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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7 09:00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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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도법/아름다운인연

‘06.4.29.2400시 서울집에서



❍ 싯다르타의 탄생

2. 경전에 나타난 싯다르타의 탄생과정 - ‘이것이 내가 받은 최후의 중생 몸이오. 나는 마침내 성불하리라’ 하고 말했다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나 홀로 존귀하다. 삼계가 온통 고통스러우니 내가 마땅히 그들을 편안케 하리라’

3. 싯다르타의 탄생에 깃든 불교적 사고 - 세계관 : 세계는 무한과 영겁을 통해 인연에 따라 끊임없이 생성ㆍ변화하고 있다. 무수한 그물코들이 하나의 그물을 이루고 있듯이 공간적으로는 다양하고, 시간적으로는 영겁의 세월을 함께 어울려 활동하는 것이 세계의 실상이다. 즉 우주는 인연이라는 관계의 그물코로 이루어진 유기적 생명공동체이다. 시간과 공간, 정신과 물질, 중생과 부처, 인간과 신, 너와 나, 인간과 자연 등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총체적 관계 속에 성립, 전개되고 있다. 영원에서 영원 저 너머에 이르기까지 총체적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ㆍ변화하는 것이 우주다.

- 인생관 : 『불본행집경』의 내용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자. 첫째, 시작을 알 수 없는 오랜 옛날부터 삶은 계속되어 왔다. 둘째, 인연이 다하면 살던 곳에서 떠나 새로운 세상에 태어난다. 셋째, 중생은 태어나고 죽을 때 심한 고통을 겪고, 나아가 자신의 염원과 행업을 망각한 상태에서 업에 끌려가 태어난다. 반면 보살은 태어나고 죽을 때 한 마음, 바른 생각으로 자신의 본원과 행업을 기억하며 원하는 곳에 찾아가 태어난다. -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과 무한 속에 인연 따라 끊임없이 활동하는 역동적인 존재이다. 언제나 우주 삼라만상과 한 몸, 한 생명으로 활동하며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창조해 가는 당당한 존재이다.

- 가치관 : 인간의 존재를 생명그물의 논리로 관찰해 보면 결코 허무하거나 왜소하지 않다. 영원과 무한의 의미를 갖는 우주와 한 몸, 한 생명의 존재로 활동하는 위대한 존재가 인간이다. 미혹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고통을 낳는다. 깨달음은 자유를 낳고 자유는 법열을 낳는다는 내용을 통해 깨달음만이 진정한 가치임을 가르치고 있다.

4. 싯다르타의 탄생에 깃든 태어남의 의미 - 보편적인 태어남의 의미 : 여기에서의 죽음은 저기에서의 태어남으로, 저기에서의 죽음은 여기에서 태어남으로 나타나고 있다. 삶이 생명활동의 한 현상이 듯이 죽음도 생명활동의 한 현상임을 보여줌으로써 태어남도 없고 소멸함도 없는 불생불멸의 불교정신을 분명히 하고 있다.

❍ 제2장 발심 - 역사의 문제를 자기 문제로 인식하고 그분의 사상을 자신의 사상으로 심화시키려는 의지는 그 어디에도 없다. 중생의 고통을 자기 아픔으로 끌어안고 살아간 그분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만들려는 문제의식이 없다. 늘 부처님의 삶이라는 큰 바닷물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나’라는 작은 그릇으로 담아내려고만 한다. 자신의 전부를 바쳐 그 바다안으로 뛰어들어가 부처님처럼 되려고 하지 않는다. 부처님을 향해 자신의 전 존재를 바쳐 지심귀명례 하려고 하지 않는다. 부처님을 인간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 바른 문제의식(보리심=발심=불교 세계관)을 확립하려는 노력없이 오로지 수행과 깨달음만 강조하면 되는 것처럼 비과학적인 접근 방법에 빠져들었다. 그 결과 출가연륜만큼의 법에 대한 안목과 확신이 깊어지지 않고 오히려 신심이 흔들리고 수행은 점점 더 무기력해졌다.

