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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7 09:00

불교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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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다.가와이하야오,나카자와신이치/동아시아

2006.5.13.서울 집에서



●불교로의 회귀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전지구적 신화에 가장 가까운 것은 오로지 불교뿐이다”라고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

-조셉 캠벨-미국의 비교신화학자.. 크리스트교의 자연관이나 배타주의에 반감을 품어 아메리카 선주만의 신화나 불교사랑 등으로 관심을 확대했다. 저서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의 힘 등이 있다.

- 갈릴리 호반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을 때의 예수는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 감동은 붓다가 설법할 때의 광경을 방불케 하죠. 붓다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평범하게 죽어갔지요 배탈이 나서 죽었으니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셈이지만 붓다의 그런점이 마음에 듭니다.

-역사적으로 종교는 인간과 신 사이에 어떻게 하면 엄청난 비대칭의 관계를 형성할 것인지에 전력을 쏟아왔는데 오로지 불교만이 대규모의 종교이면서도 대칭적 관계를 중시해왔죠.

물론 유대교나 이슬람교 크리스트교도 신 앞에서의 인간의 평등을 말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신과 인간 사이의 엄청난 비대칭을 전제로 한 평등인 셈입니다.

-예수가 받은 십자가형의 의미도 이 절대적인 비대칭을 전제로 하고 있죠. 유대교에서는 신과 인간 사이의 비대칭이 거의 절대적이어서 명령을 받을 뿐 상호간에 사랑의 교류 같은 것이 발생할 여지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크리스트교에서는 예수가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사랑의 유동이 일어날 수 있는 회로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이슬람에서 말하는 ‘ 알라’가 불교의 진여와 똑같다는 인식에 도달한 이슬람의 종교가가 있다면 거기서는 이미 신과 인간의 비대칭마저도 사라질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어떤 종교든 신비주의의 단계로 접어들면 신과 인간 사이의 비대칭은 점차 없어집니다.

-종교가 고대국가의 동반자로 탄생해서 국가의 개념에 필요한 엄청난 비대칭을 가장 중요시해왔던 셈인데 그런 종교의 역사를 초월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열대중 마지막 장 <회기>를 읽어주십사 하는 부탁을 드렸던 그 책에서 “나는 불교도다”라고 고백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신석기 시대 사람이다” “신석기인의 사로로 살아가고 있

을 따름이다”라고 말하곤 했죠

-레비 스트로스는 종교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입니다. 특히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에 대해 비판적이어서 “불교, 크리스트교,이슬람교의 순서로 500년 간격으로 새로운 종교가 탄생하면서 점점 질이 나빠지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라고 썼을 정도죠 본인도 표현이 좀 지쳤다고 생각했는지 2001년에 새로 나온 판본에서는 ”다른 몇 가지와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시대착오적인 고찰이다“

-레비 스트로스가 말하고자 하는 -미개사회의 ‘야생의 사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과 동물이 서로 형제와 같은 혹은 부모 자식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며, 결혼하기도 하고-옛날에 인간과 동물은 완전히 대등한 존재로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고도의 문화를 갖고 있었던 것은 오히려 동물들이었습니다. 신화에 의하면 인간은 동물과 결혼한 덕분에 그에 대한 답례로 문화를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우주 안에 발생한 이런 비대칭을 어떻게 해서든 사고로 바로잡으려는 생각에서 신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레비 스트로스의 생각입니다.

-근대과학은 유럽에서 발달했다기 보다 크리스트교 문화권에서만 발생했죠. 중국의 역사와 문명을 연구한 니담이 말했듯이 지식은 중국인들도 많이 갖고 있었죠. 하지만 지금의 기술과 연결되는 과학기술은 특별히 크리스트교 문화권에서만 발생한 셈이지요. -크리스트교 문화권의 신은 인간에게서 멀러 떨어져 있는 존재라는 점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겁니다. 말하자면 신을 대신해서 인간이 자연에 대해 ‘모든걸 내가 한다’라는 사고가 탄생한 셈이 아니었을까?

-구석기시대의 유적을 봐도 곰이 신이었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이누어로도 카무이는 곰이며 인간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 즉 신과 동일한 단어로 표현되었다. 곰이 신이었던 시대의 신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서의 신이 아니었다.

