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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40억년의 비밀 - 리처드 포티

by 양경화 posted May 1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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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나서 독후감을 쓰기에 난감한 책이 있다. 읽은 내용이 머릿속에 좌르르 펼쳐지지 않는다. 펼쳐지기는커녕 짙은 안개에 싸인 낯선 세상에 온 것처럼 몽롱하다. 게다가 수많은 전문가들이 온몸을 던져 알아낸 것들을 얄팍한 호기심만 한줌 깔고 얘기한다는 게 심히 부담스럽다. 그냥 하!! 하고 한 마디만 쓰는 게 더 ‘정확한’ 독후감일지도 모르겠다.


‘생명의 역사를 개괄하는 글은 무엇보다도 경외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괴테가 말했듯이 말이다. “나는 경탄하기 위해 여기 있노라.” ’ -p. 448





그래도 감탄사에 더해 나는 이 책이 좋다, 무지 좋다 라고 쓰고 싶다.


40억년을 상상의 범위 안으로 불러들이고자 하는 인간의 미친 열정이 맞추어낸 웅장한 대(大)퍼즐!(진부한 광고 문구 같지만 사실이다.)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 몸 속에 살아 존재하는 내 조상들의 이야기이다.

설거지를 하다가, 화석으로도 잘 남겨지지 않은 선캄브리아기의 생물이 내 몸을 타고 전해져왔다는 생각에 전율했다. 내 몸은 40억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내 몸 속에 있는 조상을 향해 절이라도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고생물학이 뭔지도 몰랐던 내가 이런 감동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저자 포티 때문이다. 고생물학자로서 저자의 연구 경험뿐만 아니라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들이 페이지 마다 보석처럼 박혀있어서 40억년의, 어쩌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역사를 추리소설처럼 실감나게 읽을 수 있었다.

학생시절 남극에서 털북숭이가 되어 화석을 탐사한 이야기에서부터 질투와 경쟁으로 가득 찬 학자들 간의 야비한 싸움, 발견에 얽힌 뒷얘기들은 딱딱한 화석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다. 또한 포티의 은유는 얼마나 유러머스하고 문학적인지!  품격 있는 책에 수시로 “ㅋㅋ“, “^^ ” 또는 “!!” 같은 것들을 그려 넣었다.





많고 많은 이야기 중에 역시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은 문턱을 넘어선 생물학적 사건들에 대한 것이다. 그 중 캄브리아기에 발생한 생물종의 급격한 진화(일명 ‘캄브리아 대폭발’)의 이야기는 빠뜨릴 수 없다. <조상이야기> 토론시에 있었던 짧은 논쟁이 강하게 기억되어 그런 것 같다.


캄브리아기 초기에 동물군은 거대해지고, 딱딱한 껍질과 눈이 생기고, 위협적인 무기를 갖춘 기이함의 잡탕들로 변했다. 그 전 시기의 동물은 작고 물렁물렁한 덩어리였을 뿐!


<원더풀 라이프>란 책으로 캄브리아 대폭발을 세상에 알린 굴드는 말 그대로 캄브리아기에 생물체가 급격하게 분화했다는 주장인 반면, 저자인 포티는 선캄브리아기의 생물들이 작은 연체류였기 때문에 ‘대폭발’을 단지 ‘눈에 보이는 화석의 대발견’의 문제로 간주하는 듯하다.


생물이 급격하게 발생 혹은 진화한 이유에 대해서도 아직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한 것 같다. 광합성 식물에 의한 산소의 축적, 지질적 요인으로 인한 암석 내 인의 대량 해양 침투, 빙하기와의 연관성 등등... 아니면 뭔가 절대적인 힘에 의해?


'문제가 있다고? 격변이라고 보면 돼! 이런 임기응변식 설명은... 금기이다. 과학자들은 마술사가 모자에서 꽃을 꺼내는 식으로 임기응변을 자랑스럽게 꺼내놓지 않는다. 그것은 적절한 행동이 아니다.‘ -. 336





정답이 무엇이냐를 떠나서 나는 학자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새로운 화석의 발굴로 간신히 짜 맞춘 퍼즐을 다시 엎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포티의 말대로 학계의 말단에 속하는 고생물학 분야에서 별로 읽는 사람도 없는 책에 한 줄을 써넣기 위해 그들은 몇 십 년 동안 혹한과 혹서를 견디며 돌을 깬다. 세포가 생긴 이래 10억년 동안, 생물은 이런 미친 열정과 끈기와 탐구심을 가진 생물종으로까지 진화한 것이다!


