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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정체성과 개인은 스스로가 삶을 지키고

누릴 때에만 유지, 존속되는 것이다 >





1. 시작하며....



삶을 누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무미건조한 일상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인생의 가치관과 지향점을 갖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것은 환경의 변화와 함께 찾아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상황을 바라보는 개인의 시각변화에 의해 성큼 다가선다고 볼 수 있다. 문학작품을 대하는 우리의 삶은 이것과 별개로 볼 수만은 없다고 본다. 작품을 읽는 행위 자체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과 새 삶의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의 인생사에 대한 현실세계가 반영될 수밖에 없는 소설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생활의 감동을 안겨준다. 물론, 이것이 무비판적인 맹목으로 적용된다는 것이 개개별의 상황과 이해와 감동의 정도에 따라 분명히 다른 것임에는 재고의 여지가 없다. 이에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와 쿤데라의 ‘농담’이 소설들의 고찰을 통해 우리 인생의 지평을 여는 새로운 시각을 가져 보았으면 한다.





2. 존 르 카레의 ‘추운나라에서 온 스파이’를 읽고



우리에게 있어서 스파이 소설이라는 것은 너무 생소하지 않은가? 추리소설이면 추리소설, 스릴러면 스릴러 대부분 경험이 많지만, 스파이 소설이라는 것은 접하기도 쉽지 않고, 머릿속에서 마치 영화처럼 스파이 장면들을 연출해야 한다니 부담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허나, 영국작가인 존 르 카레는 나에게 그러한 부담감이나 걱정들을 떨쳐버리도록 새 힘을 실어주었다. 더불어 나에게 소설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심어주었다. 우선 그의 작품인‘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를 내용을 거론하기 전에 소설의 배경에 대해 설명해야만 할 나름대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 소설은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에 나온 작품이다. 63년은 11월 22일 텍사스의 달라스에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그 후임 존슨의 결정으로 미국은 월남전의 진흙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를 결정하였고, 공산주의는 악의 대명사였다. 그 시절에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색을 선택해야만 했다. 회색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지도상에 표시된 것처럼 공산주의의 빨강이냐 민주주의의 녹색이냐를 선택해야만 하던 시절이다. 이런 시절에 존 르 카레는 회색의 스파이를 창조해냈던 것이다. 끊임없이 회의하고 의심하는 햄릿형 스파이의 앞날은 이미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은 냉전이 극에 달했던 1960년대 베를린의 국경 검문소에서 시작한다. 우리 영화 ‘이중간첩’의 첫 대목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서독으로 달아나려는 스파이가 동독의 저격수에게 피격된다. 영국 스파이 책임자인 리머스는 이 일 이후 동독 내의 자기 스파이들이 모두 사살된 것을 알게 된다. 리머스는 복수를 위해 이중간첩이 되기로 한다. 평생 무엇이 진위인지 촉각을 곤두세우며 살아온 리머스의 의식 세계는 이렇다.



‘말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의 일종이다. 세계 곳곳의 첩보원들이 모두 그런 거짓말을 한다. 당신이 그들에게 남을 속이는 법과 증거를 감추는 법을 가르쳐 주면 그들은 당신도 속인다.’



삶에 찌든 그의 모습에 연민을 느낀 애인 리즈는 그의 눈동자를 보면서 뭔가를 알아챈다.



“당신은 남을 개종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 광신자예요. 그건 위험한 존재죠. 당신은…복수나 무언가를 맹세한 사람 같아요.”



이 소설은 단순히 동서 냉전의 이분법적인 단면을 보여주는 데서 나아가 악의 근원을 찾아 나선 한 인간이 발견하는 삶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사상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러한 실존적인 깨달음은 작품 내에서 이야기 중심 줄기의 행동과 심리 상태에 극히 치중된 묘사를 통해 보여 지고 있으며, 흐름과 관계없는 설명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관계없어 보이던 사건과 행동들이 나중에 모두 거미줄처럼 얽혀서 끌려나오는 점에서는 추리소설의 스타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느낌은 소설 내부의 시간적 배경을 통한 부분도 있지만, 기존의 체제를 부정하며 홀로 선선히 걸어야만 하는 개인의 운명에 대한 냉정한 숙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3. 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읽고



‘농담’에서 쿤데라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영역이 사라져 버린, 사라질 것이 강요되어지는 사회의 현실 속에의 한 인간의 정체성의 문제인 것 같다. 처음에 이 소설을 읽으며 예고없이 바뀌는 '나'의 존재 때문에 혼란스럽기도 하였으며 왜 작가가 이러한 방식을 택하였는가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 하였으나 지금 생각으로는 작가는 '나'를 여러 사람을 나타내는데 사용함으로써, 루드빅 한 사람을 통해 보는 사회의 모습, 사회 속에서의 루드빅의 모습을 나타내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즉 주인공을 루드빅 한 사람으로 상정하지 아니하고, 각기 다른 여러 사람을 통해 보는 사회의 모습, 그 사회 속에서의 그 사람들의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즉 여러 사람을 주인공화 함으로써 다양한 가능성을 나타내고자 하는 듯하다. 여기서는 루드빅을 통해 중심적으로 생각을 해보고자 한다.