-미개사회에서나 샤머니즘과 야생의 사고는 공존하고 있다. 신화의 논리에 의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행위와 초월적인 영역과의 접촉을 시도하는 샤머니즘은 완전한 공생관계에 있는 셈이다. 어느 시기가 되자 갑자기 야생의 사고가 미치는 영향력이 축소되고 샤머니즘이 확되된다. 이런 변화는 아무래도 국가라는 문저하고도 관련이 있다. -샤머니즘에 의한 패권의 확대는 아시아의 고대국가에서 최초로 발달

-이즈쓰 도시히코 선생님은 <이슬람의 탄생>에서 이슬람교는 본래 매우 소박하고 도취적인 샤머니즘의 바탕위에 유대교가 접합해 탄생한 종교로 이런 샤머니즘적인 성격은 후세에 발전을 거듭하도 변하지 않았다는 말을 되풀이 하고 있다.-소박했던 이슬람교가 고도의 종교로 성장하게 된 때는 13세기 즉 몽골제국과 격돌했던 시기이다.-일본에서도 몽골제국과 접촉하면서 그 영향으로 가마쿠라신불교가 나타났다.-가마쿠라신불교의 내부에서 정토진종과 같은 일신교에 가까운 종교-비슷한 현상이 전세계 일어남 .티베트 불교도 이때 비약적으로 진화 -유럽에서도 크리스트교 신학이 경이적 발달

-아랍세계의 사람들은 그리스 철학을 번역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는데 몽골제국과 충돌한 이후 자신들의 신학을 만들어냈던 겁니다. 놀라울 정도로 수준 높은 것 만듬. ‘알라’가 ‘진여’와 거의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관념의 세계로 올라간 것도 이 시기의 일이라고 이즈쓰 선생 생각함

-실제로 몽골제국이 석권한 지역에서는 야생의 사고가 낳은 결과라는 의미의 신화는 거의 전멸 상태 -야생의 사고에 의해 탄생한 신화는 전멸해버린 대신 하늘에 대한 관념은 발달해 샤먼이 하늘과 지상을 중개하는 국가적 규모의 종교가 발달 -동아시아의 고대국가는 일본의 천황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샤머니즘의 특징이 강함 -하지만 중세에 그것을 완성시킨 것은 몽골제국임.초원에서 유목이나 수렵을 하는 다른 민족에 둘러싸여서 생활하던 몽골 사람들의 사고에서 야생의 사고와 샤머니즘이 공존함

-균형이 깨지면서 샤머니즘이 비정상적으로 발달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것과 동일한 패턴 -몽골족 주변의 민족을 보면 아직도 이 두가지의 동거가 이루어 지고 있는 곳 많음.시베리아 민족이 바로 그런 경우 . 야생의 사고가 샤머니즘의 비정상적인 발달 억제. 몽골에서는 샤머니즘이 비정상적을 정도로 발달 -샤머니즘의 발달은 가능하면 억제하려 했다. 대신 사고 중심의 종교를 만듬

-이슬람은 신에 대한 정열의 종교. 그들이 보기에 유대교는 이론이나 논리로 순수한 정열을 더럽히는 종교 -예언자와 유대교는 긴장 관계

-레비 스트로스는 샤머니즘 전혀 인정 안함 -신과 일체가 되거나 신에게 제물로 바치기 휘해 동물을 죽이는 순간에 신과 관계를 맺는다는 식의 생각은 환상에 불과

-아시아 종교에 두 종류의 명상법 있다.하나는 불교의 정적명상법 더 북쪽으로 가면 샤먼의 트랜스. 일반적으로 둘다 트랜스로 번역 -불교에서는 아무리 깊은 명상에 빠져들어도 사고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죠. 사고라는 표현이 적합하지 않다면 트랜스 상태에 아무리 깊이 빠져들어도 우주적 지성의 활동에 대한 관찰은 멈추지 않는다. -‘우주적 지성’이 통과하는 존재로서의 자아를 망아 상태에서도 버리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불교와 샤머니즘의 명상법의 차이

