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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슈나이더,박종대/을유문화 3.19.1716 서울집에서



❍ 비참한 패배자들

3. 골리앗, 베르블링거, 스미스 선장 - 호언장담형의 세 사람

- 구약성서 사무엘상에 기록된 다윗의 영웅적 행위에는 또 다른 그늘이 드러워져 있다. 사무엘하에는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이 아니라 그의 용사 엘하난이 죽인 것으로 되어 있다(사무엘하 21장 19~21절).

- 타이타닉호의 자매선 올림픽호가 영국의 순양함 호크호와 해상에서 충돌했을 당시에도 올림픽호의 키를 쥐고 있었던 사람은 스미스 선장이었다. 그는 실수를 두 가지나 저질렀다. 배에다 탐조등을 설치하지 않았고, 최소한 망원경이라도 갖춘 망대를 설치해야 했는데 그것도 등한시하였다. 탐조등은 이미 오래전부터 영국의 모든 군함에 필수적으로 부착되어 있었다. 하지만 상선들은 항해등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출항과 참사 사이의 4일 동안에도 스미스 선장은 세 번째와 네 번째 실수를 저질렀다. 우선 신참 선원들은 구명보트 대원에 배치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을 어겼다. 구명보트 조작에 서투른 신참들이 구명 작전에 투입됨으로써 두 시간 반이라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20척의 구명선을 잔잔한 수면 위에 전부 띄우지 못했다. 두 척은 마지막 순간까지 대빗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야간에는 돛대 위의 망대에 있는 두 명의 선원만으로는 혹시 모를 빙하의 위험을 충분히 감지할 수 없다는 항해상의 일반적인 경험칙도 어겼다. 가장 치명적인 실책은 최고 속도로 무섭게 질주한 것이다. 지난 14시간 동안 다른 선박들로부터 빙하가 해상에 떠다닌다는 경고를 다섯 차례나 분명히 받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충돌 40분 전에도 그러한 경고를 받았다. 그는 여섯 번째 실수를 저질렀다. 일등석의 가장 지체 높은 승객들을 찾아가 한껏 격식을 갖춘 채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그 다음에야 무전실로 향했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것이라는 보고를 들은지 11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곧이어 그는 마지막 실수를 저지른다. 이 실수의 결과는 빙하 충돌 경고를 무시한 것만큼이나 참담했다. 정원에 훨씬 못 미치는 구명정을 구비해 놓은 것이 더 큰 참사를 키웠지만, 이것만큼은 예외적으로 스미스 선장의 책임이 아니었다.

- 『타이타닉호의 불행한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 배가 침몰할 때까지 잇달아 실수를 저질렀다. 갑판에 탐조등과 망원경을 설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야간에 빙하 충돌 위험이 있을 때에는 일반적으로 다섯 명의 인원을 배치해서 해상 감독을 맡겨야 하는데, 규정을 무시하고 두 명만을 망대에 배치하였다. 또한 빙하 충돌 가능성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였고, 미숙한 구조 작전으로 구명보트에 빈자리를 남겨둠으로써 467명을 더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 “여자와 아이들을 먼저 태워!” 스미스 선장은 자신이 내린 이 두 가지 지시가 결과적으로 막대한 혼란을 부채질하고, 어이없는 피해를 키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장이 직접 밧줄을 푼 두 번째 구명정에도 65명 정원에 37명밖에 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남성들은 타고 싶어도 애초에 탈 수가 없었고, 여성들은 섬뜩해 보이는 어두운 바다로 내려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타이타닉호의 참사에서 마지막까지 목숨을 구한 사람은 구명정의 정원인 1,178명에 훨씬 못 미치는 711명에 불과

4. 멕시코의 막시밀리안 황제 - 황제가 되기에는 너무나도 변변찮은 사람

- 1273년 독일 선제후들이 함스부르크가의 루돌프 백작을 왕으로 선출한 이후 이 가문에서는 독일 왕 5명, 독일 황제 17명, 스페인 왕 3명, 보헤미아 왕 2명, 헝가리 왕과 카스티야 왕이 각각 1명씩 배출되었다. 그 중에는 멕시코를 정복한 스페인의 카를 5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 영광스러운 패배자들

5. 롬멜 - 경탄과 환호, 그러나 결국엔 죽음

- “우리 부대원들은 이 전투를 통해 단지 고향의 안전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 기갑군단의 전통을 수호해야 한다.”

