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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현암사,06.4.9.2134시 순천에서 상행열차로 계룡역 이동중



❍ 들어가면서 (새도 가지를 가려 앉는다)

- 파스칼은 그의 책『팡세』에서 신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는냐 하는 문제는 도저히 이론적으로 증명할 수 없으므로 이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어차피 일종의 도박을 할 수박에 없다고 했다. 이렇게 도박을 할 경우 신이 존재한다는 쪽에 밑천을 거는 편이 훨씬 현명하다고 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신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걸었다가 설령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로선 그렇게 큰 밑천들인 것이 아니므로 결국 밑져야 본전인 셈인데, 반대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쪽에 걸었다가 신이 존재한다고 하는 쪽에 거는 것이 확률적으로 더 안전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이른바 그의 유명한 도박 논증이다.

- 미국의 어느 사회평론가는 예수 잘못 믿었다가 입을 수 있는 피해 중 가장 심각한 것이 무엇보다도 우리가 ‘자주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권리’를 몰수당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 전남 강진에서 목회도 하고 농사도 짓는 임의진 목사는 최근에 쓴 그의 글에서 “복음적이고 생명적인 신앙이 아니라 자본의 축적에 대한 집착과 내세의 구원에만 관심을 갖는 신앙, 충분히 학문적인 신학이 아니라 교권에 의해 좌지우지되며 한낱 교회경영학 따위로 전락해 버린 신학, 조선인 자신의 심성과 문화가 녹아난 토착 민족교회이자 아시아적 가치로 피어난 우리들의 교회가 아니라 서구적이고 단선적이며 전투사령부처럼 배타적이고 경박스러운 교회와는 미련 없이 결별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 “우리 아빠 최고” - 자라나는 믿음

- 종교 생활에서는 우리 대부분이 다른 친구들과 함께 부딪히며 살아갈 기회가 없이 천편일률적으로 “우리 아빠 최고”만을 합창하는 합창단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다른 이의 아버지도 최고라는 말을 들어보거나 거기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볼 기회도 없이 한평생을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2. 무엇이 문제인가? - ‘잘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첫째, 성경만이 하느님의 유일한 계시로서, 그것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는 것, 둘째, 예수만이 유일한 구세주로서 그를 구주로 믿고 받아들여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셋째, 기독교만이 유일한 참 종교로서 세상 사람을 모두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 선교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 넷째, 우리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학만 유일한 진리 - 성경만, 예수만, 기독교만, 우리 신학만이라고 하는 ‘만만주의’의 대명사인 셈이다. - 1. 성경무오설, 2. 동정녀 탄생, 3. 기적, 4. 육체 부활, 5. 인간의 죄성, 6. 대속, 7. 예수의 재림과 심판 등을 무조건 문자적으로 인정하고 의심 없이 믿어야 ‘잘 믿는 것’이고 그래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 이런 근본주의적 입장은 주로 ‘미국에서 그리고 미국 선교사의 영향을 받은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나라’에서만 서식하고 있을 뿐 서방 유럽 같은 데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기현상이다. 현재 미국에는 전체 기독교인의 20~4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보고 있고, 한국에는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90퍼센트 내지 95퍼센트 절대다수의 개신교 기독교인이 여기에 속한다 보아도 된다. - 철수와 그 형제는 다 같이 아버지에 대해 faith가 있지만 그들이 가진 beliefs는 각자의 나이나 기타 처지에 따라 다를 수 있고, 또 다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철수는 아버지를 주로 힘이 세어서 최고라고, 그 형제들은 아버지를 주로 용돈을 잘 줘서 좋은 분이라고 하는 beliefs를 가지고 있다. 근본주의자의 교리는 일종의 beliefs이다.

3. 기독교 패러다임의 천이 - 첫째, “배타주의에서 다원주의로”, 둘째, “상하구조에서 평등구조로”, 셋째, “저 위에 계시는 하나님에서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넷째, “교리 중심주의에서 깨달음 중심주의로”, 다섯째, “죄 강조에서 사랑 강조로”, 여섯째, “육체 부정에서 육체 긍정으로”, 일곱째, “현실 야합에서 예언자적 자세로”, 여덟째, “종말론에서 환경론으로”, 아홉째, “분열에서 연합으로”, 열째, “예수님에 관한 종교에서 예수님의 종교로”

4. 벌거벗은 임금님과 당나귀 귀 임금님 - 정직한 믿음과 무오설의 andy

5. 허스키와 진돗개 - 내 종교만 종교인가? - 종교사나 사상사를 연구하는 사람은 종교나 사상의 경우 잡종이란 말 대신에 ‘융합’이란 말을 쓴다. 역사적으로 모든 종교나 사상은 고립된 진공관 속에서 보관ㆍ유지되어 온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서로 ‘지평융합’을 하면서 계속된다는 것이다. - 유대교도 바벨론 포로 때 조로아스터교로부터 천사, 부활, 최후심판, 낙원 등의 개념을 받아들였고, 기독교도 이런 혼합된 유대교 사상에다 희랍의 밀의 종교나 철학 사상을 결합시켜서 생겨난 합작품이다. 중국의 선 불교가 인도 불교와 중국 도가사상의 결합이고, 신유학이 유불도의 습합에서 생긴 산물이라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 ‘종교학’ 창시자 막스 뮬러는 “한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알지 못한다.” - 한국 교회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이 한국에 온 선교사 대부분은 중국이나 일본에 간 선교사와는 달리 극단의 근본주의자가 주류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허버트, 게일 등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이들 거의 모두 한국에 있던 전통 종교는 보나마나 똥개요, ‘허스키만’ 유일한 진리 개라는 것을 전하는 데 전력을 다한 것이다.

- 셰익스피어가 말했다. “장미가 무슨 이름으로 불리든 그 향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캐나다 연합교회에서는 감리교 선교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원주민을 기독교로 인도하면서 그들의 말과 종교와 문화를 경시 내지 말살시키려고 한 일에 대해 1986년 캐나다 원주민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했다. 원주민이 한 말로 “유럽 백인이 들어올 때 우리는 땅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있고 그들은 땅을 가지고 있다.”

6. 세 부류의 사람 - 부처님이 진리를 깨닫고 나서 망설이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사람들이 진리니 뭐니 하는 것에 관심이 없을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진리가 너무나도 심오하고 신비스러워서 사람들이 도저히 깨닫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도덕경』제 41장에 보면, 뛰어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힘써 행하고, 어중간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이런가 저런가 망설이고, 못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크게 웃습니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7. 신앙의 여섯 단계 - 파울러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먼저, ‘전단계’라는 지적 능력 같은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엄마나 다른 보호자에게 가지는 무조건적 신뢰의 단계로서 이때 갖는 신앙을 무분별적 신앙이라고 했다. 제1의 단계는 “직관적ㆍ투사적 신앙”의 단계이다. 이 단계의 신앙은 2세에서 6,7세 사이에서 나타나는데, 아이들은 상상과 환상의 세계에 살면서 이에 걸맞는 믿음을 키워간다. 제2의 단계는 “신화적ㆍ문자적 신앙”의 단계이다. 초등학교 학생들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것으로서, 상징적 뜻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이 이런 이야기가 말하는 것과 같이 문자적으로 이렇게 생기고 굴러간다고 믿는다. 싼타 할아버지가 와서 선물을 주고 갈 것을 그대로 믿는 것이다.

-제3의 단계는 “종합적ㆍ인습적 신앙”의 단계이다.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여질 때의 모순을 의식하는 단계이다.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외적 권위에 의존하게 된다. 자기 교회에서 가르쳐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수하겠다고 애를 쓰는 열성파 사람들 대부분은 이 단계에서 주저앉은 사람들이다. 제4의 단계는 “개성화와 성찰의 신앙”단계이다. 20대 중반의 청년기, 경우에 따라서는 30대 후분이나 40대 초반에서도 형성되는데, 반성하고 통찰하는 단계이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이 단계에 조차 이르지 못하고 한평생을 마치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 단계에 성공적으로 진입하게 되면 자신과 세계를 보는 눈이 새롭게 열리고, 지금까지 검토되지 않던 상징체계가 의미있는 것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제5의 단계는 “접속적 신앙”이다. 주로 중년기 이후에 생기는 것, ‘양극의 일치’를 받아들이게 되는 단계이다. 빛이 파장도 되고 입자도 된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한 가지 사물의 양면을 동시에 볼 줄 아는 마음이다. 제5단계는 의식의 영역을 넘어선 단계,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되는 단계이다. 교리나 상징체계 등은 어차피 궁극실재에 대한 부분적 표현일 뿐이라는 것, 자기의 종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가 궁극실재와 비교할 때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제6단계는 “보편화하는 신앙”의 단계이다. 성인의 경지, 자유와 무애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 테레사 수녀가 이에 해당된다.