-소림굴에서 면벽한 달마와 천촌만락을 누비고 다닌 원효는 서로 상반된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결같이 인류 역사의 문제와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대비원력의 문제의식으로 살았다. -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사고로 수행과 깨달음만을 앞세우는 한국불교의 수행풍토는 철저히 반성되어야 한다. 중생의 고통을 자기 아픔으로 삼는 대비원력의 문제의식 확립을 우선 가치로 여기는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

❍ 제3장 출가❍ 제4장 수행

- ‘선방 가야 돼, 난 율사가 아니여, 난 사판이여, 난 장사꾼이여, 난 재바지 중이여’ 절집에서 오가는 이야기 어디에도 불교적 가치관과 수행자로서의 신념이 보이지 않는다. 불교적 가치관과 신념이 결여된 수행자의 사고ㆍ언어ㆍ행동ㆍ생활 속에 진실이 깃들어 있을 리 만무하다. - 싯다르타는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는 수행자들의 고행이 납득되지 않았다. 마치 죄수들이 더 크고 튼튼하고 편안한 감옥을 새로 짓는 것처럼 어리석고 무모하게 여겨졌다. - 가람 중창ㆍ제도 확립 따위가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불교사상을 체계화하고, 불교수행과 정신을 바로 세우는 중창 불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불교가 세상의 등불이 되는 길은 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 제5장 깨달음/반성

- 깨닫기만 하면 된다는 신념 : ‘진정한 장사는 범 잡는 데 쓰는 힘을 잠자리 날개 찢는 데도 똑같이 사용한다’고 한다. 크고 작음을 구분하지 않고 전심전력하는 성실함을 뜻한다. 간화선의 종장인 대혜 선사는 깨어 있는 한 작은 선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했다. 무조건 화두만 하면 된다는 거칠고도 막연한 사고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 자신의 삼독심을 면밀히 성찰하는 것이 수행이다. 지금 여기에서 삼독심을 창조적으로 극복하고 승화시키는 노력을 치밀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 한 소식으로 표현되는 초견성의 논리 : 싯다르타는 출가 후 수행과정에서 몇 차례의 신비체험을 하며 정신적 평화와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대비원력의 문제의식이 충족되지 않았다. 존재의 실상에 대한 무지와 미혹이 해결되지 않았다. 궁극적 해답의 경지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미련 없이 신비체험을 버리고 더 높은 경지를 향하여 정진에 박차를 가했다.

- 깨달음이란 먼 훗날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고

- 깨달음이란 신비한 무엇이 한순간에 나타난다는 경우 : 보통 천년의 어두움도 등불만 켜면 즉시에 사라진다는 논리다. 구체적인 과정에서의 인연의 구족함 없이 등불은 켜지지 않는다. 등불이 켜지기 위해서는 무수한 과정과 조건이 있어야 가능하다. 수행자들이 늘 자신에게 문제 삼아야 할 것은 깨달음을 내세우려는 경솔함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탐진치 업력이 얼마나 정화되었는가를 양심적으로 살피는 겸허함이다.

❍ 제6장 전법

- 전법정신 : 고통과 어둠의 대명사인 윤회의 사슬을 끊었다. 영원ㆍ법열ㆍ자유ㆍ아름다움으로 표현되어지는 깨달음의 세계로 걸어 나왔다. 자아 중심[탐ㆍ진ㆍ치]의 실체론적 세계관에서 연기의 세계관으로 혁명적 전환을 했다. 이 길은 본래부터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에 의하여 처음 발견된 것이다. 만인이 함께 가야 할 크나큰 외길이다. 너나없이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영원한 참삶의 길이다. - ‘나는 산중에서 홀로 수행에 전념하고 있지만, 일찍이 한순간도 고통받는 중생의 아픔을 잊은 적이 없다’고 하신 가르침을 깊이 음미해야 한다.

❍ 제7장 계율

1. 계율을 공부하는 우리의 입장 - 첫째, 율사ㆍ선사ㆍ강사ㆍ법사 등 호칭의 문제이다. 사상과 인격이야 어찌 되었든 선사라고 호칭되어야만 큰스님이 되는 것처럼 여긴다. 둘째, ‘깨달음의 길인 계율’과 ‘방편으로서의 계율’의 문제이다. 셋째, ‘원칙주의의 계율’과 ‘융통성의 계율’의 문제이다. 넷째, ‘전통주의의 계율’과 ‘개혁주의의 계율’의 문제이다.

