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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7 09:00

영혼의 동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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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동반자 존오도나휴,류시화/이끌리오

‘06.4.21.0649시 계룡대 숙소에서



❍ 두 사람 하나의 영혼ㆍ류시화

- 영혼의 동반자를 켈트 인들은 ‘아남 카라’라고 불렀다. ‘아남’은 고대 아일랜드 어로 ‘영혼’을 뜻하며, ‘카라’는 동반자다. 켈트 인들은 인간의 가슴은 완전하게 태어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 가슴이 완전에 이르는 길은 아남 카라, 곧 영혼의 동반자를 찾는 일이다. 시간은 불안한 영원이다.

- 육체 속에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 속에 육체가 있으며, 영혼에게는 울타리가 없다고 여겼다. 그 영혼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길은 태초부터 하나였던 흙의 기억을 완성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 육체가 공기를 원하듯 영혼은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대는 사랑하고 사랑 받는 jq을 배우기 위해 이곳에 보내졌다. 인간의 가슴은 완전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가슴은 삶의 모든 경험마다에서 다시 태어난다. 가슴이 곧 그대 속안의 얼굴이다. 인간의 삶은 그 속안의 얼굴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여행이다.

❍ 영혼의 동반자

- 이 세계 속에서 인간은 그리 오래된 존재가 아니다. 그대 위에서 은하수는 영원을 향해 춤을 추고 있고, 그대 발 아래에는 태고적부터 존재해 온 대지가 있다. - 육체는 흙으로 빚은 그대의 집이다. 우주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그대의 집. 육체 속에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 속에 육체가 있다. 그대가 이것을 깨달을 때, 육체는 성스럽고 신비로운 것이 된다. 그때 육체의 감각은 신으로 가는 출발점이다.

- 세상은 밤에 휴식한다. 밤이 찾아오면 나무와 산, 들판과 얼굴들은 형상의 감옥에서, 노출의 부담에서 풀려난다. 모든 것은 어둠의 안식처 안에서 고요히 자신의 본성으로 돌아간다. 어둠은 태고적부터의 자궁이며, 밤 시간은 곧 자궁 속에 머무는 시간이다. - 새벽이 다가오면 우주의 경이롭고 미묘한 색깔들이 모든 존재에게 옷을 입힌다. 어떤 시인은 이 순간을 ‘색깔들은 빛의 상처’라는 멋진 말로 표현했다. 색깔은 자연의 중심부에 있는 비밀스런 존재의 깊이를 드러낸다.

- 시간의 표면에서 사라지는 듯 보이는 것들은 사실 다른 모습을 하고 기억의 집에 저장된다. - 퇴역 군인은 젊었을 때부터 사랑했지만 결혼할 수 없었던 한 여성에게 말한다. 지금까지 당신을 볼 수 없었지만, 당신은 언제나 내 곁에 있었노라고. - 컴퓨터가 인간 사이의 만남을 대신하고 정신과 치료가 종교를 대체하는 세계에서 관계에 집착하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 ‘낯선 이의 손은 신의 손이다. 낯선 이는 우연히 오지 않는다. 그는 특별한 선물과 계시를 가져다 준다.’ - 한 사람의 삶과 열정은 어떤 장소의 에너지에 흔적을 남긴다. 사랑은 가슴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사랑은 밖으로 흘러나와 풍경 속에 비밀의 성소를 짓는다. - 사랑 속에서 자신의 독특한 모습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영혼이 머무는 공간을 넓게 가져야 한다. 히브리 어에서 ‘구원’의 어원 중 하나가 공간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 육체와 영혼

- 육체는 흙으로 만든 그대의 집, 지구에 머무는 그대 영혼의 집이다. 육체를 통해 영혼은 비로소 눈에 보이는 것이 된다. 육체는 이 세상에서 그대가 속해 있는 집이며, 매우 신성한 신전이다. 누군가 다가올 때 그는 육체를 갖고 온다. 그리고 육체와 함께 자기만의 경험과 기억의 세계를 모두 가지고 온다. 가까워지는 것은 단지 두 육체가 아니라 두 세계다. - 육체는 영혼의 비밀스런 세계가 표현되는 거울이다. 그것은 신성한 출발점이다. 따라서 육체는 그것이 가진 영적인 의미를 바탕으로 존경 받고, 이해되어야 하는 소중한 것이다.