-한편에는 세계를 분류하거나 질서를 부여하는 사고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질서를 무너뜨리면서 유동해가는 존재에 몸을 맡겨가는 망아의 명상이 있다. -둘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문화

-대제국이 탄생하는 시대에 완전히 분열한 샤머니즘적인 것과 야생의 사고의 성격을 띤 것을 다시 한번 결합하여 이 두가지가 분리되지 않도록 나타난 것이 바로 불교 -불교는 제국이 탄생한 시대에 생겨나서 제국을 탄생시킨 요소에 인간의 지혜를 붕괴해갈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지혜의 회복을 위해 노력한 사상 -미야자카 유쇼 선생님의 <불교의 기원>

-마가다 왕국이라는 대국을 상대로 해서 붓다가 등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로마라는 대제국을 상대로 해서 예수가 등장했다는 것은 결국 둘다 대국의 원리를 탈구축해가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붓다와 장수(長壽)

-신이 교조를 통해서 하는 말씀과 유일 절대의 신이 모하메드를 통해서 하는 말씀의 느낌이 매우 비슷 붓다의 어조와는 결정적인 차이 있다-예수의 어조도 다르다. 예수는 사도가 아니라 신의 아들로서의 이야기-인류에게 보편적이며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종교는 오히려 이슬람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명을 이해하고 이야기를 시작하기까지는 약 9년의 세월이 걸렸다.-사막으로 들어가서 수행을 한다. 그 기간 동안에 인도에 갔다는 설도 있고 이집트에 가서 수행했다는 이야기도 있다.-진리란 말해도 되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다 라고 생각.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사람들에게 말해주세요 라는 범천의 말-예수는 30대의 사상가-붓다는 여든 살까지 살았고 모하메드는 예순살까지 살았다.

-출가한다는 것은 곧 사람들의 삶은 근본적으로는 옳지 못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의미가 되죠. 따라서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매우 미묘한 지점에서 삶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예수는 유대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모하메드도 상당히 격렬한 편

-불교의 특징은 이건 융의 저서에도 나오는 말인데 “이게 아니야 저게 아니야 이게 아니야 저게 아니야를 연발하며 앞으로 나아간다는 데 있다고 할수 있다. 크리스트교라면 ‘바로 이거야’라고 한다 -신들과 인간은 물론이고 동물까지도 전부 윤회에 포함되는 셈. 그런 존재로서 모두가 동등한데 단지 시간 감각만 다르죠 신과 인간은 생명의 길이기 다르니까 시간 감각이 다를뿐 상호간에 본질적인 차이는 별로 없다-알라도 유대교의 신도 이름을 갖고 있죠. 하지만 불교에서는 윤회를 극복한 존재의 경우에는 이름이 없다. 자유자재로 바뀌는 이름을 부여하고 유일한 이름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얼렁뚱땅 넘어가 버리죠

-이슬람교도 수피즘이나 신비주의 쪽으로 들어가면 불교와 거의 같아진다고 했지요. 또한 크리스트교나 유대교도 카바라를 통해서 신비주의로 들어가면 거의 같다고 했던 것은 그 점과 관련이 있지요. 그런 경우에 중개 역할을 하는 것이 신비주의적인 체험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명상입니다.

-‘명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한다면, ‘대뇌 신피질의 활동이 정지했을 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있다.’ 대뇌가 새로운 피질의 활동을 멈추었을 때 낡은 피질이 활동을 시작하는, 바로 그 근처가 아닐까요? 낡은 피질이 활동할 때에 어느 정도의 각성도를 유지해야만 하죠. 각성도가 높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보통 신피질을 정지하면 전부 잠들어버립니다. 우리가 명상을 하면 졸리잖아요.

