같지 않을까요? 거기에는 끝이 있지 않을까요?


죽어야 하는 너희는, 가서 죽어라! 괴로워야 하는 너희는, 가서 괴로워하라!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나의 섭리를 성취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 즉 <하나의 인간이>‘





베르나르 올리비에. 몇 년 전 이 사람을 본 기억이 있다. 짐수레를 끌고 혼자 이스탄불에서 실크로드를 걸어 시안까지 왔다고 신문 한 면에 크게 사진이 실렸다.


굵직굵직한 신문의 정치부 기자였던 저자는 은퇴하고 걷기 시작한다. 62세. 그는 실크로드 횡단이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은 끝이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은 오직 걷고자 하는 의지뿐.


책 전반에 걸쳐 그는 스스로에게 계속 묻는다. 왜 내가 걷는 걸까? 발이 깨지고, 이질에 걸려 쓰러지고, 지독히 더러운 숙소와 음식을 견디고, 씻거나 제대로 먹지 못하고, 생살까지 태우는 사막, 돌 바람을 견디고, 미치광이와 도둑, 사냥개를 만나 죽을 뻔하고, 폭압과 무례를 겪어내고...


여행 중에 아무리 좋은 사람을 만나고 멋진 광경을 본다 해도, 그 길은 책을 읽는 사람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외롭고 힘든 길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그는 멈추지 못한다. 몸이 녹초가 되어도, 가다가 길이 사라지거나 식당이나 숙소가 없는 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걷는다.





‘6000km를 여행했는데도 왜 이런 모험을 하고 미친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수평선 너머로 멀리 길게 이어진 길은 날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길과 나 둘 뿐이다.... 내 친구들은 여전히 날 악의 없이 비웃을 것이다. 이 친구는 걷고 또 걷는데, 왜 걷는지 아직도 모른대!’ - 2권, p. 391





사막. 기온은 50도가 넘고 모래 온도는 80도가 넘는다. 물통의 물이 부글부글 끓고, 신발은 아스팔트 위에 푹푹 빠진다. 수레의 타이어마저 녹아 버리는 뜨거움. 사막에 사는 이들마저도 올리비에에게 미친 짓이라고 만류한다.


하지만, 이성적 판단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걷고 싶은 욕망, 걸어야 한다는 의지 하나에 모든 것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건넜다!





‘전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른바 최고의 이성이 내리는 명령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 2권, p. 361





사람들이 사막을 건너지 못하는 것은 사막의 혹한 환경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온 몸으로 겪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우리의 발목을 잡아채는 것은 예상되는 위험이 아니라 그 위험에 대한 두려움인 것이다.





‘성공이다. 성공이다... 기계적으로 이 말을 되풀이했지만 믿기가 힘들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이렇게 쉽게 끝나다니.’





지난 일주일 동안 그와 함께 걸으며, 그가 경험한 것을 꿈꾸었다. 그가 의도한 대로 이 책에는 단 한 장의 사진도 실려 있지 않지만(한국 출판사에서 사정사정하여 간신히 입수한 그의 흑백 사진 두어 장을 빼곤), 상상하는 데 꼭 사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내가 상상한 것은 분명 그가 본 것에 못 미치는 빈약한 것일 테지만, 낯선 풍경, 낯선 사람, 낯선 냄새를 내 방식대로 꿈꾸며 낯선 세상을 경험했다.





이 책은 참으로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낯선 세상과 풍경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하나의 생물로서 인간이 어떻게 생존하고 있는지, 그들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그들의 숙명에 대해, 아름다움에 대해, 자연과의 관계에 대해...


 


‘내게 여행은 책이나 여행 가이드-떠나기 전에 읽는 모든 가이드 북-에 없는 걸 발견하는 것이다. 대체 뭘 발견하는 거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나도 모른다. 내게 여행은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믿기 힘든 존재를 만나고, 예상하지 못한 시골 구석의 소박한 조화로움에 충격을 받거나, 그때까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못했거나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던 것을, 내 자신이 하거나 생각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여행은 사람을 형성시킨다. 그런데 자신을 형성시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변형시킨다면?’  - 2권, p. 390


 


걷는 여행을 완성시킨 것은 그가 만난 사람들이다. 선량한 눈, 깊은 눈을 지닌 아름다운 사람들. 이 중 나는 깊은 산골에서 만난 베흐체트라는 노인 이야기를 읽으며 아주 감격했다.


저자가 만난 사람 중 유일하게 서재를 가진 사람. 그는 결코 부유하지 않다. 77세때 혼자 배우기 시작한 영어로 저자에게 책과 철학자를 이야기하며 기뻐하는 노인. 극도로 폐쇄적인 이란에서도 오직 그의 집에선 남녀가 평등하고, 자유롭다. 저자는 그를 현인이라고 기억했다.





길은 신성하고, 책도 신성하다. 나는 이 둘을 구별하고 싶지 않다. 이들은 우리 생명이 전진하게 하는 힘인 동시에, 전진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어디로 이를까.


저자가 시안의 종탑에 도착하고 모든 게 헛되다고 외쳤듯, 도착지는 우리에게 큰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른다. 그에게 지혜를 준 것은 시안의 종탑이 아니라 바로 길 자체였다.





‘길은 여행을 하는 동안 내게 전 재산과 맞먹을 선물을 안겨주었다. 길은 계속 앞으로 가고자 하는 욕망을 주었다. 지쳤지만 노력으로 자신을 초월한 몸이 마침내 자유로운 사고를 할 때의 신성한 순간을 다시 갖고 싶은 욕망.’ - 2권, p. 391





물리적으로 길의 여행을 떠날 수 없다면, 책의 여행을 떠나자고 결심한 것은 바로 이 책을 읽고 나서이다. 어디에 이르겠다는 목표는 없다. 오직, 저자가 말했듯 ‘노력으로’ ‘자유로운 사고를 할 때의 신성한 순간’을 맛보고 싶다. 그리고 그 순간이 계속 앞으로 가고자 하는 힘을 줄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끝에 이르기까지 진정으로 살아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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