- 우리가 고대부터 북이라는 악기에 친숙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북 소리는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그것은 엄마의 심장 박동과 하나였던 시절로 우리를 돌아가게 해주기 때문이다. - 시인들은 침묵과 언어가 만나는 특별한 지점에 몰두하는 사람들이다. 시인이 맡은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 그대가 가진 독특한 색깔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재능에서 상투적인 목소리를 걸러내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 음악은 침묵과 만나는 가장 완벽한 소리다. 진정으로 음악에 귀 기울일 때 그대는 음악이 침묵을 배열하고 구성하는 아름다운 방식을 듣기 시작한다.

- 접촉은 판단하지 않으며, 오직 대상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라고까지 표현한다.

❍ 침묵과 홀로 있음

- 영혼 속에는 그대의 홀로 있음을 밝혀 주는 등불이 있다. 홀로 있음은 반드시 외로움을 뜻하지 않는다. 홀로 있음은 그 안에 따뜻한 빛을 밝힐 수가 있다. 그대는 그대 자신만이 세상에 줄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을 표현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때로 그 선물 속에는 설명하기 힘든 고통과 시련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

- 켈트 인들은 영혼의 모습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계시’라는 단어가 ‘다시 가리다’라는 뜻의 어원에서 왔다는 것은 흥미롭다. 영혼의 세계는 다시 가려진 베일의 틈을 통해서만 엿볼 수 있다. - 얼굴은 우리가 직관으로 느끼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영혼은 잠시 나타날 뿐이다. 그럼에도 나이가 들고 기억이 늘어 가면서, 얼굴은 서서히 영혼의 여행을 비춘다. 얼굴은 나이가 들수록 영혼을 더욱 풍성하게 비춘다.

- 운명은 경험과 삶의 바깥에 있는 틀을 만든다. 그리고 자유는 그대 속안의 모습을 발견하고 채운다. - 자신의 가능성과 재능을 무시할 때, 그대는 그 흐름에서 벗어나고, 신의 부름을 피하기 위해 일상적인 것들에 안주한다. 그대가 흐름을 잃어버릴 때, 삶은 지루할 정도로 신중해지거나 아무런 개성 없이 자동으로 움직일 것이다. 삶의 흐름은 조화와 일체감으로 가는 비밀스런 열쇠다. - 파도와 밀물과 썰물은 우리 호흡의 밀물과 썰물 속에 아직도 살아있다.

- ‘영원한 젊음의 땅은 집 뒷마당에 있다. 자신 안에서 흐르고 있는 아름다운 땅에.’ 영원한 세계와 죽음이 있는 세계는 평행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 세계는 서로 뒤섞여 있다.

- 영혼이 자신의 영적인 갈망에 대해 계속 무감각하다면, 그 영혼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 영혼은 외로움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용기를 갖고 자신의 홀로 있음과 마주한다면, 그대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구절이 366번이나 반복된다.

- 현대 문명은 완벽한 화장에 너무 많이 집착해 있다. 아름다움은 이제 표준화되었다. 그것은 또다른 상품이 되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은 그대의 영혼에서 비쳐 나오는 빛이다. - 그대가 홀로있음 속에 철저하게 머물고, 고립되고 버림 받는 고독의 극단을 경험할 때, 그대는 그 홀로 있음의 중심에서 외로움과 공허함이 아니라 일체감과 안식처를 발견할 것이다.