8. 두 가지 사유 방식 - 과학의 새 패러다임이 종교 사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참고문헌 목록에 나타난 Ian Barbour의 책을 참조하실 수 있다. 정말 아니러니컬한 현상은 지금까지 이원론적인 사고에 지배받아 오던 서양에서는 이분법적 사고방식만으로는 사물의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깨닫는 지성인이 놀라울 정도로 증가하는 반면, 전통적으로 비이분법적 사고가 주류를 이루던 동양에서는 서양식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사물을 보는 유일한 진리의 방법으로 떠받드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고 하는 사실이다. 도가사상이나 화엄사상이 그 대표라 할 수 있다.

❍ 성경대로 믿는다?

1. 김목사의 성경관 - ‘성경대로’ 믿는다? - 십계명에서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했다해서 그 가르침에 충실하느라 사진 찍기를 거절하고, 그래서 운전 면허증도 내지 못한 사람이 있다. 성경에는 분명 피는 생명이니 피를 취하지 말라 했고, 여기에 충실하여 여호와의 증인은 죽는 한이 있어도 수혈을 거부하는데, 김목사님도 그렇게 할까? 하와가 죄를 짓고 그 벌로 해산의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했으니, 해산시 무슨 일이 있어도 마취 등 고통을 없애려는 노력은 결국 하나님의 명을 어기는 일이라 믿는 사람이 있다. 창세기에 보면 “노아의 아들 중 함의 자손은 ‘종이 되어’ 셈과 야벳에서 나온 자손을 섬기기로 되었다.” 노예제도나 인종차별을 성경의 이름으로 옹호해야 한다는 말인가? 성경에는 월경을 부정한 것으로 보았고 일부다처제를 용인했다.

2. 흥부전과 성경 - 성경을 ‘믿는다’? - 문자대로 믿지 않는다고 해서 흥부전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다. 흥부전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을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그 신나는 판소리를 즐기면 되는 것이다. 고고학 교수는 캐드린 케년 등 옛날의 그 여리고 성터를 파본 성서 고고학자들의 연구 결과 여호수아 당시 그렇게 무너질 성벽이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 성경을 어떻게 흥부전과 비교할 수 있는가 의문을 제기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다. 이 두 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정확한 역사적, 과학적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일차적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어서는 성질이 같다.

3. 창조 이야기의 딜레마와 교훈

- 창세기 1장 1절에서 2장 3절까지의 창조 이야기와 2장 4절 이후의 창조 이야기는 두 가지 완전히 상이한 고대문서가 짜깁기 식으로 연결된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를 기원전 6세기에 생긴 P문서(제사문서)에 속하는 이야기로, 두 번째 이야기를 기원전 10세기 경에 생긴 J문서(야훼문서)에 속한 것으로 보고 있다. P문서는 제사에 쓰는 문서답게 축문 식으로 근엄하고 공식적인 문체로 된데 반해, J문서는 완전히 간결한 이야기식 문체로 쓰여져 있다. 처음 문서에 나오는 하나님은 엘로힘이라는 이름의 하나님이고, 두 번째 문서에 나오는 하나님은 야훼라는 이름의 하나님이다. 우리말로 엘로힘은 그냥 “하나님”으로, 야훼는 개역에 “여호와 하나님”. 표준새번역에는 “주 하나님”으로 되어 있다. 천지를 창조하는 방식도 완전히 다르다. 엘로힘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시는 방식은 그야말로 장엄하다. 야훼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는 방법은 이보다 훨씬 인간적이다.

- 몇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지적해보자. 첫째, ‘아담’이라는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란 뜻으로, ‘흙’을 의미하는 ‘아담아’에서 유래된 것이다. 라틴말 ‘homo'라는 말이 라틴어에서 흙을 의미하는 ’humus'에서 나온 것과 같다. 하나님이 처음 만드신 인간은 ‘남자’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었다. 둘째, 아담과 하와가 먹은 과일이 사과인지 복숭아인지 누구도 모른다. 셋째, 아담 하와의 경우 하나님이 직접 손으로 만드셨으니 탯줄이 없엇을 것이고, 따라서 배꼽이 없었을 것이다. 넷째, 17세기 제임스 엇셔라는 아일랜드 신부가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그 자손들의 생존연대를 전부 게산해서 아담이 흙으로 빚어진 것이 기원전 4004년이라 주장하고, 그것이 오랫동안 가톨릭 교회의 공식 교리로 채택되어 왔는데, 한 술 더 떠서 영국의 성 캐더린 대학 학장인 죤 라이트 푸트 박사는 그것이 정확하게 10월 23일 오전 9시 정각이었다고 공표했다.

-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런 것이 아니다. 우리 앞에 펼쳐진 이 두 가지 창조 이야기 중 어느 것을 정말로 믿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첫째, 이야기에서는 5일에 새들을, 6일에 짐승들을 만드시고, 그리고 나서 사람을 만드셨다고 했는데, 둘째 이야기에서는 사람을 먼저 창조하시고 그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여 짐승들을 지으시고 따라서 새들을 지으셨다고 했다.

- 심각성을 몇 가지만 지적하면, 첫째, 이야기에서는 전지전능한 신이 완전히 원대한 계획에 따라 천지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말씀으로 단숨에 다 지으시고, 일이 완성되었을 때 극히 만족해하시면서 일에서 손을 떼신다. 그리고 수정 작업이나 추가 보수 작업 같은 것을 하시지 않는다. 물론 일곱째 날 쉬신 것을 보면 완전히 ‘전능’하신 것만도 아니라는 반론이 나옴직도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사항이 아닌 것 같다. 문제는 둘째 이야기에서 나오는 신과 너무나도 다르다는 사실이다. 둘재 이야기에 나오는 신은 일단 사람을 만들어 놓고 보니까 있어야 할 곳이 필요하구나 생각하시고 동산을 일구신다. 또 사람이 거기서 쓸쓸히 지나는 것을 보시고 나서 뒤늦게나마 자기의 실수를 알아내시고 짐승과 새들을 만드신다. 이렇게 일을 해가면서 계속 계획을 수정 보완해가고 있다. 아담 하와의 추방으로 결국 실패작이 되고 말 에덴 동산 조성사업마저도 미리 알지 못하고 그대로 추진했던 신이다. 그런 실수 때문에 에덴 동산은 쓸데없는 공터로 남게 된 것이다.

- 전지전능하신 신이라면 아담 하와가 숨어있다고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찾으실 필요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끝까지 다 아시는 신이 아담 하와가 따먹을 것을 뻔히 아시면서 왜 그런 나무를 만들어 놓으셨는가? 하지만, 아이가 부모의 말을 거역하여 벼랑으로 갔다가 거기에서 떨어져 죽을 것 같으면, 그것이 아무리 부모 말을 듣지 않은 결과에서 오는 일이라 하더라도 일단은 붙잡는 것이 부모의 일반적 심정일 터인데, 하나님은 그런 마음마저도 없었다는 것이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지는 것을 막아야 할 정도로 하나님은 질투심과 이기심이 많으신가? 선과 악을 알기도 전에 선악과를 먹으면 나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 우리에게 힘이 되고 지침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한번 풀이해 보기로 한다. 첫째,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우주 만물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한 가지 근원, 같은 태에서 나온 형제 자매라느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이제 모든 인류를 감쌀 뿐 아니라 생물 무생물을 다함게 얼싸안는 우주적 동류의식을 배양해야 하는 것이다.(불교의 자비), 둘째, 만물을 서로 연관되었다는 것이다.(불교의 연기론), 셋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불교의 불성)

- 창조론이 진리라며 입에 거품을 물고 외치면서도 환경을 오염시키고 자연파괴에 동참하는 사람들과, 진화론을 믿지만 자연보호에 시간과 정력을 바치는 캐나다의 데이비드 스즈키 교수, 누가 창조주 하나님의 정신에 더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겠는가? 박노자 교수가 창조론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는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대해 쓴 다음의 글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오슬로에서 자동차를 끌고 나가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체력 쇠약 등의 이유로 자전거를 못 타는 사람은 거의 전부 대중교통을 사용한다.』

4. 아담의 갈빗대?

- 갈빗대 이야기를 비교종교학적이라고 할까, 비교신화학적 시각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상당수의 신화에서 최초의 인간은 남녀 성을 한 몸에 지녔던 것으로 나타난다. 힌두교에서도 그 옛날 최초의 인간은 양성을 한 몸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로아스터교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플라톤의 『심포지엄』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 ‘갈빗대’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원문은 ‘첼라’이다. 그 말 자체는 그냥 ‘한 쪽’이라는 뜻이었다.