-빠르고 깊은 심호흡을 지속하는 과호흡법의 경우는 어떤가요? 트랜스퍼스널 심리학에 스타니슬라브 그로프라는 재미있는 사람이 있죠. 마약을 사용하는 방법이 과호흡에 의한 방법과 상당히 비슷할까요? 마약을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 인도의 명상법에서 발달했다.-마약을 사용하는 것은 헬리콥터로 높은 산의 정상에 가는 것과 같은 방법이고, 호흡법을 이용하는 것은 밑에서부터 걸어서 올라가는 것과 같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샤먼의 체험에는 한편으로 과호흡과 유사한 면이 있다. 엘리아데는 중앙아시아 부근에서 그런 식으로 tias의 방식과 명상법의 방식이 미묘하게 뒤섞여 있는 지역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티베트 같은 곳은 정확하게 그 중간 지점에 해당하지요. 한쪽에 샤먼이 있고, 샤먼이 큰북을 치면서 과호흡상태에 이르는 셈이지요. 또 다른 명상법이 있습니다. 인도의 상당히 오래된 명상법 전통과 관련된 것으로, 호흡법에 의해 아주 서서히 명상 상태를 만들어가는 방법이 있지요. 이것과 북방 샤머니즘 방식 간에 미묘한 교착이 일어납니다. 비슷한 현상을 아메리카 선주민에게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남미의 인디오들은 마약을 사용하지요. 북아메리카 선주민, 평원의 선주민은 대개 영적 체험에 마약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신이 불쑥 어떤 말씀을 하면, 그 말씀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혹은 지킬 수 없을 것인가만 고민하면 되었으니까요. 즉 일신교의 종교는 윤리를 매우 중요시하지요. 하지만 불교에서는 심리를 중요시합니다.-일신교에서 윤리를 강조하는 것은, 유대인을 영어로 ‘Hebrew’라고 하잖아요? 그 단어의 어원은 ‘하벨’입니다. ‘하벨’이란 ‘무뢰한’ 이라는 뜻으로, 도망친 노예를 의미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자유를 찾아 도망친 노예이므로 이집트나 가나안 사람들으 입장에서는 ‘무뢰한’인 셈이죠.

-가나안에 도망쳐 온 노예들의 공동체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으로 가서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했죠. 요즘의 성서학에서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여하튼 국가 권력에 반역하거나 도망쳐 온 사람들이 독자적인 공동체를 형성했던 겁니다. 실제로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받은 신의 계시 ‘십계’는 그런 ‘무뢰한’에게 명령한 말씀입니다. 품위 있는 사람이나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했던 말이 아니죠. ‘도둑질하지 말라.’‘간음하지 말라.’와 같이 분명한 윤리의 말씀이었습니다.

-붓다 주위에 모인 최초의 사람들은 상당한 지식인들었죠. “양가의 자녀”라는 말이 붓다의 전기에 몇 번씩 나오죠. 하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대부분 갈릴리 지방의 어부들입니다. 이것도 두 종교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양가의 자녀들에게 일일이 윤리를 말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 이것은 불교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신교의 경우는 윤회를 탈출해서 모든 신들의 세계를 초월한 존재를 만들고 있습니다. 존재 자체, 이것을 신이라고 부르며 이름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인류의 첫 번째 형이상학 혁명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 다음에 과학이 탄생하는데, 그것이 바로 제2차 형이상학 혁명입니다. 그리고 제3차 형이상학 혁명이 도래한다면, 그것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것이 아마도 불교일 거라고 생각해요. 불교는 근대과학과 일신교, 이 둘의 한계를 초월하는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티베트인, “크리스트교도들은 불쌍하다. 죄인을 신으로 모신다. 판자에 못박힌 그런 사람을 신으로 모시다니, 게다가 그건 시체가 아닌가? 불쌍한 종교다.”라는 말을 종종 하곤 했죠.-예수만 격렬한 죽음을 맞이했죠. 몰아붙이는 힘에서 바로 유럽의 근대문명이 탄생한 것이죠. 붓다들의 표현에 의하면, 진리는 세계와 동거할수 있다고 합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과도 같다.” 사실 진흙이 없으면 연꽃은 피지 못하지요. “진흙이 있어도 진리는 더럽혀지지 않는다.”라고 표현하고 있죠.

-프로이트는 “고통을 견디는 것이 스스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생각이 들 때는 말할 테니까 그때는 잘 부탁해.”라고 주치의와 딸 안나 프로이트에게 말했습니다. 결국 프로이트는 그렇게 죽어가죠. 한계에 도달하기 직전까지 싸운 거죠. 한편 융은 죽기 직전에 “내가 죽는 꿈을 꾸었다. 나는 죽어간다.”라고 모두에게 말하고, 스스로 눈을 감고 죽지요.-아메리카 선주민은 자신이 죽을 시기를 정확히 알아서 모두를 초대해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죽어가죠.