- 수도자의 홀로 있음 속에는 침묵이 들어 있다. 침묵은 현대 문명에 의해 크게 희생당한 것 중 하나다. 우리는 눈을 강하게 자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 많은 사람이 스트레스 때문에 고통 받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스트레스를 주는 일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침묵하는 시간을 거의 갖지 않기 때문이다. 침묵과 빈 공간 없이 홀로 있음이 어떤 결실을 맺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다. - 켈트 족 세계에서는 침묵과 미지의 것을 인간 여행의 가장 가까운 동료라고 늘 생각했다. - 모든 언어는 침묵으로부터 나온다. 깊이와 공감, 치유의 힘을 가진 말들 속에는 수도자의 침묵이 담겨 있다.

- 깨어 있는 영혼은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고, 자신의 가능성에 도전하는 소중한 ‘원수’를 가져야 한다. 원수를 사랑할 때, 그대는 분노와 위협을 뛰어넘어 자유로워질 수 있다. - 자연의 홀로 있음은 주로 침묵이다. 오래 전 아일랜드 인의 지혜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했다. ‘산들은 결코 만나지 않지만, 인간은 언제나 서로 만날 수 있다.’ - 모든 나무는 동시에 두 방향으로 자란다. 다시 말해 자신의 바람을 실현시키기 위해 가지와 뿌리를 함께 뻗으면서 어둠과 빛을 향해 자라는 것이다. - 그대는 단 한 번의 삶을 갖고 있고, 두려움과 거짓된 장애물로 삶에 한계를 그슨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인간이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은 매순간 살아있는 일이다. 진정한 신이란 아름다움, 창조성, 어둠, 부정적인 것이 모두 조화를 이룬 존재라고 상상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 일과 성장과 변화

- 성장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고, 완전해지는 것은 자주 변화하는 것이다. - 왜냐하면 하루하루는 근본적으로 그대의 전체 인생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새로운 날은 전에는 볼수 없었던 가능성과 약속을 제시한다. 그대 삶의 모든 가능성을 존중하고 받아들일 때, 그대는 의미 있는 방식으로 새로운 날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그는 절대로 바위를 언덕 위로 올려놓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영원히 바위를 굴려야 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역할에만 머물러 있고, 단순한 차원에서만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시지프와 같다.

- 생명력 넘치는 젊은이와 기운이 빠져나간 허약한 몸을 가진 노인의 유일한 차이는 시간이다. -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시간 속에서 또는 시간을 거쳐서 일어난다. 시간은 모든 새로운 경험을 그대 가슴의 문 앞에 가져다 놓는 힘이다. - 시간의 가장 고독한 면 중 하나는 덧없음이다. 시간은 지나가면서 모든 것을 가져가 버린다. - 그대는 하루의 시간들과 뜨개질하듯이 엮어진다. 하루는 마치 피부처럼 그대에게 가까이 밀착해 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그 하루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 우리의 사라진 날들이 비밀스럽게 모이는 장소가 있다고 믿는다. 그곳의 이름은 ‘기억’이다.

- 늙음의 시기는 그대가 여행한 여러 길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대의 삶에 열정을 일깨우고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더없이 중요한 시기다. - 지혜는 늙음의 또 다른 특징이다. - 지혜는 그대의 영혼, 그대의 삶, 그리고 신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기술이다.

- 늙음의 시기는 또한 삶의 황혼기다. - 늙음은 또한 정리하는 시기가 될 수 있다. 어떤 대상이 그대와 너무 가까이 있으면, 그대는 그것을 볼 수 없다. 우리는 자기 자신 역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정신 없이 달려가는 삶과 너무 밀착해 있기 때문이다. 늙음의 시기는 또한 그대가 냉혹한 세월을 지나오면서 스스로 짊어진 수많은 거짓된 짐을 내려놓는 시기다.

- 짐 가운데 일부는 분명히 그대에게 속한 것이다. 하지만 많은 짐은 그대가 직접 가져와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들이다. 그것들을 내려놓기 시작할 때, 비로소 그대는 자신의 삶을 짓누르는 압력과 무게에서 해방될 수 있다. 자유는 늙음에 이르러 얻을 수 있는 멋진 열매 중 하나다. 그대는 삶의 초기에 스스로 받았던 상처를 지워 버릴 수 있다. 우리는 생의 후반부를 돌을 깨고, 벽에 구멍을 뚫고, 문을 부수면서, 생의 전반부에 내가 빛과 나 사이에 만들어 놓았던 장벽을 없애는 데 바쳐야 한다.