5. 선악과 - 이분법적 의식의 출현

- 바람직하지 못한 해석들로부터 몇 가지 예로 든다. 첫째, 이 이야기를 여자의 본성에 관한 이야기라 해석하는 것이다. 하와가 유혹에 빠져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여자는 책임을 지고 설치지 말아야 한다. 그뿐 아니라 남자를 유혹했으니 여자는 언제나 위험한 존재라는 것이다. 둘째 해석은 이 이야기를 둘째, 세계적으로 공통적인 현상이기는 하지만 특히 중동 지방에서 뱀은 남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므로, 하와가 뱀의 꾀임에 넘어갔다고 하는 것은 여자가 성적으로 눈을 뜨게 되어, 결국 뱀의 성적 유혹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는 외경 마카비 4서 등에 나오는 해석으로, 저스틴이나 어거스틴 등 초대 교부들도 이런 해석에 찬동했다. 셋째, 인간의 ‘원죄’를 설명하려 하는 것이다.

6. 노아 홍수를 따져보면 7. 경상도 시리즈와 성경

8. 성경은 하늘에서 떨어진 책인가?

- 『5복음서』라는 책 서론 부분에 나오는 이론을 먼저 정리해 본다. 첫째, 사본 문제이다. 복음서의 경우 가장 오래된 사본이 예수님 사후 175년경에 필사된 것이라 믿어지는 사본이다. 손으로 베껴 쓴 것이었다. 따라서 완전히 똑같은 사본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둘째, 복음서 저자와 저작연대의 문제이다. 또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그 복음서의 실제적 저자도 아니다. 마가와 누가만은 실제적 저자의 이름이라 보는 성서학자도 있지만, 아무튼 복음서들은 처음에는 저자 이름이나 제목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후에 가서 이름이 붙었는데, 이런 이름은 실제 저자의 이름과 상관이 없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성서학자 견해에 의하면, 복음서 중 마가복음이 기원후 70년 경 제일 먼저 쓰여지고, 그 후 20년 정도 있다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쓰여지고, 기원후 100년 전후해서 요한복음이 쓰여졌다고 본다. 셋째, 복음서 자료의 문제이다. 공관복음서만 가지고 보면, 마태, 누가 두 복음서 기자들은 마가복음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거기다가 별도로 얼마를 덧붙여서 자기들의 복음서로 꾸몄다. 마태복음의 경우 마가복음에 나오는 것의 90퍼센트 정도, 누가복음의 경우 50퍼센트 정도를 그대로 인용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저자들이 사용한 마가복음 이외의 자료가 별도로 있었던가, 있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은 그것이 Q자료일 것이라 한다. 이 자료는 예수님이 하셨다는 간단한 말슴만 모아놓은 ‘어록’ 같은 것이라고 본다. 최근에 발견된 도마복음서도 그런 종류의 복음서이다. 물론 Q자료의 존재를 이정하지 않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저자들이 스스로 여기저기에서 듣거나 생각해낸 것을 덧붙였을 것이라 믿는 사람도 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저자들이 복음서를 쓸 때 자기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쓴 것이 아니다. 목격자로 쓴 것이 아니라, 그전 목격자들이 한 말이 전해내려 오는 것을 듣고 쓴 것이다.

9. 단군신화와 기독교 - 기독교 신학자로서 고집불통의 몇몇을 제외하면 기독교인이 그들의 ‘믿음의 조상’이라 믿고 있는 아브라함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물이라 간주하거나 그에 관한 이야기가 실제 사건의 기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 헤롯 왕이 기원전 4년에 죽고, 그의 아들 아켈라우스가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지만, 백성의 원성 때문에 결국 기원후 6년 왕위에서 쫓겨나고, 유대는 시리아 총독의 관할로 넘어가게 되었다. 바로 그 해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자기 관할의 자산정도를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 호구조사를 실시했다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감안한다면 아기 예수가 헤롯 왕 재위 시에 태어나서 헤롯 왕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 했다는 마태 복음서의 기록은 역사적 신빙성이 결여된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 단군이 역사적 인물이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그의 가르침이라고 전해 내려오는 “홍익인간”의 이상이라든가 그가 우리 심성에 자리잡고 있는 시조로서의 위상, 민족 정신의 구심점으로 작용할 가능성.

10. 베들레헴과 백두산 기슭

- 김정일 위원장이 정말은 어디에서 났든지 간에 그의 출생지를 백두산 기슭이라 한다고 하여 전혀 이상스러울 것이 없다. 종교사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

- 베들레헴이 예수님의 출생지일 수 없다고 하는 이유를 여기서 낱낱이 다 거론할 수는 없지만, 학자들이 주장하는 주요 이유 몇 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로마제국 역사상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고향’으로 가서 호구조사에 응하라는 칙령을 내린 황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로마에서는 매 5년마다, 조세를 목적으로 각자 거주지 관할 관서에 가서 가족사항과 재산정도를 신고한다. 둘째, 설령 각자 고향으로 가서 호적신고를 하라는 칙령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만삭이 된 여자를 데리고 한국 거리수로 따져서 330리나 되는 그 거칠고 위험한 길을 가겠다고 만용을 부리는 남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셋째, 땅이 많은 지주가 잠시 외지에 가 있었을 경우 고향에 돌아와 호적신고를 하는 수는 있었다. 그러나 요셉의 경우 고향에 땅도 없었고, 또 그가 살던 나사렛은 임시 거처가 아니었다. 넷째, 예루살렘에 방이 모자로 20리 밖에 있는 베들레헴 여관방까지 다 채워졌다고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 구약 미가서 5장 2절에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나올 것이다.”라고 했기 때문에 메시아는 다윗의 동네에서 나와야만 한다고 믿었고, 이 믿음을 그들의 예수 이야기에다 반영했던 것이다.

11. 성경이 사람을 죽이는 몇 가지 경우 - 성경을 나 개인이나 내 집단의 정치적, 사회적, 조직적 이익을 위해 아전인수 식으로 사용하는 경우이다. 예로 착한 사람은 다 잘 된다는 것을 말하는 잠언과 착한 사람이라고 다 잘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욥기이다.

12. 예수님의 성경 읽기 - “환기식 독법” - 유대인은 『율법과 선지자와 문서』라는 긴 이름을 쓰고, 이 낱말들의 히브리어 첫 자들을 따서 『타나크』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냥 『히브리 성경』이라 한다. - 예수님의 성경 읽기 방법이 아주 흥미롭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잘 읽어보면 이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나는”이라는 말이 모두 여섯 번 나온다. 예수님은 “성경에 살인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니까 너희도 살인하지말라.”는 식으로 말씀하시지 않았다.

13. 싼타 할아버지는 언제 오시는가? - 두 가지 문자주의

- 틸리히는 “비판적 신학의 적은 자연스런 문자주의가 아니라 자주적 사고를 억누르고 공격하는 의식적 문자주의”라고 결론을 내렸다. - 이렇게 철이 들면서 문자주의에서 해방되려고 하는데, 이를 거부하는 반동적 문자주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1697년 토마스 에이큰헤드라는 학생은 모세 오경을 모세가 쓴 것이 아니라 모세 시대에서 800년 후에 쓰인 것이라는 말을 했다가 에딘버러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 잘못된 신관은 무신론만 못하다.

1.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노라” - “우리가 바빌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노라.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시편 137:1-4) - 힘있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택한 백성이 이방신을 섬기고 사는 바빌론의 공격에 그렇게도 무참히 쓰러져 버리고 이제 이렇게 처량한 포로의 신세로까지 전락하고 말았으니. 이러고도 어찌 옛날처럼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탄식한다는 이야기이다.

- 종래까지 자기들 민족만을 위해 역사하신다는 이른바 “부족신의 신관”을 버리고 하나님은 온 세상을 위한 신, 온 우주를 다스리는 신이라는 보편신의 신관으로 발전시키게 된 것이다. 출애굽 등 이스라엘 백성의 안녕을 위한 일이라면 애굽인이나 가나안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일도 불사하는 한 민족이나 한 집단의 신이라는 믿음이 제2이사야나 에레미야서에 나오는 하나님처럼 세상 만민을 위해 보편적인 사랑과 공의를 베푸시는 신, 그들을 위한 슬픔과 애통함, 안타까움으로 가득하신 신이라는 생각이 등장하게 된다.

2. 하나님은 남자인가? - 히브리 성경에 2500번 가량 나올 정도로 중요한 ‘엘로힘’이라는 이름은 어원적으로 따져보면, ‘엘’이라는 남성 신과 ‘엘로아’라는 여성 신의 이름이 합해서 된 복합명사에다가 복수를 나타내는 ‘임’을 붙여서 된 것 - 이렇게 신의 ‘양성구유성’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들)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26)하셨다고 한 사실에서도 그 일면을 볼 수 있다. ‘우리의 모양’에서 ‘남자와 여자’가 나왔다면 그 ‘우리의 모양’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엘샤다이’라는 이름도 적어도 어원적으로는 본래 ‘젖가슴을 가진 하나님’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라 보는 신학자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 고유의 신이었던 ‘야훼’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너희는 너희를 낳은 하나님을 잊었다.”(18, 이하 표준새번역) - 이사야서에 보면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 백성을 위하여 야훼는 “어머니가 그 자식을 위로하듯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비록 어미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49:15)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어머니로 표현한 것이 상징적인 것과 똑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한 것도 역시 상징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3. 하나님 어머니 - 성령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 루악은 본래 여성 명사였다. 그것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Spiritus라는 남성 명사로 바뀌었다. - 『도덕경』에 보면 도를 어머니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4. 실제적 다신론 - 신이 여럿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 중에서 특히 어느 한 신을 택해 그 신을 경배하는 것을 단일신론이라 한다. - 유대교에서 처음에는 유일신관이 발달하지 않고 있다가 기원전 8세기 선지자 아모스 때, 그리고 그 후 제2 이사야에 와서야 확실하게 유일신관으로 정착했다던가 하는 신관의 역사 문제를 가지고 따지려 하는 것이 아니다.