'많은 고생물학자들은 이빨과 몇 점 안 되는 뼛조각과 씨름하면서 그런 이야기에서 누락된 몇 쪽을 채우거나, 장 하나를 새로 쓰기 위해서 평생을 바친다... 그런 이야기를 쓰려면 오로지 한 우물만 파는, 때로는 거의 종교적이라고 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자신을 잊고 몰입하는, 볼품없는 뼈에 온 정신을 쏟는 헌신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p. 372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후회스러웠던 점은 10년 전 고생물학에 심취했던 한 동료를 ‘쓸데없는 것에 관심을 다 가진다’며 무시해버렸다는 것이고, 가장 아쉬웠던 점은 거짓 관심이라도 가지고 그와 얘기해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파비니아, 아노말로카리스 같은 괴괴한 이름을 그를 통해 한 번이라도 들어봤다면 내 정신이 그 때 새로운 가지로 진화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참으로 다행스런 우연이 있었다. 책을 찾다가 뉴턴 5월호에서 캄브리아기 대폭발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과학잡지에선 이게 심심하면 우려먹는 주제인지 모르겠지만, 잡지의 3차원적인 화보(엄격히 말하면 1970년대에 캠브리지의 위링턴 교수팀이 지독한 끈기로 재현해 낸 것) 덕분에 읽기조차 난해한 생물들이 ‘대략 난감’한 모습으로 내 머릿속에 이미지화되었다. 책과 잡지에서 나온 학자들과 동물들을 비교해가며 캄브리아기 대폭발을 다시 읽는 것은 즐거움 그 자체였다. (읽기를 참기가 어려워 슬그머니 실험실로 잠입했다. 험험...)





현재의 생태계가 존재하기까지 넘어온 많은 문턱들. 분자들이 세포를 형성한 사건. 성적 분화, 육지 정착... 포티는 마지막 문턱이 바로 ‘의식’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 의식이 호모 사피엔스만이 가지는 고유의 특성은 아닐 것이라고 조심스레 주장한다.


‘네안더 계곡에 살던 의식을 지닌 고대 주민들을 별도의 주민으로 분류한다면 우리는 호모사피엔스가 유일한 의식의 소유자라는 개념도 버려야 한다... 의식은 풍조류의 화려한 꼬리 깃털들처럼 정도의 차이에 불과한 많은 특징들 중 하나가 된다.’ -p. 429





책을 읽고 나니 세상이 예전과 달라진 것 같다. 나무, 풀, 꽃, 벌레, 새, 사람... 모든 것이 신비스럽다. 마법. 원시스프에서 시작하여 고고한 세월이 이룬 마법의 세상. 우리들이 공유하는 조상.

인간은 매우 특별하고 중요하기도 하지만 별로 특별하거나 중요하지 않기도 하다. 한 생물종에 대한 번성과 멸망의 이야기가 단순히 환경 적합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우주적인 사건, 지질학적 변화와 같이 우연적 요소에 의해 더 크게 지배된다는 포티의 말은 당연히 호모 사피엔스에게도 적용된다.


‘생존은 자질과 상관없는 문제였다. 미덕이 생존과 무관하고, 생존이 그저 운에 따른 것이 아니었을까? 어떤 특성들이 나중에 선호될지 미리 알기란 불가능하며, 생명의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일에 희생자들 보다 생존자들이 반드시 더 적합했다고 볼 수도 없다.’ - p. 293





언젠가는 지금과 같은 우리는 지구 위에서 사라질 것이다. 생물의 역사를 밝혀내고자 했던 우리의 모든 노력은 다시 태초의 원시스프 속으로 사라질 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지렁이와 고양이와 박쥐가 합체된 모양의(어떤 생명의 역사도 같은 방식으로 두 번 전개되지 않기 때문에-p. 445) 스마트한 생물이 생겨나서  예전엔 참으로 해괴한 것들이 번성했구나 하며 감탄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의 몸속에서 나의 일부가 숨 쉬고 있을 지도...





‘우리는 자신의 기원으로부터는 달아날 수 없다. 그것은 지금도 우리의 운명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p. 383

 



* 원시스프에서 세포가 생겨난 이야기는 포티가 언급했던 린 마굴리스의 책을 읽어볼 생각이다. 마굴리스의 책을 읽고 나면 내 몸에 조상 모시는 제사라도 지내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을까 염려된다.

 

** 생명의 역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은 내가 고른 "바르샤바 협주곡" 보다는 포티가 고른 "볼레로"가 더 적합하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생명의 이야기는 한 종인 인류의 역사와 형태 및 전개속도가 닮았다.... 느리고 평온하게 시작되어 한 주제를 조금씩 다르게 한 변주들이 계속 이어진다. 속도는 서서히 빨라지고 연주하는 악기가 바뀌곤 하지만 기본 박자는 계속 유지된다. 그러면서 이따금 조가 바뀌고 악기가 하나씩 추가되면서 속도감과 열기가 강해지다가 마침내 다양한 악기들이 하나가 되어 웅장하게 울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p.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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