2. 계율에 대한 올바른 관점 - “비구니들이여! 내가 정각을 이룬 후 스스로 깨달은 법을 사람들에게 결정적으로 설한 것은 이 손 안의 나뭇잎과 같다오. 반면 저 숲의 나뭇잎이 많은 것처럼 내가 정각을 이룬 다음, 스스로 법을 알면서 사람들에게 결정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도 또한 그와 같다오.” - 모든 사고와 활동들이 깨달음, 중생성불, 중도실제로 회향되지 않는 한 올바른 불교수행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4. 계율의 내용 : ‘계’란 개인의 수행에 초점을 두고 설해진것이라면, ‘율’은 공동체 운영을 본위로 하여 설해진 것이다. 계는 수행자 자신에게 적용되는 성격이므로 자발적인 것임에 비하여, 율은 대중 공동생활을 위한 것이므로 제도적 구속의 성격을 띤다.

- 계의 성질 : 첫째, 부처님에 의해 계가 제정되고 제정되지 않고, 또는 계를 받고 안 받고 관계없이 본질적으로 계가 성립되는 것을 ‘성계’라고 한다. 보통 성계를 근본 4계[살인, 음행, 도둑질, 큰 거짓말]라고 한다. 둘째, 부처님에 의하여 계율이 제정되고 또는 계를 받음으로 인하여 성립되는 것을 ‘차계’라고 한다. ‘차계[성계 이외의 모든 계율]’는 본질적인 계는 아니지만, 수행자들로 하여금 성계를 범하지 않고 잘 지켜갈 수 있도록 해준다.

- 계율의 필요성 : 계율의 필요성에 대한 결론적인 대답은 정법을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함이다. 깨달음의 수행과 청정화합의 교단과 역사대중의 이익과 안락을 실현하기 위함인 것이다. 꽃을 끈으로 꿰어 흩어지지 않게 하듯이, 정법을 오래 머물게 하고자 계를 재정하고 설한 것이다. 계율에 의지하지 않는 한 정법을 오래 머물게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정법을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서는 계율이 살아 있어야 한다. 계율이 존중되지 않으면 안 되는 당위성은 너무나 확연하다.

5. - 계율과 깨달음의 수행 : 팔정도를 삼학으로 나누어 정리 첫째, 정어ㆍ정업ㆍ정명ㆍ정정진은 계학. 둘째, 정념ㆍ정정은 정학. 셋째, 정견ㆍ정사유는 혜학이 된다. - 연기적 관점에서 볼 때 깨달음의 체계로 제시되어진 팔정도는 각각 분리,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전체적인 수행체계가 일심이라는 통일의 장에서 쓰일 곳에 따라 정견 또는 정업 등으로 나타나는 것인만큼 수행과 생활이 이원화되어서는 안 된다. 불교에 대한 올바른 관점에 근거하여 수행할 때 수행한 만큼 법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깊어진다. 수행과 생활, 깨달음과 역사의 문제를 통일시켜 나가는 방향을 갖게 된다. - ‘계의 그릇이 튼튼해야 선정의 물이 고이고, 선정의 물이 맑아야 지혜의 달이 나타난다.’

6. 반성 - 계율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수학의 필요성 : 첫째, 불교적 삶에 있어서 계율이 근본이 된다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둘째, 편안함, 풍부함, 게으름, 향락 등 중생의 속성에 집착한 채 불교를 하려고 하다 보니 계율은 딱딱하고 불편한 것, 편협하고 부자유스러운 것, 소극적이고 융통성 없는 것 등 계율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당연시해 왔다. 셋째, 계율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 계율에 대한 올바른 입장 : 첫째, 깨달음의 수행, 청정화합의 승단, 역사대중의 이익과 안락의 길에 계율이 근본이다. 둘째, 수행자와 교단이 돌아가 의지해야 할 원칙적인 기준이 계율이다. 셋째, 문제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길이 계율이다. 넷째, 현실적으로 실천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반드시 실천되어야 할 길이 계율이다.