● 성에 대한 고뇌와 불교

-예수의 탄생 형태는 복제양 돌리와 거의 같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배를 빌려주는 형식으로 예수 탄생이라는 대사건에 참가했지만, 정작 예수의 유전자는 전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지요. 이것은 일신교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위치를 상징합니다. 훗날 그노시스파 사람들이 이 점을 문제 삼습니다. 그노시스파는 신=진리는 남자이면서 여자이기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처음부터 진리에 여성성이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여성적인 것이 더 우세할 정도죠. 진리는 여성만의 단성생식까지도 가능하다고 할 정도의 기세예요.

-일신교의 계율에서는 신이 인간에게 명령을 하죠. 그것도 절대적인 명령이죠. 따라서 그 명령을 어기는 것은 죄악입니다. -불교의 계율은 그때그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지침을 가르쳐주는 구체적인 매뉴얼인 셈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 계율을 지키지 않는 자는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극락왕생에 실패하는 거죠. 죄를 범하는 게 되니까 하지 말라는 식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것을 하면 똥통에 빠져, 그러니까 하지 말라는 식의 계율이지요.

-사냥꾼이 왜 그런 엄격한 규정을 만들었는가 하면, 숲 속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숲 속을 안전하게 지나가기 위한 차트가 필요했던 거죠. “숲 속 깊숙한 곳에는 들어가지 않도록 합시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동물을 잡을수가 없죠. 그러니 재미있군요. 그야말로 불교의 계율은 성격이 전혀 다른 계율이군요.

-유대교나 크리스트교, 이슬람교는 신석기적인 마술의 문화를 부정함으로써 국가를 초월하고자 했습니다만, 불교는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신석기적인 ‘야생의 사고’를 적극적인 형태로 활용함으로써 국가를 초월해 보편성을 추구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저는 갖고 있지요.

-사냥꾼은 사냥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면 되므로, 산에서의 계율은 거기서 끝납니다. 일본에서는 13세기에 신란이 나타나서 이 문제마저도 해결해버렸죠. 사냥꾼도 구원을 받게 되는 거지요. 그때부터 스님도 부인을 두기 시작합니다.

-대승불교 내부에서는 이 계율이라는 문제가 점점 모호해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공’이라는 망망대해를 건너기 위한 해도였다는 본래 의미조차 잊히고, 겁에 질린 윤리의 규칙처럼 취급당하기도 했죠. 시끄러울 정도로 깨달음을 강조하다 보니, 오히려 불교가 갖고 있는 구체성이나 실천성은 상실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숨어서 하는 건 스님, 하지않는 건 부처”

-유독 불교만이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라고 하죠. 그 사상은 깊숙한 곳에서 ‘야생의 사고’에 연결되어 있지요. 일본불교는 가마쿠라 시대에 그런 문제와 부딪치자 오히려 불교를 초월하는 형태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죠. 그때 조몬 문화적인 것과 불교가 또다시 마주치게 됩니다.

-크리스트교는 남성원리가 강한 종교인데, 본래는 사막의 종교 아닙니까? 그것이 농경의 종교로 들어갔던 겁니다. 농경의 종교가 남아 있는 지역에서는 점차 마리아 숭배가 나타나게 되죠. 융의 경우는 남성원리가 강한 삼위일체에 여성심리를 추가해, 사위일체야말로 신의 이미지에 들어맞는다는 주장까지 합니다.

-이단으로 몰린 사람들은 정통 크리스트교에는 농경사회의 다신교 원리가 내포되어 있다며 계속 비판을 하지요. 삼위일체론이 처음으로 문제시되자 크리스트교는 성령을 성부, 성자와 동등한 위치에 둠으로써 이집트 풍의 농경 증식원리를 일신교 안에 편입하였다는 거지요. 그 다음에 마리아 문제가 발생하자 이단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것은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의 원리를 크리스트교로 들여온 것이 아니냐며 비판을 합니다. 일신교로서는 너무나도 지당한 말을 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내몬 셈이지요.