- 우선 기독교를 ‘다신론’의 종교로 볼 수 있다는 이유부터 살펴보자. 첫째, 상당수의 기독교인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따로 있고, 이슬람교의 알라 신, 힌두교의 시바 신, 중국의 상제, 한국 전래의 하늘님 등이 별도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또 일상 대화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다. 베다경에서 “진리는 하나, 서인들은 그것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를 분”이라고 했다. 둘째, 종교철학자 존 힉에 의하면 황금의 신, 사업체의 신, 출세의 신, 권력의 신, 체면유지의 신,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잠깐씩) 유대-기독교에서 믿는 신 등등에게 분산해서 바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5. 실제적 무신론 - 이론이나 교리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금과옥조 처럼 받들고 살지만, 실제 생활에서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혹은 돌아가신 것처럼 하고 사는 태도를 일러 ‘실제적 무신론’이라 한다. - 실제적 무신론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은 21세기에 사는 우리에게 걸맞지 않는 신관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6. 부족신관 - 온 세상을 그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이 어찌 그리 불공평하게도 중동지방 그 조그만 부족 이스라엘만을 택하셔서 ‘택한 백성’으로 삼으시고, 다른 족속은 모두 흑암 가운데 내팽개쳤나

- 자기 백성밖에 모르는 하나님 : 출애굽 이야기, 바로가 람세스 2세라면, 그는 물에 빠져 죽은 것이 아니라 자기 침대에서 죽었다고 한다. 야훼 하나님은 뭘하고 계시다가 그들의 고통이 극에 달해서야 갑자기 나타나신 것인가? 이스라엘에 속했다는 이유 한 가지만으로 생명을 구하고 애굽인에 속했다는 이유 한 가지만으로 무조건 죽임을 당하도록 하는 이런 극단의 인종차별 정책이 도대체 사랑과 공평의 하나님으로서 하실 일인가? 열세 번씩이나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셔서 바로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도록 해놓으시고, 이스라엘 백성 내보내기를 거절한다고 계속 재앙을 내리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논리인가?

- 잔인하신 하나님 : 가나안 정복 이야기, 일주일이면 들어갈 수 있는 거리를 두고 시내 광양에서 40년 간 헤매다가 드디어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젖과 꿀이 흐르는 땅”(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부근에서 기름은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 땅)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가게 된다. 여리고 성을 돌아 그 성을 무너뜨렸다는 이야기는 전에 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였다는 사실이다. 아이 성 사람을 모두 전멸시키고, 다시 성으로 들어가 성에 있던 사람까지 완전히 진멸시키니 그날에 죽은 사람이 “남녀가 일만이천이라”고 했다. 한 번은 도망가는 적군에게 우박을 퍼부으셔서, “우박으로 죽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찔려 죽은 자보다 더 많았다.”고 했다. 밤이 되어 적군이 도망가게 되자 그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여호수아가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하였다.

- 거기 나오는 하나님 이야기는 하나님 자체의 본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중동 사막 지대에 떠돌아다니던 유목민이 그들의 특수한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여건에 따라 그들의 신을 그런 식으로 믿고 그 믿는 바를 기록한 것이다. - 이런 신관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유대인 자체 내에서마저 바빌론 포로와 함께 의미 없는 신관으로 취급되어 대부분 방기된 신관이다. - ‘D 문서’ 전통은 포로 이후에까지도 부족 신관을 유지했다.

- 장애인을 차별하는 하나님 : 제사장 제도, 그 이후에도 계속 “문둥환자나 유출병이 있는 자” 등은 부정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정하기 전에는 성물을 먹지 말 것”(레22:4)이라 했다. 그 뿐 아니라 “외국인은 성물을 먹지 못할 것이며, 제사장의 객이나 품꾼은 다 성물을 먹지 못할 것이니라.”(22:10) - 외국인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너의 평생에 그들의 평안과 형통을 영영히 구하지 말지니라.”(신23:6) - 불행하게도 기원 후 312년 그리스도의 이름 첫 두 글자 ‘Xp'를 투구에 써 붙이고 나가 싸우므로 밀비아 다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로마 황제 콘스탄틴 이후 이런 부족신관이 기독교에서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7. 율법주의적 신관 - 왕으로서의 하나님 : 성경에는 물론 하나님을 나타내는 상징이 많다. 하나님을 만 왕의 왕이라든가, 만 주의 주, 용사, 전사, 재판장, 법을 주신 이, 목자, 토기장이, 의원, 아버지, 어머니, 친구 등의 인간 관계를 중심으로 한 상징도 있고, 독수리, 반석, 사자, 곰, 구름, 산성, 방패 등 자연이나 인공물에서 따온 상징도 있다. 이런 간단한 상징물을 영어로 메타포라 하고 한국말로는 은유라고 한다. 그 첫째 특성은 소위 ‘이중성’이라는 것이다. 그 상징성을 망각하면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메타포의 두 번째 특성은 ‘환기성’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목자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이끌고 앞서 가시는 목자를 상상함과 동시에 우리 스스로를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가고 있는 양으로 생각하게 된다. 노아 홍수처럼 “지면에서 쓸어버리는” 싹쓸이 작전은 한 번으로 끝이라고 했다. 희생양을 잡아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 예수님이 그 일을 대신하신 것이다. 나중 최후 심판에서 그 모든 것을 가려내신다는 것이다. 율법주의적 신관은 부족신관과 마찬가지로 극복해야할 구시대의 유물이다.

- 율법주의적 믿음과 삶 : 율법주의적 믿음이란 모든 것을 순종, 불순종으로 따지는 것이다. 종교적 삶이 자유와 해방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게 된다. 예수님의 비유 중(마20:1-15)에서 아침 일찍부터 포도원에서 일하던 품꾼이 저녁 해질 무렵부터 일하던 품꾼과 똑 같은 삯을 받는다고 불평하던 심사와 같다. 하나님의 계명에 절대적으로 순종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쩔수 없이 죄인이다. 율법주의적 삶은 이렇게 ‘죄’라는 것이 중심문제로 등장하는 삶이다. 바울과 같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하는 절규를 피할 수 없다. 미국의 철학자 겸 종교심리학자 윌리암 제임스는 이렇게 ‘죄’를 중심문제로 하고 돌아가는 종교를 ‘병든 영혼의 종교’라 하고 ‘건강한 마음의 종교’와 대비시키고 있다. 예수님은 이런 율법주의 신관이나 종교관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는 분이시다.

8. 조건부 신관 - 이기적 신앙 - 철수는 엄마가 그렇게 하는 것이 신이 났다. 그래서 점점 더 엄마의 말을 잘 듣는다. 엄마는 점점 더 자기의 말을 잘 듣는 철수가 더욱 귀여워져서 더욱 많은 축복을 내린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진 하나님 생각을 이렇게 철수의 이야기로 바구어 놓으니까 유치하게 들리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 주위에서 지극히 보편적인 신관 아닌가? -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셧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하고 노래한다.

- 자기에게만 사탕을 주시는 엄마에게 계속 감사와 찬양만 할 것이 아니라 엄마에게 간구하여 다른 형제들에게도 사탕을 같이 나누어주셨으면 좋겠다고 부탁해야 한다. -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돌아올 때 무조건 받아주는 하나님을 소개하신 것이다. 율법주의적 제사 종교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용서에는 반드시 피흘림이든 무엇이든 대가를 먼저 지불해야 하는 것으로 믿고 있던 때 하나님은 이렇게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밝히신 것이다.

9. 스스로 하나님이 된 사람들 - ‘하나님의 뜻’이라는 깃발 아래서 서로가 피 터지게 싸우게 된다. 결국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내 뜻’을 하나님의 뜻, 주님의 뜻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돌이나 나무로 새겨진 우상에게 절하는 것을 두고 우상숭배라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모든 것에서 상대적인 나를 절대자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자기 우상숭배’가 얼마나 더 엄청나고 무서운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는 일이 없다.