6. 체 게바라 - 열대우림의 피투성이 구세주

- 장 폴사르트르는 그를 가리켜 “우리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 불렀다. 지금껏 지구상에서 그렇게 철저히 강탈당한 것에 그렇게 엄청난 열정과 의지력을 쏟아부은 사람은 없었고, 그렇게 잔인했음에도 그렇게 많은 동정을 받은 인물도 없었다.

- 게바라는 양친에게 편지를 썼다. ‘말라비틀어진 늙은 말의 등에 몸을 싣고’ 다시 떠나야 한다고.

- 그는 두려움을 즐겼고, 두려움과 맞서 싸우는 것을 사랑했다. 또한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권력도 사랑했다. 그 밖에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한 가지 확고한 생각이 있었다. 지구상 어디라도 불의로 인해 고통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로 직접가서 함게 고통을 나누어야 하고, 그들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 군대의 전체 지휘권만큼은 자신이 맡아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하자, 볼리비아군의 지도자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캠프를 떠나 버렸다. -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깊은 곳에서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 “나는 삶을 떨쳐버릴 수 없는 습관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게바라의 게릴라대원들은 11개월 동안 밀림 속에 머물며 정처 없이 이리저리 쫓겨 다녔다.

- 밀림에서 전 세계 인민들을 향해 메시지를 보냈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 “미국을 향해 전면전을 펼쳐라. 제2, 제3, 아니, 더 많은 베트남이 나올 때까지 적의 심장부에 증오와 피와 죽음의 화살을 꽂아라!” 그 사이 네 명의 대원들이 도망을 쳤고, 46명이 매복한 적의 총탄에 맞아 차례로 쓰러졌다. 이윽고 사령관에게 최후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는 단 여섯 명밖에 남지 않았다.

- “쏘지 마라! 나는 체 게바라다. 죽이는 것보다 살려두는 것이 더 가치가 있을 것이다.” 게바라가 목숨을 구걸한 것처럼 비친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다른 데 있었다. 전 세계 인민들이 지켜보는 재판정에서 미제국주의와 쿠바의 ‘새로운 인간’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자 했다. 그것이 마지막 희망. - 볼리비아 정부는 미국의 정치고문단과 미국중앙정보국(CIA)과 긴밀히 협의한 끝에 게바라의 마지막 의도를 눈치채고 기겁을 한다. 공연히 재판을 진행했다가 문제가 꼬이면 큰일이기 때문. 게다가 볼리비아에는 사형 제도가 없었다. 결국 볼리비아 정보는 게바라를 비밀리에 처형하기로 결정.

- 죽음과 함께 제3세계의 독재자들과 서구의 수많은 정부들이 가졌던 희망, 즉 세계의 골칫거리가 이제야 사라졌다는 안도감은 급속히 실망으로 바뀌어갔다. 게바라는 살았을 때보다 오히려 죽어서 더 큰 인기를 얻었기 때문

- 사람들은 그를 경탄하고 부러워했다. 그런데 이 휘황찬란한 영웅조차도 끝내 패배에 이르자 그들은 그를 숭배함으로써 자신들이 직접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대신했다. 게바라는 이 세계에 비해 너무나 선한 모든 사람이 결국 악한 세상 때문에 맞아 죽고 마는 것을 몸으로 증명해주었다.

- 게바라 붐에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인간 세상에서는 예부터 영웅이되려면 ‘실패와 요절’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했는데, 게바라 역시 이 두 조건을 모두 충족시켰다.