-사막의 종교와 녹음이 우거진 이집트 종교와의 싸움은 크리스트교의가 형성된 시기부터 이미 많은 파란을 내포하고 있었다. 유대교도 그런 점에서는 사막 안에 있던 때는 괜찮았는데, 팔레스티나로 들어간 순간부터 복잡 미묘하고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이 생겨났죠. 지금의 팔레스티나 문제의 근원도 그때 발생한 셈입니다.

-자본주의는 일신교에 농경사회의 풍요 원리를 받아들이지 않고는 발생되지 않지요. 화폐는 온갖 질적인 차이를 고르게 해서 세계를 균질화한다는 의미에서 일신교로 이어지지만, 상품은 농경의 증식원리와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정통 크리스트교는 옳은 말을 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면서까지 자본주의 노선을 밀고 나가고 싶었던 셈입니다. 지금의 글로벌리즘은 그런 소망이 달성된 결과라고 할 수 있지요.

-농경원리 즉 여성원리를 받아들이려고 하지요. 그것에 대해서 이슬람교는 계속 반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문제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을 종교 시스템 속에 어떻게 편입할 것인가? 크리스트교는 농경사회로 일신교가 들어갔을 때 여성을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를 통해 ‘부인 문제’를 편입한 셈이죠. 본래 신록이 뚝뚝 떨어지는 이집트의 신이었습니다. 일신교는 원리상으로 말하면, 이것을 부정해야만 하죠. 따라서 ‘부인 문제’라는 것은 자본주의의 문제이며 넓게는 일신교의 이집트화라는 문제하고도 연결됩니다. 중간지역에서 발생한 이슬람교가 여성의 원리를 거의 포함하지 않는 종교를 만들었기 때문에 동과 서의 통로가 단절되었다고 레비 스트로스는 생각했던 겁니다.

-불교는 일신교와 달리 여성을 부정하면서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셈이지요. 불교 안에는 어머니를 부정함으로써 어머니에게 도달하도록 하기 위한 가르침이 존재한다는 것을 저는 확신했습니다.

-일신교는 여성을 억압하고 그걸 토대로 상품사회라고 하는 여성적 이미지의 세계를 발달시켰지요. 그런 억압 형태가 지금 글로벌 자본주의로서 아시아 전역을 지배하려 하고 있고요.

-단순한 다신교라는 것은 현대의 미국이나 유럽 문명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일신교의 강력한 힘에 압도당할 뿐이지요. 아무리 문화가 아름다워도 당하고 말지요. 아메리카 선주민이 거쳐온 길은 아름답고 슬프지만, 우리는 그런 길을 걸어서는 안 되겠지요.

-동물과 대결할 때도 완전한 개인으로서 맞서는 셈이지요. 개인주의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개인이 되기 위해서 계율을 중시하지요. 그리고 거기서 접촉하는 것이 바로 모성이니 여성이지요. 수렵문화는 참으로 위대한 것입니다.

-“나는 계율을 제정해야 할 시기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누군가가 나의 가르침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되었을 때다.”

-서구인의 입장에서 보면 불교는 인생의 기쁨을 부정하는 불행한 종교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동양인의 입장에서는 크리스트교가 훨씬 불행한 느낌이 들지요.

-‘아집을 버리면 행복해질 수 있다.’라는 표현 자체가 서양의 행복과 동양의 안심 사이에서 뒤틀리게 되죠.-‘아, 편안하다.’ 혹은 ‘안락하다.’라고 할 때의 ‘안락’이나, 신앙에 의해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한 곳에서 편안히 쉰다는 의미를 가진 ‘안심’이 영어의 ‘happiness'나 프랑스어의 ’bonheur'에 더 가까운 단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리주의적인 근대철학에서 말하는 ‘행복’이 아니라 크리스트교에서 말하는 ‘행복’에서는 그 극한의 이미지로서 ‘천국’이 등장하게 되지요. 이 천국의 이미지는 불교에서 말하는 ‘대락’이 충만해 있는 장소인 ‘극락’과 매우 비슷합니다.