- 어떻게 해야 이런 엄청나고 무서운 일을 줄일 수 있을까? 우선 생각나는 것 몇 가지를 열거해 본다. 첫째, 현재의 내 특수 입장에서 ‘내 식대로’ 이해한 ‘하나님의 뜻’이란 사실을 분명히 깨달을 필요가 있다. 둘째, 내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과의 변증법적 대화를 통해 얻어진 나대로의 결론에 입각해서 내려진 ‘나 자신의’ 결단이라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뜻이란 진정으로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기다리는 일을 떠나서는 결코 얻을수 없는 무엇이다. 넷째, 하나님의 뜻 때문에 내가 죽고 우리 사이에 평화가 깃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뜻 아닌가?

10. 하나님과 생태계 문제 - 자연은 벗하거나 더불어 살 대상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정복하고 다스릴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 맥쿼리는 이 고전적 신관이 적어도 일부 사람들에게 “자연에 대한 거침없는 지배와 착취”를 위해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고 못박았다. - 하나님을 저 위에 계셔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임금쯤으로 보는 신관을 바꾸어, 하나님을 영으로 생각하는 신관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학자가 등장한다. 하나님을 영으로 생각하면, 창조를 태초에 한 번 있었던 일회적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일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북미 원주민처럼 지구 자체를 우리의 어머니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도 있다.

11. 신은 존재냐 비존재냐?

- 무릇 모든 존재란 어쩔 수 없이 시공의 범주에 의해 제약된다. 그런 의미에서 절대자를 ‘존재’라고만 해도 그런 절대자는 진정으로 절대적인 절대자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자는 다른 존재를 가능하게 해주는 ‘존재의 근거’이든가, 일반 모든 존재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의미에서 ‘비존재’로, 혹은 일반 모든 사물과 절대적으로 다르다는 의미에서 no-thing, Nothing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 20세기 최대의 신학자로 인정되는 틸리히도 그렇지만, 이런 생각은 중세의 신비 사상가 마이스터 에카르트 등이 특히 강조하던 생각들이다. 물론 베단타의 ‘니르구나 브라만’이나 도가의 ‘무’, ‘무무’나 불가의 ‘空’같은 고전 사상도 이 점에 있어서는 대동소이하다고 볼 수 있다.

- 절대자는 절대적이지만 절대자에 대한 우리의 표현이나 생각이나 견해나 개념이나 범주나 이론이나 교리 등등은 모두 절대적일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이다. - 서양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절대자에 관한 ‘유신론적 교설들’이, 이제 별로 의미 없게 되었다는 것을 “신은 죽었다”라는 센세이션한 말로 표현한 것이다. 요즘은 “신은 실업자”라는 말을 한다. 창조사업도 6천 년 전에 다 이루어 놓았고, 이제 어느 특수한 민족의 안녕을 위해 전쟁에 매달리는 일도 없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야 할 일도 없고, 천둥 번개로 죄인들을 처벌할 일도 없고, 잘하는 사람 골라 상줄 일도 없고, 결국 ‘unemployed God'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12. 어느 신학자의 신관 - 흔들리는 신관 : 이신론이란 17,8세기 유럽의 뉴턴 같은 과학자나 미국의 제퍼슨, 워싱톤 같은 지성인 사이에서 유행하던 신관으로 하나님이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일단 창조하신 다음에는 세상이 저절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놓았다는 생각이다. 말하자면 자동 손목시계처럼 세상은 하나님의 관여나 간섭 없이 그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를 보통 ‘궐석 신관’이라 한다. 틸리히의 사상은 비교종교학을 가르치는 지금도 그의 책 중 하나인 Dynamics of Faith를 교과서로 채택하고 있을 정도이다. ‘하나의 존재’로 보는 유신론적 신관을 배격하고, 신을 ‘존재의 근거’혹은 ‘존재 자체’, ‘궁극실재’라 주장한다. 신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것, 따라서 “신은 신의 상징”이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 초월이냐 내재냐 :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문화적 산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님은 처녀에게서 태어나지 않았음이 거의 분명하다는 것,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세상의 죄를 위해 죽는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죽었다는 것 등을 알게 된 것이다.

- 초월도 내재도 :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강조하는 신관을 영어로 panentheism이라 하는데, 한국말로 ‘범재신론’이라 한다. ‘양극적 유신론’이라 하기도 하고, ‘자연주의적 유신관’이라 하기도 한다. ‘변증법적 유신관’이라는 것이다. 맥쿼리 교수가 그의 기포드 강연을 기초로 하여 쓴 『신성의 탐구』라는 책을 읽어볼 수 있다. 우선 말 그대로 ‘모든것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범신론에서는 모든 것이 곧 신이다. 신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그대로 신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데 반해 범재신론은 우리와 하나님, 혹은 세상과 하나님을 분간한다. 보그가 거친 신관의 변천은 어느 의미에서 신앙이 성숙하면서 거치는 과정과 같다. 많은 경우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유신론적 신관에서 다음 단계를 발견하지 못하면 신에 대한 생각 자체를 그만하거나 무신론, 이신론으로 끝나고 만다.

- 참고로, 현재 서구 사회에서 유대인 중에 불교인이나 불교 쪽으로 기울어진 사람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많은데, 유대인의 이런 특수한 경험 때문에 초자연적 신관을 강요하지 않는 불교를 선호하는 것이 아닐까 보는 견해가 있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 예수는 없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이신가? - 캐나다 연합교회는 이미 1940년에 새로운 신조를 채택하면서, “각각 새로운 세대의 그리스도인은 새 시대의 사상에 맞게, 그리고 시대의 필요에 부응하여 그 신조를 새롭게 천명할 의무가 있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2. 예수님의 성생활 - 『예수는 결혼했던가』라는 책에서 예수님이 결혼했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첫째, 그 당시 유대인은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 것이 창세기 1:28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는 종교적 의무라 믿었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님은 결혼문제에 대해 호의적으로 언급하고, 또 이혼문제에 관해서도 남자가 여자를 간음 등의 이유도 없이 버리는 일이 얼마나 그릇된 일인가 하는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셋째,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와의 관계가 보통 이상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 성서학자 중에는 가나의 혼인잔치(요2:1-11)가 예수님 자신의 결혼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기도 한다.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가 거기 초대된것, 더욱이 포도주가 떨어지자 자기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도 이상스럽고, 술을 마신 손님 중 연회장이 ‘신랑’더러 “이런 좋은 포도주를 어디에 두었다가 지금 가지고 나오느냐.”고 했던 말이 결국 예수님을 보고 한 말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 다른 견해로는 어처구니없게도 예수님이 분명 동성애자였으리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대표자로 캠브릿지 대 성마리아 교회 교구장 몬피오르를 들 수 있다. 예수님이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다.”(마19:12)고 했는데, 이것이 성에 대한 예수님의 혐오감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증거라고 한다. 특히 ‘사랑하는 제자’ 요한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동성애적 성향에 눈뜨게 되었다는 것이다. 체포되어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성전에 가서 환전상의 상을 뒤엎는 등 소란을 피운 것인데, 그것은 마치, 자신의 동성애적 경향을 발견한 옛날 미국의 청교도 젊은이가 너무나 무섭고 혐오스러워서 죽음으로 이 문제를 청산하겠다고 군대에 자원입대하여 가장 위험한 임무에 스스로를 내던지던 행위와 맞먹는 일이라고 하였다.

3.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 최근 신학계의 동향은, 예수님에 대해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이런 저런 교리나 이론을 무조건 믿는 것보다는 예수님의 믿음,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믿음, 예수님이 지니고 계셨던 마음을 알고 우리도 그런 믿음,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 문제는 이 4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길 것을 목적으로 쓰여진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는 데 있다. 한마디로 ‘믿음의 기록, 믿음에 의한 기록, 믿음을 위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복음서를 통해서 역사적 예수를 알아낸다고 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19세기와 20세기 중반까지의 많은 신학자가 역사적 예수를 알아내려던 시도 끝에 얻은 결론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슈바이처 박사의 『예수전 연구사』가 이를 말해주는 고전적 문헌이다.

- 상당수의 신학자는 기독교의 역사적 비극 중 하나가 예수님 자신의 가르침보다 예수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더욱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라 본다. - 불교에서도 부처님이 원시불교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꼭 인간 부처로 남아 있어야 하느냐는 등의 문제가 있는 것처럼 이 문제는 종교사적으로 보아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4.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 첫째, 가장 먼저 Tm여진 마가복음에는 나오지 않고 그 후에 쓰여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바울의 서신에서도 여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바울이 만약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알고,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는 그가 쓴 편지 모두에 그 말을 전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믿어야 된다고 했을 것이다. 둘째, 첫머리에 나오는 족보부터 다르다. 마태복음 이야기에 의하면 집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났고, 누가복음에 보면 밖에서 아기를 낳아 구유에 눕혔다가, 그 후 나사렛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마태복음에는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 누가 복음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고, 천사의 기별을 받은 목자들이 찾아 온 것으로 되어 있다. 마태복음에는 헤롯이 아기들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애굽으로 피신하고 누가복음에는 성전에서 아기 봉헌식에 참석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 탄생연대가 헤롯 왕이 죽은 기원전 4년 이전이고, 누가복음에 의하면 호구조사를 명한 구례뇨가 총독이 된 기원 후 6년 이후가 된다.