❍ 영원의 집으로 가는 길

- 육체를 벗어난 영혼은 잠시 머뭇거렸다. 삶을 여행하는 동안 훌륭한 거처가 되어주어 고맙다고. 그리고 사는 동안 육체가 보여준 친절한 모습을 기억했다. 우리 모두는 홀로 가야만 한다. 태어날 때 미지의 곳에서 나타나 다시 미지의 곳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 그대가 태어났을 때, 그것 역시 그대와 함께 자궁에서 빠져 나왔다. 하지만 그대가 도착한 것에 흥분한 나머지 아무도 그것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 존재가 그대를 감싸고 있지만, 그대는 아직도 그 동행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그 존재의 이름은 죽음이다.

- 죽음이 가진 얼굴 중 하나는 부정적인 마음이다. - 부정적인 마음이란 모든 인간의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그 어두운 그림자에 중독되는 것이다. - 죽음의 또다른 얼굴, 곧 죽음이 나날의 삶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또다른 방법은 두려움을 갖게 하는 것이다.

- ‘죽음이 바로 문 앞에 오기 전까지 그대는 결코 죽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죽음은 우리를 방문하기 전에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매우 까다로운 친구다.’ - ‘죽음으로부터 숨을 곳은 아무데도 없다.’

- ‘카오네드’라고 불리는 오랜 전통이 있었다. 주로 여인들이 고인을 찾아와서 울부짖는 것을 말한다. 슬피 울면서 여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고인의 삶을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하나의 슬픈 의식이, 곧 아름답게 짜여진 이야기가 세상에서 고인이 사라진 빈 자리를 서서히 채워 나갔다. 유가족으로 하여금 슬퍼하고 애도의 눈물을 쏟을 수 있도록 따뜻한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카오네드는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외롭고 슬픈 감정을 자연스럽게 흘려 보내도록 도와주었다. - 또한 아일랜드에는 ‘밤샘’으로 알려진 전통이 있다. 이것은 죽은 날 밤에 고인이 홀로 내버려지지 않게 하는 의식이다.

- 빈시는 막 숨을 거두려는 사람을 위해 우는 요정이다.

- 영혼은 육체를 갑작스럽게 떠나지 않는다. 그것은 서서히 일어나는 과정이다. 죽음의 첫 번째 단계에서 그대는 육체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 육체의 죽음은 무시무시한 괴물이 다가와 그대의 생명 줄을 끊고 그대를 모르는 곳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육체적 죽음이라는 얼굴 뒤에는 그대의 가장 깊은 자아가 모습을 감추고 그대를 만나서 껴안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 집착을 내려놓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삶을 살아가는 동안 그대는 죽는 법을 조금씩 배우게 될 것이다. 놓아 버리는 법을 배울 때, 더욱 큰 자비와 열린 마음, 생명력이 그대의 삶 속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대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그것이 수천 배로 커지는 것을 상상해 보라. 그 완전한 놓아 버림은 그대로 하여금 신과 완전한 하나가 되게 할 것이다.

- 아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마치 죽는 것처럼 두렵다고 할 것이다. 자궁 속의 아기에게 탄생은 죽음처럼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느 한쪽에서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두려움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 죽은 사람들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들이다. 그들은 모두 우리 곁에 있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아무데로도 가지 않는다. 영원한 세계가 달리 어디에 있겠는가? 그곳은 이곳이 아닌 다른 어떤 곳일 리가 없다. 우리는 영원한 세계를 잘못된 곳에 놓았다. 영원을 먼 은하계로 밀어냈다. 하지만 영원한 세계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존재의 다른 상태인 듯하다.