- 대중화합을 해치는 것을 오역죄로 규정하신 부처님의 깊은 뜻을 살펴야 한다. 깨달음의 역사화를 위해 헌신하는 수행자가 되고자 길을 나선 우리들이, 무엇 때문에 이 길의 한가운데 서서 당당하게 걸어가기를 주저하는가?

❍ 제8장 교단

- 종단을 대표하는 곳인 조계종 총무원이 있는 조계사는 원장과 주지 자리 등 감투 싸움하는 곳처럼 여긴다. 혹은 국민적 바람과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호국불교의 이름 아래 정부 정책에 무조건 추종하고 권력에 아부하는 ‘의식 없는 집단’으로 인식한다. 불교를 상징하는 절이란 산수 수려하고, 역사 유물들이 많아 구경하고 놀기 좋은 곳 정도로 생각한다. 또는 죽은 자를 위해 염불하고 제사 지내며 복을 비는 곳이라고 믿는다. 역사대중의 고뇌와 문제들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열정을 바쳐 활동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고매한 사상과 정신을 실천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 불교교단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 실제 토굴에서의 생활과 형태들이 자기 집이나 재산 마련 등 무사안일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 공동체 정신을 간과한 포교당의 사설화 문제는 깊은 연구와 대책이 필요한 사안이다. - 직책을 안배하거나 집단 세력화하여 문중적 기득권을 수호하고 확장시키는 데 연연한다. 나아가 종단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세력화 집단이 되어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 출가수행이 직업화되는 경향 : 더불어 절집안 수행자 교육을 불신하고 학원, 대학, 박사 등 세속 교육에 대해 맹종하고 있다.

- 현전승가란 지금 목전에 성립해 있는 승가를 말한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4명 이상의 비구가 함께 수행생활을 하고 있으면 현전승가가 성립된다. 사방승가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모든 출가수행자들에게 열려 있는 보편성의 승가를 뜻한다.

❍ 제9장 이부승가 1. 부처님의 인격 그리고 그분의 사상과 정신은 거룩한 반면, 그 고매한 사상을 자기 삶으로 구현하기에는 인간의 무지와 탐욕의 뿌리가 너무 깊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깨달음, 해탈, 자타일시성불도로 표현되어지는 실상의 탑을 쌓고자 하셨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성불의 원천인 그분의 사상과 정신에는 관심이 없고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형상의 탑을 쌓는 일에만 열정을 쏟는다.

2. 승가 구성의 목적 - 눈 뜨고 감는 것이 그대로 문수의 안목이요, 발 들고 내려놓는 것이 전부 보현의 행이로다. 걷는 것도 선이요, 앉는 것도 선이다. 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함 자체가 안온하다.

3. 승가의 형성과정 - 비구승가의 형성과정 : 대부분의 종교들이 신앙의 대상을 ‘신’ 또는 ‘교주’로 국한하고 있음에 반해 불교는 삼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경전자료에 의하면 고심 끝에 결정한 첫 설법 대상자는 자신을 비난하며 버리고 떠났던 다섯 친구들이다. 당시 그들은 500여 리나 떨어진 먼 곳에 머물고 있었다.

- 설법을 주저한 두 가지 이유 : 첫째, 당신이 깨달은 진리의 심오함 때문이다. 현재의 존재가, 온 우주와 불일불이의 중중무진한 연기의 존재라는 사실은 그야말로 신비이고 불가사의이다. 둘째, 무지와 욕망의 존재인 중생의 속성 때문이다. - 설법을 결심하는 몇 가지 조건 : 첫째, 범천의 간곡한 권청이다. 삶의 먼지가 적은 중생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법을 들으면 알 수 있겠지만 법을 설하지 않으면 그들조차도 쇠퇴하고 말 것입니다. 둘째, 중생의 다양성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다. 셋째, 세상을 구제하려는 초발심[본원력]의 실천이다.