- 동정녀 탄생과 관련하여 우리가 명심하여야 할 사항 몇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동정녀 탄생은 세계 어디서나 발견 할 수 있는 극히 보편적 현상이다. 둘째, 인성과 신성의 아름답고 조화로운 결합에 의해 태어나신 분임을 고백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셋째, 상징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어둠을 이기는 빛이라는 뜻을 전하기 위해, 마태는 밤하늘을 비추는 별을 등장시키고 누가는 목자들을 두루 비추는 ‘주의 영광’의 천사를 등장시킨 것이라 풀어 볼 수 있다. 또 마태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구성된 족보를 열거하고, 누가는 예수님이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위한 선지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스라엘 선지자로 구성된 족보를 만든 것이다.

5. 탄생 이야기에 얽힌 몇 가지 의문 - 첫째, 동방박사의 방문이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별이 갑자기 없어진다. 둘째, 이 별의 이상스런 출몰 때문에 무고한 아기들만 죽임을 당했다. - 마태복음 저자는 이렇게 아기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다음의 절을 인용한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2:18)고 했다. 라마는 예루살렘 북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마을이고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마을로 두 마을은 완전히 다른 마을이다. 예레미야에서는 다 큰 자식이 적군의 땅으로 포로가 되어 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도 아주 죽은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올 터이니 ‘최후의 소망’을 버리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렘31:15-17) 두 이야기는 전혀 상관이 없다.

-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님을 모세와 같이 위대한 인물, 제2의 모세라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의 이야기 중 히브리인 가정의 어린아이들이 바로 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출1:15)를 원용한 것이다. 그리고 모세가 애굽인을 죽이고 바로 왕을 피해 미디안으로 피신하는 것과 같이(출2:12) 예수님도 헤롯 왕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을 가도록 하였다. 유대인의 역사에 맞추어 묘사하던 문학 기법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 셋째, ‘나사렛 예수’의 문제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둘 다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로 보고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그들이 본래 베들레헴 사람이라 했기 때문에 그들을 나사렛으로 이사를 시켜야만 했다. 꿈에 갈릴리 지방 나사렛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고 거기로 가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나사렛으로 간 것이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2:23)고 했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하는 말씀이 히브리어로 된 선지서 아무 곳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마태복음 기자가 그 당시 거의 모든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구약’을 읽을 때 히브리어 원문을 읽지 않고, 기원전 200년 경 히브리어 성경에서 희랍어로 번역해 놓은, 70인역이라는 희랍어 번역판을 읽었고, 거기에 따라 이사야 11:1을 완전히 오해한 데서 생긴 실수이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한 구절 중 ‘가지’라는 말의 희랍어가 ‘네제르’인데 마태복음 기자는 그것을 ‘나사렛 사람’으로 잘못 읽었던 것이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뿌리에서 한 ‘나사렛 사람’이 나서 결실할 것이요”로 해석했던 것이다.

6. 동정녀 탄생의 신학적 배경 - 마태복음에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1:23)고 하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이른바 ‘구약’이사야 7:14에 나오는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이 구절도 그 희랍어 번역판 70인역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희랍어 번역판에는 파르테노스라고 하여 ‘처녀’로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원문에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는 ‘알마’였다. 그저 ‘젊은 여자’ ‘젊은 여인’이란 뜻이지 결혼도 안한 처녀라는 뜻이 아니었다.

- 기독교가 희랍화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처녀 탄생이 문자적인 의미로 그 중요성을 띠기 시작한다. 예수를 희랍 고대 신화에 나오는 신처럼 신의 아들로 믿기 원했고, 그런 소원에 따라 예수도 다른 신처럼 처녀 탄생을 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 성령을 체험했다. 이런 일을 최초로 시작한 사람이 바울이다. - 물론 유대인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란 은유적인 의미로 그냥 ‘위대한 분’이라는 뜻이지 희랍사람이 생각하듯 본체론적으로 하나님과 ‘본성’에서 같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 후 한 10여 년이 지나 쓰여진 마가복음에 보면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그의 출생시로 당겨진다. 요한복음이 나타나서는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이 그의 출생 이전으로 올라간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하시고 동시에 그대로 하나님이셨다는 것이다.

-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시작한 처녀 탄생설은 ‘출생 전의 처녀’ 설이었는데, 4,5세기에 와서는 마리아가 아기를 낳을 때 처녀막의 파열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출생 동안의 처녀’설로 되었다가 결국에는 마리아가 아기를 낳고도 계속 처녀성을 유지하므로 일평생 처녀였다는 ‘출생 후 처녀’설 및 ‘평생 처녀’ 설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것이 "동정녀 마리아“설이다. 특히 어거스틴 이후 교회의 중심 교리가 도리 정도로 강조된 동정녀설은 성을 원죄와 연결시켜서 보던 어거스틴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이거스틴은 자기가 젊었을 때 방종의 삶을 살고 사생아까지 가졌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성을 지극히 죄악시했다. 그는 인간이 가진 성욕이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의 일부가 될 수 없다고 보고, 이 성욕이 바로 ‘원죄’라고 규정했다.

- 그는 아담의 죄가 그의 정액을 통해 아담 이후 모든 남성에게 내려와 모든 남성이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야말로 인간에게 씌워진 저주는 ‘아담에게서부터가 아니라 어거스틴에게서부터’라고 할 정도로 어거스틴은 성욕을 가진 모든 사람을 다 죄인으로 만들었던 셈이다. - 죄로 오염된 정자에서 나온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나온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했다. 1827년 난자의 존재를 발견하기 전까지 여자란 남자의 씨앗을 키워주는 토양 정도에 불과하다고 행각했기 때문에 여자의 요소가 자식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았다.

7. 청년 예수 - 일반적으로 이 시기를 예수님의 ‘잃어버린 해’라고 하는데, 후대에 이 부분을 이야기하는 위서가 많이 나타났지만 역사적으로 믿을 것이 못된다. 『도마에 의한 유년기 복음』이라는 것이 있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 5세 경 안식일에 흙으로 참새 여러 마리를 만들었는데 그렇게 안식일을 범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을 듣자, 손뼉을 쳤다. 흙으로 만든 참새가 다 날아갔다는 것이다. 6세 경에는 친구들하고 놀다가 친구가 예수님의 어깨를 흔들었다. 예수님이 화가 나서 “너는 더 갈 수 없을 거다.”라고 말하자 그 아이는 금방 땅에 쓰러져 죽었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병좌 복음서』이 책에 의하면 ‘아카샤’라고 인간역사의 자료가 모두 저장된 하늘의 큰 디스크에다 주파수를 맞춤으로써 예수님의 공생애 전 삶을 재생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대학교를 나오고 그 길로 동양으로 향해 인도 등지를 여행하고, 심지어 중국 변경에서 중국의 현인들과 만나기도 했다는 것이다.

- 그당시 목수 계급은 농사짓는 사람보다 더 하층으로 대우 받았다. 농사지을 땅이 없어서 목공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 성서학자들의 이론에 의하면, 실제적으로 예수님이 요한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 젊은이 예수는 말을 잘 했다. 그가 뭔가를 썼다고 하는 기록은 간음한 여자가 잡혀 왔을 때 땅바닥에다 무엇인가 썼다고 하는 것밖에 없다. 당시 그 지방에서 실제로 글을 읽고 쓸 수 있던 사람이 3퍼센트 미만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예수님이 실질적 문맹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하는 주장도 하지만 확실히는 모르는 일이다.

- ‘뒤집어엎는’과격한 행동도 불사했다는 뜻이다. 또 사회 지도층을 대단히 여기지 않았고, 특히 위선적이고 율법주의 종교 지도자를 신랄하게 욕했다. 이들에 대해서만은 ‘독사의 자식’이라는 등, 그 당시 가장 과격한 욕설도 서슴없지 않았다. 독사의 자식이란 독사가 사탄의 상징인 것을 생각하면 어느 쌍소리보다 더 심한 것이었다.

8. 싸움꾼 예수 - 찬송가 384장부터 420장까지 연속으로 싸우는 노래만 쓰여 있었다.

- 오,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들이여. 정말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로구나. 어디 가서 실컷 싸운다 해도 부디 내 이름을 대지 마시길, 난 너희에게 다시 오지 않으리라.“(『기독교사상』99년12월호 26-29쪽) - ‘싸우는 예수’ - 이는 지난 세월 군국주의 사고방식이 팽배할 때 군국주의적 시각에서 본 예수 상이다.