루드빅은 개인의 영역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 모든 사람들이 틀릴 수 있으며, 시대정신이 틀릴 수 있으며 심지어 혁명 자체도 틀릴 수 있는 반면에 일개 개인에 불과한 자신이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는 평범한 한 젊은이였다. 따라서 그는 현재까지의 자신과 시대정신에 따라 되어야만 하는 자신, 그리고 희망 속의 자신 사이에서 방황을 해야만 했고 그러는 사이에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게 되며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진실된 여러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파악하게 된다.



그는 젊은 청년으로서 여자를 갈구하였고 그는 마르께다에게 장난 어린 엽서를 쓴다. 하지만 그는 그 엽서의 객관적 중요성 때문에 당에서 축출되게 되고 검은 배지의 부대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기대를 걸어 보기도 하지만 그는 쓰라린 배신을 맛보게 되며 그를 배신한 친구, 제마넥에 대한 증오는 나중에 그에게 있어서 삶의 동기가 되게 된다. 그는 그 검은 배지의 부대에서 자신이 평생 적으로 간주하고 있던 사람들과 동지가 되고, 반대로 그가 평생 사랑하고 동지로 생각하던 당의 총의 표적, 즉 적이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그는 자신의 과거와 연결된 모든 끈이 끊어 졌으며 자신이 요구받건 당위의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또 자신이 처한 상황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선택되어 졌으며 또 그러한 -사회가 그에게 강요한-상황에서 탈출할 수 없는 약한 개인의 비애를 느끼게 된다. 또다시 그의 개인적 정체성이 위기에 몰리게 된 것이다. 그는 그러한 상황에서 평범함, 조용함, 단순함, 그리고 수수함이라는 가치를 추구하게 되는데, 바로 그러한 여자인 루찌에를 만나게 된다. 루찌에는 삶의 정체성을 잃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의미를 찾을 수 없던 루드빅에게 살아가는 이유요, 의미가 되게 된다.



그는 마지막까지 그의 파멸이 명령된 그 강당과 그 강당에서 손을 들었던 그의 친구들을 잊지 못한다. 증오와 복수가 그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흐르는 것, 인생사가 반전되었다. 루드빅이 다시 복권이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파멸 선고를 받을 당시의 제마넥을 생각하고 복수를 결심하였으나 제마넥은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또다시 자신의 삶의 초라함과 비애를 느끼게 되고 그는 자신의 막역한 친구를 찾아가 예전에 자신이 연주하던 클라리넷을 다시 연주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게 되며 그는 연주를 하는 동안 자신의 고향과 회심을 맛보게 되나 곧 그는 이 고향이 이 세계에는 속해 있지 않으며 더 이상 존재하고 있지 않는 것들의 이미지 보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그의 유일한 고향은 자신이 무너져 내리는 붕괴이며, 모색과 동경의 하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이 이 소설은 사적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주의에서 한 개인이 끝까지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에서 비애를 느끼게 하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의도한 바와는 상관없이 파멸의 길을 걸어야만 했고 또 나중에는 인간에 대한 증오가 삶의 이유가 됐던 루드빅의 인생을 통하여 사회가 개인을 무시하고 전체주의적으로 흐르게 될 때 그 사회 속의 인간이 얼마나 미약하며 또 그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느끼게 해준다.





 

4. 끝으로.....



두 소설의 고찰을 통해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인생의 성공과 소속감을 갖는 것보다 스스로를 규정하고 자신의 삶을 얻는 것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느껴본다. 이것은 결국, 스스로의 인생에 자유의지를 통한 자율성을 허락하는 것이다. 어떤 세계도 제공할 수 없는, 오직 자아만이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체적 자아로 생활에 서는 것이다. 내 삶의 주인은 누구인 것인가? 체제나 사회가 내 인생의 전부를 맡아줄 수는 없다. 흡사, 홉스가 말한 사회계약의 한 형태인, 인간이 생활을 누리기 위해 스스로가 가진 주체적 자연권 즉, 주권을 공권력에게 이양함으로서 또 다른 전제군주인 ‘리바이던’을 양성하는 불미스러운 사태를 발생시키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생활은 자신이 누리는 것이다. 더불어 그 생활에 대해 주체적 책임을 지는 것, 의무를 다하는 것이 인간의 생활이다. 물론, 이것이 힘겨울 수도 있고 이것으로부터의 탈피를 꿈꾸는 이들도 분명히 있으리라고 본다. 허나, 이러한 행동들은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외면과 회피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개인의 삶에 대한 존엄성 자체를 내버리는 행위로밖에 설명할 수 있는 말이 많지가 않다. 인간 정체성과 개인은 스스로가 삶을 지키고 누릴 때에만 유지, 존속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향유하는 개인이 스스로의 권리를 누려야 하는 것이다. 아무쪼록 존 르 카레와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읽음으로서 이들 소설의 초점이 개인과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 맞추어져 있음을, 그것에 대한 서술임을 알 수가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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