- 승보를 형성하는 몇 가지 이유 : 첫째,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의 실상인 연기법의 성격이다.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연기법의 논리로 볼 때 비록 교주인 부처님과 진리의 가르침이 있을지라도 승보가 갖추어지지 않는 한 구세대비의 길인 완성된 불교는 성립될 수 없음을 뜻한다. 둘째, 부처님의 투철한 진리관과 역사의식이다. 셋째, 부처님의 치밀한 계획성이다. 부처님은 당신이 깨달은 연기법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 궁리하고 궁리한 끝에 다섯 비구를 선택하고 있다. 넷째, 자신의 전 존재를 바치는 적극적인 헌신성

- 비구니승가의 형성이유 : 여자들은 출가수행하게 하지 않는 것이 좋겠네. 여자들을 출가시킬 경우 불법을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하게 된다네. 마치 집안에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으면 그 집이 쇠퇴하듯이 여자가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으면 불법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게 된다네. “세존이시여, 만일 여자들이 수행을 하여 수다원과와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다면 여자들도 출가수행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지요.” “아난다여, 여자들이 출가수행을 하려고 할 경우 반드시 팔경법을 지켜야 하네. 여자들이 팔경법을 지킨다면 출가하는 것을 허락하겠네.”

- 비구니승가의 형성과정 : 첫째, 출가수행의 길을 가고자 하는 여성들의 간절하고도 적극적인 행동이다. 부처님의 출가와 설법의 문제가 그 시대의 절실한 요구사항이었듯이 여성의 출가문제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실한 문제였던 것이다. 둘째, 출가를 간청하는 시기와 상황의 문제이다. ·구담미 등이 처음 출가를 간청할 당시 부처님의 나이는 50세 정도이고 성도한 지는 15년쯤 되었으며, 두 번째 간청할 때 부처님의 나이는 55세 정도이고 성도한 지는 20년쯤 되었다. 하나는 당시 불교가 신흥종교이기 때문에 교단 내적으로 안정적인 자기기반과 내용적인 체계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점이다. 다른 하나는 성도 후 15년쯤의 교단의 내외적 상황에 비해 20년쯤의 교단의 내외적 상황은 현격한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셋째, 아난 존자의 끈질긴 간청과 설득과 제안이다. 넷째, 부처님께서 당시 교단 내외적 상황으로 볼 때 여성 출가를 허락해도 괜찮을 만큼 시절인연이 갖추어졌다고 판단하셨다.

4. 부처님이 뜻하신 이부승가 - 팔경법에 나타난 이부승가의 관계 : 우선 팔경법을 살펴보자. 첫째, 승납이 비구니일지라도 비구를 대할 때면 언제나 먼저 합당한 경의를 표해야 한다. 둘째, 비구니는 비구에 대하여 비판하거나 질책해서는 안 된다. 셋째, 비구니는 비구의 허물을 문제삼거나 비구를 가르치지 못한다. 넷째, 비구니 구족계는 식차마나의 계를 배운 다음에 비구대중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아야 한다. 다섯 번째, 상가바세사 죄를 범한 비구니는 반드시 이부승 가운데서 보름동안 마나타를 행해야 한다. 여섯 번째, 비구니는 보름마다 비구들에게 교수해 주기를 청해야 한다. 일곱 번째, 비구니는 비구도량에 의지하여 안거를 해야 한다. 여덟 번째, 비구니 대중은 안거를 마치고 비구 대중 가운데서 보고, 듣고, 의심나는 것에 대한 자자를 해야 한다.

- 비구니를 두렵게 하지 말라. 비구니를 때리지 말라. 함께 사는 비구니의 병을 간호하라. 대중의 허락 없이 비구니를 가르치지 말라. 친척이 아닌 비구니에게 옷 등을 빨게 하지 말라. 보다 높은 삼학 수행을 위해서라면 비구니가 비구를 꾸짖어도 좋다. 만일 비구가 비구니에게 함부로 하거든 비구니승가는 그 비구에게 무례하다고 꾸짖는 백이 갈마를 행하여 벌을 주라.