9. 싸움 말리는 예수 - ‘싸움꾼 예수’처럼 바람직하지 않은 예수 상 중에는 예수님을 오로지 ‘곧 오실 예수’로만 생각하는 것이 있다. 예수님의 ‘현재적’ 측면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것 아닌가, 말하자면 ‘궐석 예수’ 상에 빠질 위험이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10. 예수님을 어떻게 볼까? - 예수님의 죽음 이후 인간의 실존적 한계라는 필연적 상황뿐만 아니라, 처참한 식민지 치하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신음하던 자기의 삶에 새로운 의미와 희망을 불어넣어 준 예수님. 자기에게 ‘구원’의 기쁨, 일종의 ‘빅뱅 체험’을 가져다 주신 예수님, 이런 예수님이 더할 수 없이 귀하고 중요한 분이었기에 이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그 예수님을 선포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선포하던 분’이 이제 ‘선포의 대상’이 된 것이다. 어떤 분으로 선포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에 대한 여러 해석이 등장하게 된다. 이른바 일련의 각이한 기독론의 포물선이 그려지게 된 것이다.

- 그 당시에 있었던 기독론을 간단하게 요약해 보면 첫째, “마라나타 기독론”이다. 재림하실 주님, 구주로 보는 것이다. 강조하는 단어는 바로 ‘주님’과 다니엘 7장 13절에 구름 타고 오실 ‘인자’이다. 둘째, “신인기독론”이다. ‘신인’이란 그 당시 희랍 사회에서는 기사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예수님의 신성을 특별히 강조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것이 반드시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본체론적 의미는 아니었다. 예수님의 이적에 대한 이야기는 이런 기독론을 배경으로 하고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셋째, 예수님을 하나님 ‘지혜’의 현현으로 보는 것이다. 유대인사이에서는 잠언 같은 지혜서에 나오는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로서, 이 지혜에 따라 백성을 가르치는 자가 나타난다고 보았는데, 예수님을 바로 그 분이라 본 것이다. 넷째,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이 바로 수육의 기독론이다. 로고스는 우주의 원리나 이성이라는 뜻으로 ‘지혜’와 비슷하지만, 지혜가 여성적인 면을 강조했다면 로고스는 남성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지혜와 로고스 모두로서의 예수님으로 내려오다가 4,5세기에 이르면 점차 로고스로서의 예수님 상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다섯째, “대속적 기독론”이다.

여섯째,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승리자’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이다. 이 기독론은 특히 핍박으로 죽어 가는 동료 그리스도인을 보면서 더욱 중요한 것으로 굳어졌다. 일곱째, ‘신령한 스승’으로서의 예수님이다. 그 당시 서기관이나 철학자와는 달리 사회 밑바닥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온갖 사람을 골고루 가르치는 위대한 스승으로서의 예수님을 부각하는 것이다. 여덟째, 예수님을 ‘만유의 주’로 보는 것이다. 로마황제 콘스탄틴 시대에 생겨났다. 콘스탄틴이 그리스도를 자기의 수호신으로 받아들인 이후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로마 황제보다 더 위대한 세상의 통치자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 때 이후 예수님은 로마 황제에게만 허용되던 자주색 두루마기를 입은 하늘 제국의 황제로 그려지기 시작하고, 그 하늘 황제를 위한 알현의 장소로서 거대한 성당이 생겨난다.

- 당시 사람의 영적 상태와 지적 능력과 심리적 필요와 실제적 문제와 정치적 여건과 사회적 환경 등에 따라 그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최고의 이해요, 해석 방법이었다. - 기독론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첫째, 당시의 문화적 배경과의 관계에서 생겨났다. 유대교에서 말하는 지혜, 희생양 같은 개념이라든지, 희랍 사상에서 논의되던 로고스 사상, 희랍의 밀의 종교에서 신이 죽었다가 부활한다는 믿음, 신의 아들이나 하늘의 구원자가 지상으로 내려와 인간을 구원하리라는 생각. 둘째, 다양한 생각이 자유롭게 나타나 서로 대화나 변증법적 관계에서 오랜 기간을 두고 자연스럽게 발전해 나온 것이다. 셋째, 우리도 이 시대의 구체적인 역사 맥락에서 우리의 삶과 정황에 의미 있는 방법으로 예수를 다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을 분 아니라 ,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실존적 삶과 직결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하다.

11. 성불하신 예수님 - ‘성불하신 예수님’이란 뜻은 ‘엄청난 종교적 체험’을 갖는 다는 뜻이다.

- 예수님의 이와 같은 성령 체험은, 마커스 보그에 의하면, 부처님의 성불 체험과 맞먹는 일이라고 한다.(그 체험이 동일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신비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들간에 중요한 논쟁거리) - 틱낙한 스님은 교회에서 예수님 상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만 보이는 것은 예수님께 좀 미안한 일이 아닌가 의문을 제기 하면서 예수님도 부처님처럼 좌선하는 모습을 좀 보여주엇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예수님과 부처님은 “인류 역사에 핀 가장 아름다운 두 송이 꽃”이라 하고 이 두 분은 “한 형제”라고 하였다. 부처님이 참선의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 예수님의 성령 체험이나 부처님의 성불 체험은 사실 세계 종교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세계 여러 종교에서 말하는 극히 보편적인 종교적 체험이라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 “자비” 어머니의 태처럼 : 당시 유대 사회는 이런 정결 제도에 지배를 받는 사회였다. 율법을 잘 지키지 않으면 부정한 죄인 취급을 받은 것은 물론, 육체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장애자도 정결하지 못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의로운 사람이라면 축복을 받아 번영하는 게 당연한 일이므로, 가난은 의롭지 못하다는 반증이었다. 제사장에게 나아가 제물을 바치고 다시 정결함을 얻어야만 했다. 예수님은 이런 ‘정결제도’를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같이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 대신에 “하나님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는 말을 하셨다. 히브리어로 자비함이란 ‘어머니의 태처럼 됨’을 의미한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도는 어머니처럼 만물을 낳고, 기르고, 감싸주고, 보살핀다고 하는 말을 연상케 한다. 예수님이 스스로 이런 사람을 만졌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부정해짐도 불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가, 그리고 도의 사람이, “티끌과 하나”가 되고 “흙탕물처럼” 된다고 한 『도덕경』4장과 15장의 말을 연상케 한다.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아!”,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도 하셨다. 누구를 향한 욕인가? 그 당시 자기만 깨끗하다, 자기만 하나님을 바로 안다고 주장하던 집단에 대해서이다.

-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5)(이 말이 예수 자신의 말이 아닐 수 있다는 학자들의 주장을 알면서도 여기다 옮긴다. Funk, The Five Gospels, 241f. 참조. 후대의 삽입이라 하더라도 초대교회의 기본 태도를 말해주는 것)

12. 다석 류영모 선생님의 예수님 - 간디나 류영모는 모든 종교를 초극하는 구경각에 이른 것이다.

- 다석의 기독론에 대해서는 최인식, 『다원주의 시대의 교회와 신학』박영호,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상하권)』김흥호,『십자가와 참말을 모시고 산 유영모의 영성』을 참조 할 수 있다. 13. 함석헌 선생님과 간디 옹과 틱냩한 스님의 예수님 - 스탠리 존스는 간디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지만 역사상 가장 그리스도 같은 사람 중 한 분” 이었다고 했다. - 『살아 계신 붓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귀향: 예수님과 부처님은 한 형제』

14. 참다운 길벗

- 조셉 캠벌에 의하면 영적 모험을 감행한 동서양의 정신적 영웅이 간 길에 대한 여러 영웅담을 종합해보면 거기에는 크게 네 가지 대목이 있다고 한다. ⑴ 집을 떠나는 것 ⑵ 위험의 고비를 넘기는 것 ⑶ 궁극적 목적을 성취하는 것 ⑷ 그리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 이 그것이다. ⑴ 길을 간다는 것은 물론 우선 ‘집을 떠나는 것’이다. 익숙한 것, 인습적인 것, 일상적인 것, 영어로 해서한 것을 뒤로 한다는 정신적인 뜻이 중요하다. ⑵ 이렇게 집을 떠난다 하더라도 어디 분명히 정해진 곳을 향해 가는 것은 아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20) “나 홀로 빈 털털이 같고, 바보 같고, 흐리멍텅한 것 같은가.”(『도덕경』제20장) ⑶ 오로지 영적 영웅, 믿음의 용사만이 이런 위험과 시험을 뚫고 이 길을 계속 간다. “내가 바로 진리라.” 선언할 수도 이고 “천상천하에 나밖에 없다.”고 하는 말도 가능하게 된다. 세상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들이 이르렀던 득도의 경지이다. ⑷ 이런 경지, 이런 상태에 이른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 수가 없다. 남을 위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 조셉 캠벌의 책은 한국 말로는 이윤기,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으로 번역되었다.

