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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3 09:00

꽃의 고요 _ 7

조회 수 2087 추천 수 0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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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서 돌아온 후 일주일 동안

짐을 풀지 못하고 출렁이며 살았다.

친구들과 어울려 거하게 마셔도

벗어났던 낮과 밤이 제 홈에 돌아와도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르에서 홀린 듯 만난 판화(版畵)의

세마 춤 신도들이 시야 속에서 쉬지 않고 돌았다.

춤사위 하나는 무용 치마 끝을 머리 위까지 올리기도 했다.

그림을 책들 사이에 끼워 숨죽이게 해도 마찬가지.

이번엔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서 있는

성 소피아 성당과 블루 모스크가 빙긋 자리 바꾸며

천천히 시계 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다.



살아서 돌지 않는 것이란 없다.

지구도 돌고 달도 돌고 해도 돌고

태양계, 저 하늘의 물결 은하도 돈다.

메블라나** 신도들이 춤추며 돈다.

몸속의 피도 돌고

원자핵도 전자도 돈다.

춤추며 돌며 기도하는 메블라나들,

모자와 어깨와 팔과 허리와 아랫도리가 돈다.

두 발도 돈다.

팔들을 천천히 모았다가 활짝 펴고

폈다 다시 모으며 돈다.

경건(敬虔)이 바야흐로 춤으로 바뀔 때까지,

기도가 자기 자신과 독대하는 간곡한 공간이라면

서로 마주 대하는 순간 춤이 되어 돈다.

호텔 창밖에 건성건성 내리는 눈송이들도 휘돌며

덩달아 춤이 된다.



도는 일 멈추면 그만 유적(遺蹟)이 된다.

에게 해와 지중해를 동시에 내려다보는

보드룸 십자군 성의 늦겨울 텅 빈 황혼.

도서관과 유곽이 길 하나 두고

같이 묻혔던 에베소 시가지.

물소리와 음악으로도 병을 치료했던

아스클레피오스 종합병원과 함께 주저앉은

산성(山城)도시 페르가몬.

모두 겨울 서리 시간에 멎어 있다.

아직 돌고 있는 건

잊힌 듯 이동하는 몇 소대의 양떼들

저 아래 무섭게 물결치는 시퍼런 에게 바닷물

산정(山頂)위로 수직으로 오르는 몇 줄기 구름

무릅 관절 접어야 손에 잡히는 땅 높이의 아칸서스 잎들

코린트식 기둥머리에 새겨진 아칸서스 무늬는

돌 옷에 덮이고 깨어져내려 땅에 묻혀도,

살아 있는 아칸서스는 땅을 무늬로 덮으며 돈다.



신들의 상상력은 인가보다 가혹한 데가 있다.

폐허의 산정에서 내려다보면

문명이란 지상(地上)에 번지는 버짐같은 것.

돌 옷 같은 것.

신 없이 인간이 어떻게 에베소 옆 산등성에

거대한 돌기둥 몇 박은 엄청난 폐허 성 요한 교회를 만들고

바다를 멀리 내쫓고

안 보이다 갑자기 나타난 "원 달러! 원 달러!"를 외치며

안 팔리는 사진첩 내미는, 다리 절며 미소짓는

저 터키 사내의 눈에 얼비치는 혼불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일행을 따라오다 돌아설 때

앞서보다 더 심하게 다리를 절며 웃음 잃지 않는

저 돌 꽃!

그의 등 뒤에서 내가 문득 두 사람 몫의 생각에 잠긴다.



사람과 기도와 춤이 어울려 하나가 된다.

인간의 바램이 복 비는 신전 제단이 되지 않고

폐허에 던져져도 미소짓는 혼불의 바램이 될 수 있다면,

그 바램이 일어서서 첫발 내디딘다면!

이스탄불 토요일 저녁 거리.

넘치듯 살아 움직이는 동서양 혼성 합창이

누가 춤사위만 한번 떼면

모두 불현듯 춤을 추며 돌 것 같다.

그랜드 바자르의 상인들도

열심히 흥정하는 손님들도

나에게 세마 춤 값을 당당히 깍인 청년도.

그는 고른 이빨 드러내 고맙다고 하며 능숙한 솜씨로

판화보다 더 값나갈 포장지에 그림을 싸

가슴 높이로 나에게 건냈다.

춤을 안고 속으로 소고(小鼓)치며 바자르 속을 돌다가

세마 모자 쓰고 방금 두 팔로 허리를 받치며

춤추듯 건너편 코너를 도는 나를 만난다.

그가 빙긋 웃는다.

내가 나를 놀래켰다.





< 나를 변화시킨 독서 >



황동규 시인 <꽃의고요> 중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르에서"를 읽고 터키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이 시를 읽은 후 매일 터키의 전통춤 "세마"를 보고싶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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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경화 2007.01.23 09:00
    도는 일 멈추면 그만 유적(遺蹟)이 된다. 기억이 출렁대지 않으면, 세포의 진동이 멈추면 그만 유적이 된다. 코너도 춤추는 듯이 돌고... 하루하루를 춤추는 듯이 살고 싶어요
  • ?
    이재우 2007.01.23 09:00
    '재주의 적은 잔재주다'... 도대체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분명 이분의 시집에서 본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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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수 2007.01.23 09:00
    눈보라 치는 설악산 중청 산장에서 잠을 청했다. 눈을 뜨니 새벽 2시/힘없는 비상구 불빛과 피곤에 지쳐 누워 잠든 사람들의 모습/ 풍장 35를 읽고 있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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