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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8 09:00

비슷한 것은 가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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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늪 속에서 빠져나오기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망각(忘却)을 즐긴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그것은 결코 의도하지 않았으면서도 결국 결과로 나타나게 됐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 혹은 뻔해서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고 치워버리는 많은 의식들이 우리를 망각의 늪으로 이끈다.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공기의 존재를 우리는 과학 시간이 아니면 떠올리지 않는다. 부모님의 은혜에 대해 수련회 때의 촛불의식 시간이 아니면 눈물 흘려보지 못하고, 자신이 부모가 된 다음에야 비로소 뼈저리게 느낀다. 곁에서 힘을 불어넣어 주고 아낌없이 사랑해 주던 친구나 연인이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그의 소중함을 느낀다. 이처럼 중요한 사실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안타까움의 탄성을 흘리곤 하지만 이내 원래대로 돌아오게 돼, 사실상 망각은 우리의 고질병이 돼버렸다.



우리에게 개혁적인 실학자로 잘 알려진 연암 박지원은 이러한 우리의 자연스러운 망각에 환기의 망치를 두드린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에 옮기기 어려웠던 것들(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는 것), 이 시대의 진리가 돼 버린 고정관념 등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연암 박지원의 예술론과 산문 미학을 다룬 『비슷한 것은 가짜다』(정민, 태학사, 2000.)는 연암의 글들을 스물다섯가지 주제로 나눠 소개하고 쉽게 풀이한 책이다. 다소 지루할 뻔했던 내용을 움베르트 에코의 글을 인용하고, 카프카의 작품, 신동집의 시와 연결짓는 등 현대적으로 적절히 재구성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또한 각각의 다른 주제들이 서로 다른 것을 이야기 하는 듯 하면서도 결국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돼 내용의 깊이가 더욱 긴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저자의 손을 통해 연암을 살아 숨쉬게 한 것 이었다.



내가 이 책을 통해 만난 연암 박지원은 평소 그에 대해 『호질』, 『열하일기』등의 저자로, 그리고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만 알고 있었던 것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연암은 내게 위대한 철학자이며 사색가요, 문장가로 다가왔다. 또한 천재성과 역사성을 풍부하게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사유는 현재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고, 타당할 것이다. 나는 이토록 뛰어난 그가 왜 우리에게 실학자 정도로 밖에 인식되지 않는지에 대해 답답해졌다. 우리는 왜 그를 잘 모르는가? 우리가 망각하는 것 중의 하나에 연암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을까?



책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끝이 없을 정도로 무궁무진하지만, 그러면서도 또한 하나의 주제로 귀결된다. 제목에서 보여 지는 것처럼 ‘진짜’에 대한 추구가 바로 그것이다. 어떤 분야, 어떤 방면에서든지 ‘진짜’를 찾고 ‘진짜’에게로 올곧게 정진하여야만 그 정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왜 이렇게 ‘진짜’를 찾는 일이 매우 어렵다. 어렵기 때문에 더욱 그 가치를 유지하는 것 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가짜들은 우리를 고정관념 속에 가두고, 형식적인 틀에 가둔다. 까마귀가 흉물스럽다고 여기고, 글을 쓸 때 마음을 통하게 하기 보다는 보기 좋은 형식과 미사여구를 중시한다. 이것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척도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갖고 있지만 그 이상의 적극성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알고도 모른 척 이렇게 덮어버리는 우리의 태도가 우리를 더욱 안일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진짜’를 찾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 ‘진짜’인지를 몰라서가 아니다. ‘진짜’를 알고 있으면서도 근시안적인 눈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가짜를 선택해버리는 우리다. 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망각은 자연스럽다. 기억하기보다는 잊혀지기가 더 쉽고 간편하다. 물고기가 물을 잊고 사는 것처럼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정신을 통하기란 어렵고 예(禮)는 힘들다고 외면해 버린다. 세상이 평가해주는 타인들의 시선에 익숙하고, 그렇게 이루어진 다수의 의견에 마구잡이로 동참해 버린다. 그것이 대중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결코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므로 대중 속에 파묻힌다. 결국 우리에게 외면당한 ‘진짜’들은 우리 앞에 설 자리가 점점 좁아져 버린다. 연암은 이러한 우리의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얕은 지식과 안목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깊은 사색과 이를 통해 얻어진 마음으로 ‘진짜’를 이룩하라는 것이다.



나는 얼마 전에 과제로 낼 단편 소설을 쓴 일이 있다. 몇 시간에 걸쳐 시간과 씨름한 끝에 소재를 정하고, 주제를 정하고, 제목을 정했다. 그러면서 한 글자 한 글자 어렵사리 적어 나갔다. 겨우 습작을 마치고 나서 퇴고를 해보려는 순간, 나는 물밀 듯이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내 글을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내 글에는 내가 없었다. 내가 소설을 통해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저 멀리 달아나 버리고, 그저 담당 교수님의 구미에 맞게 쓰려는 의도만이 원고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있었다. 습작을 통해 나는 글쓰기가 어렵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였지만 그것보다 나 자신도 내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는 것에 더욱 안타까웠다. 나 자신도 모르고 쓴 글을 누가 공감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내가 좋은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론적으로는 많이 접해봤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 방법이라는 것들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형식에 얽매이기 보다는 내용의 깊이가 중요하다는 점, 사색을 통한 깨달음이 주제에 온전히 담겨 있어야 한다는 점 등이 그러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을 뒷전으로 해놓고, 온갖 미사여구와 형식적인 틀에 정성을 쏟으려 했던 나는 결국 가짜에 눈이 멀어 ‘진짜’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런 과정 속에서 나의 알맹이 없는 글은 껍데기마저 형편없이 조각나 있었다.



그 때 연암은 책 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망각의 늪에 점점 더 깊게 빠지고만 있는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무뎌지지 말라고, 타성에 젖지 말라고, 끊임없이 생각하라고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가짜에 가려져 잊혀진 진짜를 나를 둘러싼 현실 속에서 그리고 내 안에서 찾게 해 주었다.



내가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비록 과제 때문이었지만, 동기야 어찌됐든 살아 숨쉬는 연암을 제대로 만날 수 있어서 몹시 다행이었다. 그리고 연암의 원문을 내가 직접 해석하여 더 큰 깨달음을 얻고 싶다는 긍지를 갖게 됐다. 한문으로 씌어진 글이라고 하면 고루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는데, 이 책을 읽으니 원문이 더욱 궁금해졌다. 게다가 연암의 문체는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으니 한자 실력을 키워서 도전해보고 싶은 과제가 하나 더 생긴 것 이다.글쓰기는 인생을 좁게 본 것과 같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살 수 있는 지에 대해 적어놓은 것 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방향성을 상실한 현대 사회의 문화가 어떻게 하면 그 정체성을 찾을지에 대해 당대 지식인들의 의식을 촉구하게끔 하기도 한다.



그의 말은 시간을 불사르는 듯 날카로웠고, 누구라도 그 앞에서 무색해질 만큼 정교했다. 앞으로도 연암은 언제까지나 살아 숨쉬며 온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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