-크리스트교의 경우는 최후의 심판까지 기다려야 하므로 불교에 비하면 사후의 세계는 매우 정적인 편이죠. 그러나 신이 내리신 것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죄악이라거나 생전의 행위의 의미가 재판에 회부된다거나 하는 식이므로, 어딘지 모르게 인간의 행위를 밖에서 속박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하지만 불교의 생각은 좀 더 과학적입니다. ‘이런 법칙에 의해 모든 것이 진행되므로, 그 법칙을 잘 이해해 손해를 보지 않게끔 해서 우리 모두 제대로 대락에 도달하도록 합시다.’와 같은 식으로 자율적인 삶을 선택하도록 설득하지요.

-산과 화폐 둘 다 부패하지 않으며, 소멸되지 않고, 해체되지 않는다는 조건을 갖추고 있죠. 결국 크리스트교의 신이라는 것은 이처럼 영원한 신이며, 그런 생각을 저속하게 표현한 형태가 바로 화폐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불교와 ‘부정’

-유럽에서도 불교를 비판할 때는 ‘생명 부정’같이 생기에 차 있는 것을 부정하는 종교로 간주하죠. 그래서 유럽에서 불교에 대한 평판이 나빠요.

-하이데거의 철학을 동양에 들여오면 밀교와 거의 동일한 것으로 인식될 겁니다. 신비와 관련이 있는 것을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을 뿐이죠.

● 대일여래의 한숨-과학에 대해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애보리지니는 돌로 만든 불 피우는 간단한 도구와 사냥하는 도구를 갖고 있었을 뿐, 달리 문명이라고 할 만한 것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이지요.-애보리지니의 친족을 둘러싼 구조는 그야말로 불합리할 정도로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배후에는 고도로 발달된 군론의 수학을 사용하지 않고는 현대인이 이해할 수 없는 수준 높은 규칙 체계가 작용하고 있었던 겁니다.

-매트릭스는 바로 만다라지요. ‘태장계만다라’를 영어로 표현한 것이 ‘매트릭스’인 셈이죠. 세계적인 수학자로 알려져 있는 다카기 데이지에 의해 일본어로는 ‘행렬’로 번역되었는데, 매트릭스를 생각해낸 케일 리가 왜 그것을 고대의 인도유럽어로 자궁이나 모태를 의미하는 단어인 ‘매트릭스’라고 했는지, 다방면으로 조사한 적이 있지만 결국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양자론의 사고법에 등장한, 숫자의 배치에 의해 이루어진 자궁은 숫자 하나 하나를 더하거나 빼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곧 총체적으로 움직이고 변화해가는 전체성에만 의미가 있지요.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태장계만다라’의 사고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요.

-양자론은 총체로서 변화해가는 것을 ‘매트릭스’로 이해함으로써 탄생했는데, 불교는 똑같은 것을 만다라라는 형태로 표현하고 있지요. 만다라에서도 미세한 부분 하나 하나에 신이 배치되어 제각기 자유롭게 움직이는데, 그 움직임은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스스로도 전체에서 영향을 받으면서 변화합니다. 따라서 만다라에는 중심에 서서 전체에게 구령을 해서 움직이도록 하는 것은 없습니다.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만다라의 심층에 존재하는 가상의 전체성을 생각할 수는 있겠지요. 그것을 대일여래라고 부르죠. 대일여래는 우주의 근본으로 여겨지면서 밀교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부처님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만다라’에는 대일여래가 한가운데 있기는 하지만, 어떤 지령을 내리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대일여래는 『화엄경』에서는 한 마디도 안 하지요. -왜 불교가 중요한가 하면, 인간 사고의 가장 최초의 상태와 가장 발달한 상태를 하나로 결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죠.

-『붓다의 꿈-가와이 하야오와 나카자와 신이치의 대화』-이 책의 논리에 의하면 결국 불교는 친환경적, 친자연적 종교이다. 그리고 유기농 야채의 인기가 되살아났듯이, 일신교의 위력에 눌려 기를 펴지 못했던 불교에 대한 관심의 부활이 그런 연상을 가능케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카이에 소바주>의 마지막 권에 해당하는 『대칭성 인류학』(고단샤, 2004년)으로 결실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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