❍ 켈트 족에 대해

- 켈트 인들은 장소의 신을 숭배하게 된 것은 대지를 존중하고 생명의 순환을 믿었기 때문이다. 켈트인들은 자연을 하나의 살아 있는 실체, 성스런 존재로 여겼다. 자연이 가져다주는 것은 감사하게 받고, 그것에 대한 보답으로 자연을 파괴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 고대 켈트 인들은 죽음 다음의 생을 믿었고, 환생에 대한 깊은 확신을 갖고 있었다. 우주 삼라만상이 원을 그리며 순환한다고 믿었다.

- 오늘에 와서 켈트 인들이 주목 받는 것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처럼 대지와 연결된 삶의 방식과 그들이 지닌 영성 때문이다. 실제로 북미 콜로라도 주와 오클라호마 주의 동굴 벽에서 발견된 오감 문자들은 고대 켈트 인들이 사용한 문자들이었다. 이것은 켈트 인들이 콜럼버스 이전에 이미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교류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 그들은 일상적인 행위, 생각, 관계들이 모두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일상에서의 행동과 종교적인 믿음 사이에, 또는 세속에서의 삶과 영적인 수행 사이에 그들은 차이를 두지 않았다. 아침 태양이 떠오르는 첫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모든 행위가 축복이었다.

❍ 켈트 족, 그들은 누구인가

- 북쪽 스코틀랜드 지방에서는 고이델 족 또는 게일 족이라고 불렸고, 로마 인들은 그들의 피부와 머리색 때문에 픽트 족(색칠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 그리스 인들에게 켈토이라 불리던 민족이 있었는데, 켈트 족은 이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한다. 켈트 족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언어 기록 체계를 갖고 있지 않았다.

- 기원전 6-4세기에는 갈리아(고대 로마 인들이 갈리아 인이라고 부르던 켈트 족이 기원전 6세기부터 살던 지역, 북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일대를 일컫는다)와 브리타니아(현재의 영국 브리튼 섬의 고대 로마 시대의 이름. 일찍이 이 지역에 살던 켈트 족의 일파인 브리튼 족에서 유래되었다)에 진출했다.

- 런던, 파리, 더블린, 그리고 밀라노는 모두 켈트족 언어에서 파생된 지명이다.

- 널리 유럽을 지배했던 켈트 족은 결국 기원전 1세기에 갈리아 지방을, 기원후 1세기에 브리타니아를 로마 인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 켈트 족의 문화

- 8세기 중반을 정점으로 퍼져나가던 켈트 문화는 1014년 바이킹의 침략으로 큰 전환점을 맞았다. 또한 1169년 노르만 족의 정복으로 쇠퇴기에 접어들던 켈트 문화는 잉글랜드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켈트 족이 거주했던 브르타뉴 지방에서는 켈트 문화가 그 독자성을 유지하며 명맥을 이었지만 결국 16세기에 프랑스에 흡수되고 말았다. 이후 켈트 문화는 막연히 드루이드 교와 스톤헨지로 상징되는 ‘신비주의 문화’로 남게 되었다.

❍ 신과 인간, 그리고 동물 - 켈트 족은 영혼의 환생에 대해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켈트 족에게 있어 나무는 의식의 중요한 요소였고, 나무의 어떤 형태들은 신탁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알파벳과 열두 달의 이름들은 나무 상징에 근거한 것이었다. 드루이드 교도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떡갈나무를 아는 자’이라는 뜻의 고대 인도-유럽 어에서 따왔다.

❍ 열두 달은 현재 우리의 것과 대략 비슷하고, 3일로 구성된 마지막 한 달은 새로운 해로 넘어가는 과도기 역할을 했다.

❍ 부활하는 켈트 족 - 1,800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 켈트 족은 영국의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지방, 프랑스 브르타뉴,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 지방에 밀집해 있으며, 도시로는 역국의 글래스고,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 프랑스 낭트가 대표적이다. - 할로윈은 가톨릭과 켈트 문화가 결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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