- 비구니승가를 형성할때 고려해야 했던 상황과 내용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가닥을 잡아 보자. 첫째, 사회적 상황의 문제이다. 당시 바라문의 전통적 통념에 의하면 여성은 집과 동일시되고 있었다. 인간을 억압하는 불평등 구조인 사성계급제도와는 또 다른 형태의 남녀불평등 구조가 관습화되어 있었다. 둘째, 여성 출가자들이 석가족 여성이라는 문제이다. 셋째, 여성의 지위와 특성의 문제이다. 여성은 심리적으로 섬세함과 강한 보호본능을 갖고 있다. 신체적으로는 힘의 약함과 생리적 문제 등이 남성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넷째, 당시 종교계 경향의 문제이다. 고오타미 비구니가 팔경법의 수정을 요청했을 때 부처님은 외도들 사이에서도 그런 관습이 없으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다섯째, 승가와 재가의 상호의존 관계의 문제이다. 여섯째, 불교계 자체의 준비상태의 문제이다. 비구니승가를 설립해도 괜찮을 만큼의 여건이 성숙되기까지는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한 상태였다. 일곱째, 승가의 운영 경험과 적절한 시기의 문제이다.

- 불평등 구조의 이부승가 문제에 대한 수행자들의 인식 태도에 대해 반성적으로 성찰해야 할 것들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첫째, 부처님의 출현 목적과 부처님의 본의에 대해 왜곡된 인식을 하고 있다. 부처님은 세상의 문제를 회피하려고 이 세상에 출현하고 출가수행한 것이 아니다. 중생살이의 현실문제를 회피하는 것이 마치 부처님을 잘 본받는 것처럼 여겨 왔다. 이것은 한국불교의 불행이다. 둘째, 불교의 존재 이유와 출가수행의 목적에 대해 그릇되게 이해하고 있다. 불교의 존재 이유는 연기법의 사상과 정신으로 역사현실을 가꾸고자 하는 데 있다. 출가수행의 목적은 중생사이의 현실적 문제를 바람직하게 해결하고자 하는 데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출가수행의 목적을 잘못 인식하여 청정수행을 명분으로 세상의 온갖 불의와 사악함을 방관하고 회피하는 비겁함을 당연시해 왔다. 이것은 수행자들의 불행이다. 셋째, 승가의 형성 목적과 부처님이 뜻하신 승가상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었다. 승가의 형성 목적은 첫째도 둘째도 부처님의 출현 목적과 불교의 존재 이유를 역사현장에 실현하고자 함이다. 우리들은 승가의 목적과 승가상에 대한 명분으로 오로지 절을 지키고, 재산을 늘리고, 살림을 챙기는 등 불교 세속하에 매몰되고 있다. 이것은 승단과 수행자의 불행이다. 넷째, 수행자로서 당당하지 못하고 늘 비겁하게 살아 왔다. 누군가 문제제기를 하면 청정수행자는 세상일에 관심을 끊고 시비를 멀리해야 된다는 논리로 합리화하는 비겁함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다섯째, 수행자로서 정직하지 못하고 이중적이다. 계율과 법을 자신에게 적용하려는 성실함도 없다. 다만 자기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거나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논리를 필요로 할 때 계율과 종단법을 운운한다. 여섯째,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며,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고 하신 부처님의 유언을 무시한다. 법은 불교의 근본 생명이과, 불교의 본뜻은 동체대비의 구현에 있다. 동체대비의 내용은 자유, 평화, 평등의 실현을 뜻한다. 일곱째, 부처님이 뜻하신 승가가 현재 진행형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들은 율장을 명분 삼아 부처님 당시에 이미 승가형성이 완결된 것처럼 집착함으로써 부처님 뜻과는 정반대인 형식주의에 빠져 시시비비하고 있다. 여덟째, 수행자로서의 진정한 자존심과 부끄러움이 없다. 비구승가의 권위와 이익과 편리에 집착하여 문제를 방치하는 것은 비구로서 염치없는 일이고 수행자로서 자존심 없는 일이다. 아홉째, 비구의 권위를 지키는 일이 약자인 비구니 위에 군림하는데 있지 않고 불평등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앞장서는 데 있음을 모르고 있다. 열째, 승단이 ‘발로참회’와 ‘양어가추’를 혼돈함으로 인하여 계속 자정력을 잃고 혼란에 빠져들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

- 불교적 사유방식이란 연기법의 사상과 정신으로 모순에 찬 역사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동체대비의 역사의식이다. 상호의존의 관계성과 개성의 존귀성과 공평무사성으로 표현되는 연기법의 진리, 그 진리의 정신으로 세상을 구제하려는 대자비의 부처님 본뜻을 전제하지 않는 한 불교적 사유방식이란 애당초 성립되지 않는다.