❍ ‘지금ㆍ여기’에서의 mission

1. 철수의 어린 시절 - 자기가 거기 태어나서 그 종교인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그 종교가 무조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 지방 KKK 단원들의 태도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차별주의적 태도

2. 어느 신학자의 선교관 - 배타주의에서 : 『하나의 지구 여라가지 종교』와『예수와 다른 이름들』, ‘우리만’ 말슴과 성령을 가지고 있고, ‘그들’은 죄악과 이교주의의 어둠 속에서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 다원주의로 : 불교의 ‘무아’의 가르침을 통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고 한 바울의 말슴을 더욱 의미 있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85년에 나온 그의 책 『다른 이름으로는?』에서 다른 종교가 일방적으로 기독교에 흡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교가 다 같이 협력하여 그 무한한 신비, 그 엄청난 진리를 함께 발견해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닛터의 이런 신학적 변화를 요약하면, 처음 그가 가졌던 ‘배타주의’에서 칼 라너의 ‘포용주의’로 넘어 갔다가 마지막으로 ‘다원주의’에 귀착된 것이다. 1986년 죤 힉과 함께 편집한 『기독교의 독특성이라는 신화: 다원주의적 종교신학을 위하여』라는 책을 냈다.

- 지구적 책임 : 닛터는 1993년 6월에 있었던 북미 원주민 모임에 참석해서 지구와 자연을 신성의 임재로 보는 그들의 경건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반드시 지구의 해방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더욱더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닛터는 최근에 나온 그의 두 책을 통해서, 이웃 종교를 인정하는 것이 결코 기독교 신앙을 희석시키는 일이 아니라는 것, 예수님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계시이지만 ‘유일한’ 계시라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 예수님이 상징적으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힘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선교(사명)라는 것,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생태계와 인간의 안녕’을 증진하는 일이라는 것, 이런 일을 이루는 것은 여러 종교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므로 종교간의 대화가 불가피하다는 것, 따라서 종교간의 대화가 곧 선교라는 것 등을 역설하고 있다.

3. 교회는 강아지 훈련소가 아니다

- 오랫동안 종교학을 강의하신 정대위 박사님이 내게 하신 말씀, “어느 면에서 교회가 많다고 하는 것은 부Rm러워해야 할 일” 초등학교 학생 수가 대학원 학생 수보다 많다고 하여 초등학교가 대학원보다 더 성공적이고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빈 교회가 차라리 머리가 빈 사람으로 가득찬 교회보다 낫다. 빈 교회는 적어도 많은 사람을 끌어모아 그들의 머리를 비게 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예수님이 약속한 쉼은 그가 새로운 종교를 창설하고 그것을 ‘가벼운 멍에’로 씌어주려는 것이 아니라, ‘종교 자체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우리를 얽매는 종교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려고 하는 종교 본연의 목적과 정면으로 상충되는 것 -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필수 조건으로 대략 첫째, 교리의 절대화, 둘째, 획일적인 행동강령, 셋째, 무조건적인 복종, 넷째, 철통같은 소속감과 헌신, 다섯재, 전도열 등을 꼽을수 있다.

4. 하룻강아지 진리 무서운 줄 모른다. - 자기가 진리를 찾았다. 소유하고 있다면서 겁도 없이 떠들고 다니는 사실 자체가 진리에 대해 그가 얼마나 무지한가를 웅변으로 말해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도덕경』, 힌두교의 경전 『캐나 우파니샤드』에도 궁극 진리로서의 브라만은 “아는 사람에게는 알려지지 않고,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알려지는 것”이라고 했다. - 남의 집에 사는 사람이 파놓은 흙무덤이나 약간 뒤적거려 보고, 지구 뿐 아니라 우주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만용을 부리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5. 김칫국 - 누가 천당에 갈 수 있는가?

6. 땅 끝까지?

-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마태복음 28장 19절에 나오는 “너희는 가서……”의 구절은 기원후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전에 기록된 최고의 신약성서 사본들 속에는 이 말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은 이방 전도를 생각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스스로에 대해서도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노라.”(마15:24)고 하고, 제자들에게도 “이방인의 길로도 들어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마10:5)고 했다. 자기 제자들이 “이스라엘 모든 동네를 다니지 못하여서”(마10:23) 세상 끝이 이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신학자 한스 큉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스스로나 그의 제자가 이방 족속들에게 가서 전도하는 일 같은 것은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더욱이 교회 같은 것을 세워 전도본부나 전투사령부 같은 것으로 삼겠다는 생각은 결코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7. 선한 사마리아인과 유마 거사 8. ‘지금ㆍ여기’에서의 mission - 하나님 나라의 건설

-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과 정의와 질서와 평등이라는 하나님의 통치원리가 실현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일차적으로 ‘들어갈’ 대상이 아니라 ‘구할’ 대상이다.

9.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힘쓰는 사람들 -김진홍 목사님의 경우 - 김진홍 목사의 『황무지가 장미꽃같이』(한길사,1999년) - 청계천 활빈교회를 시작하다가 남양만으로 옮겨 두레공동체를 일군 분이다.

10. 메타노이아 - 『장자』제4편에 보면, 유명한 ‘심재’의 이야기가 나온다. - 공자는 자기가 말하는 ‘재’란 바로 ‘마음의 재’라고 한다. 의식구조의 개변을 뜻한다.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여기서 우리말로 ‘회개’라고 번역된 말의 희랍어 원문은 ‘메타노이아’이다. ‘의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민족을 위해 나아가 외치기 전에 반드시 “주의 영이 내게 임하시매” 하는 체험을 했다.

11. 그들도 우리처럼 - 종교간의 대화를 증진시키고 갈등을 해소한다고 해서 모든 종교를 하나로 만들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것은 들판의 모든 꽃을 하나로 만들려고 하는 것처럼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 토인비는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으로, 기독교와 불교가 의미 있게 만난 사건을 곱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 “유교와 기독교의 만남”『기독교사상』(1991년 11월호)와 “깨침과 메타노이아.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기독교사상』(1996년 6월호) 등을 참조

❍ 부록

1. 현각 스님의 책을 읽고 눈물 흘린 까닭은

-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오랜 동안의 번민과 고뇌 끝에 출가하기로 마음먹고 한국에 와서 ‘현각’스님이 되었다. 그 길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인 “진리를 알지니”를 바로 실행하는 길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 왜 우리는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미국화”를 위해 그리 광분해야 하는가? - ‘꼭막힌 기독교’는 유럽이나 미국 동부에서는 보기 드물고, 오로지 미국에서도 교육수준이나 경제상태가 지극히 저급한 남부 일부지역, 그리고 이 지역 출신의 꼭막힌 선교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한국,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일부 피선교지에서나 서식하는 기형적 현상이다.

2. 예수 숭배 - “아직도 교회에 다닙니까?”

- 길희성 교수를 잠깐 소개하면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예일 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다음, 하버드 대학교에서 고려 시대의 스님 시눌의 선 불교 사상으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예수 보살론”이라는 영어 논문도 있다.

- 예수는 너무나도 하나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너무나도 하나님을 닮았다 하여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까지 불렀던 것이다. 이런 예수지만 그는 결코 사람들에게 자기를 믿으라고 하지 않았으며,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면서 자기를 선하다고 부르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마가10:18). 예수는 또한 인간을 지극히 귀히 여기고 사랑한 사람이다. - 예수께서 현대 세계에 사셨다면,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 외에 자연 사랑의 계명을 추가하셨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이와 같이 예수께서 보여주신 진정한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람으로 파악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 일만에 부활하셧다는 신화 같은 이야기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의 신앙 이해와는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하나님보다 자기들의 종교전통과 기득권을 더 사랑하고 인간보다 율법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처형당한 것이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자취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죄 없는 자기 아들로 하여금 우리들의 죄 값을 대신 치르도록 한 연후에야 비로소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는 계산적 하나님, 대가를 요구하는 야박한 하나님이 아니다. 북한과의 관계 속에서 상호주의를 고집하는 식의 하나님이 아니다. 전통적인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과 상호주의를 고집하다가 인간 측에서 도저히 그 엄청난 죄 값을 치를 방법이 없으니까 하나님 쪽에서 자기 아들로 하여금 대신 형벌을 받게 하고 인류의 죄를 용서했다는 얘기인데, 이거 병 주고 약 주는 식 아닌가?

-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구원이 되는 이유는 우리도 예수와 같이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함으로써 우리 자신 십자가의 길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이지, 우리와는 무관하게 2000년 전 저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어느 한 사건 때문에 온 인류가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황당무계한 논리 때문이 아니다.

3. “오강남 칼럼을 읽고”를 읽고 - 반박에 대한 대답

❍ 참고 문헌 1. 민영진. 『성경 바로 읽기』서울. 기독교서회, 1999. 2. 오강남. 『도덕경』서울. 현암사, 1995. 『장자』서울. 현암사, 1999. 3. 조태연 외. 『뒤집어 읽는 신약성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 찾기』(서울.기독교서회, 1999). 4. 크리스쳔 아카데미 편. 『열린 종교와 평화 공동체』.서울. 대원출판사. 2000. 5. 틱냩한. 『살아 계신 붓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오강남 옮김. (서울. 한민사, 1997).『귀향: 예수님과 부처님은 한 형제』오강남 옮김. (서울. 도서출판 모색,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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