❍ 제10장 입멸

- 첫째, ‘부처님처럼’ 이라는 말 속에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상 또는 수행자상은 바로 부처님이라는 뜻 둘째, ‘생사대사’라는 말 속에는 우리가 실현해야 할 불교수행의 가치가 잘 나타나 있다. - 현실적으로 밤과 낮이 분리, 독립되어 있지 않듯이 삶과 죽음도 역시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물의 그물코처럼 삶의 그물코에는 반드시 죽음의 그물코가 함께 하고 있다. 죽음의 그물코를 떠난 삶의 그물코는 성립될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삶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죽음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죽음을 모르는 한 삶에 대한 어떤 지식도 반쪽 지식일 수밖에 없다.

2. 싯다르타는 죽음의 귀신이 눈앞에 덮쳐오고 있는데도 인생이 즐겁다고 시시덕거리는 것은 새,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는 극단적 표현을 쓰고 있다. 인생 일대에 반드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최대의 문제가 바로 죽음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 나고 죽는 관계를 알고자 하는가, 물과 얼음의 비유로 설명하리라. 물이 얼면 그대로 얼음을 이루고 얼음이 녹으면 도리어 물이 된다. 이미 죽었으면 반드시 태어날 것이요, 이미 태어났으면 도리어 다시 죽으리니 물과 얼음 서로 해치지 않는 것처럼 태어남과 죽음 모두가 아름다워라.

- 태어남은 어느 곳으로부터 찾아왔으며 죽음은 어느 곳을 향하여 떠나가는가. 태어남이여, 한 조각구름이 나타남이요, 죽음이여,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짐이로다. 뜬구름 자체는 본래 실체가 없나니 태어남과 죽음의 오고 감도 또한 그러하네. - 일반적 관념, 즉 전도된 사고방식으로 보면 태어남이 따로 있고 죽음 따로 있다. 태어남은 시작이고, 죽음은 끝이다. 태어남은 기쁨이고, 죽음은 슬픔이다. 태어남은 소득이고, 죽음은 상실이다. 태어남은 성취이고, 죽음은 파멸이며 불안이요, 공포요, 고통이다. 반면 불교적 관점, 즉 연기법의 논리로 보면 태어남과 죽음은 형성된 조건에 따라 이루어지는 생명의 활동상태로 동전의 양명과 같다. 서로 분리되고 단절된 태어남과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태어남과 죽음이란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전개되는 생명활동의 두 모습이다.

- 고요히 명상에 잠긴 수행자에게 진실의 법칙이 드러났다. 그 순간 모든 의혹이 사라졌으니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의 원인을 알아낸 까닭이다. - 사람이 비록 백년을 산다해도 생사를 밝혀내지 못하면 하루를 살면서 생사의 도리를 해명함만 같지 못하다. - ‘존재 이유를 밝히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은 끝없는 허무요, 고통이다. 존재 이유를 밝히고 그 가치를 실현하는 삶만이 진정 인간적이고도 행복한 삶이다.’

- 부처님의 입멸에 깃들어 있는 의미 : 첫째, 깨달음의 중요성. 둘째,변화를 진리로 받아들임. ‘만들어진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무너지도록 되어 있는 것에 대하여 무너지지 말라고 만류하는 것은 순리에 맞지 않다.’ ‘모든 형성되어진 것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변화는 영원한 진리이다.’ 사대오온이라는 생사윤회의 실체가 본래 있지 않다. 다만 무명에 의하여 조작된 것일 뿐이다. 즉 생사는 본래 없는데 다만 무명의 조작에 의하여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을 뿐이다. 모든 존재의 실상은 불생불멸이며 늙고 죽음도 없다. 죽음이 현실에 실재하는 것처럼 인식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존재의 진실에 대한 무지와 집착의 업력 때문이다. 실상의 세계에는 실체로 인식되는 죽음을 찾아볼 수가 없다. 넷째, 순리대로 할 일을 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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