7. 고르바초프 - 다른 민족은 해방시켰지만 정작 자신의 제국은 잃어버린 남자

- 소비에트 정치국원이 공식석상에서 미소를 짓고, 한 번에 계단을 두 개씩 뛰어올라가는 모습은 당시 런던과 전 서구 사회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 그는 마거릿 대처 수상의 관저는 찾아갔으면서도 정작 런던에 있는 마르크스의 묘소는 방문하지 않았다.

- 레닌, 스탈린, 흐루시초프, 브레주네프, 그리고 건강이 허약한 안드로포프, 체르넨코의 후임자가 되었다.

- 고르바초프 서기장에게 걸림돌이 되는 인물이 있었다. 다섯 명의 서기장 밑에서 28년 동안 외무장관을 지낸 안드레이 그로미코였다. 흐루시초프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그로미코 그 친구는 뭔가 명령을 내리면 몇 달 동안 꿈쩍도 않고 얼음덩어리 위에 앉아 있을 사람이야. 바지도 내린 채 말이야.” 결국 고르바초프는 그로미코를 외무장관에서 밀어낸 뒤 허울만 좋고 실권은 없는 소비에트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에 임명

- ‘알코올 중독 퇴치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펼쳐 나갔다. 이 정책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서민들의 따뜻한 벗이라 할 수 있는 보드카의 가격을 급격히 올려 버렸다. 서민들은 격분했고, 밀주가 성행했으며, 가짜 알코올을 먹고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서구에서 그의 인기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높아갔지만 동구에서는 점점 시들해져 갔다.

- 헬무트 콜 독일 수상은 크렘린의 새 지도자가 서구 사회를 향해 던진 미소와 긴장완화의 메시지에 불신을 품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홍보가 뭔지 아는 사람입니다. 나치의 괴벨스도 그랬지요.” 레이건 대통령 역시 고르바초프에 대한 의구심을떨치지 못했다. 그래서 레이캬비크에서 고르바초프와 만났을 때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군축 협상안을 단호하게 뿌리쳣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이런 군축 제의로 독일 평화 운동의 우상이 되었다.

- 고르바초프는 이 구실 저 구실을 대며 특권층의 권력 기반을 흔들고, 그들의 영향력을 조금씩 축소해 나갔다. 공산당 간부들의 비위가 상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세계는 고르바초프가 무너지지 않는 것을 오히려 경이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 고르바초프는 1990년 1월 1일자 『타임』지에 1980년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뽑혔다. 『타임』지가 10년 단위로 인물을 뽑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타임』지는 표지 기사에서 고르바초프를 가리켜 “마법사, 슈퍼스타, 계산된 무질서의 관리자, 천재적 정치인, 세계의 조종사”라고 부르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부터가 내리막길

- 소련 군부는 서기장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뻐하지 않았다. 서방 세계가 미국과의 군비 경쟁에서 전 패배자에게 내린 선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고르바초프는 최소한 소비에트연방만큼은 존속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변화된 틀 속에서 연방을 유지할 수 있는 여러 모델들을 제시하며 그 방법을 찾아 나가고자 하였다.

- 보리스 옐친의 주선으로 1991년 12월 8일 러시아공화국, 벨로루시 공화국, 우크라이나공화국의 세 대통령이 벨로루시의 소도 민스크 근방 별장에 모여 소비에트 연방의 종식을 결의했다. - 고르바초프는 이 협정을 무효로 선언했다. 소비에트연방은 세 공화국 대통령의 합의만으로 해체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15개의 소비에트공화국들 가운데 11개국이 옐친과 독립국가연합을 지지하고 나서자, 옐친은 12월 12일 러시아공화국을 독립국가로 선포

- 소련의 전 외무장관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도 고르바초프에게 전적인 책임을 돌렸다. 우유부단한 면모,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미꾸라지 성향, 그리고 자신이 해방시키고자 했던 대중에 대한 불신이 제국의 붕괴를 불렀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르바초프는 한 번도 국민투표를 받아들이지 않을 만큼 대중을 믿지 않았다. 보리스 옐친이 1991년에 과감하게 국민투표를 실시해서 57퍼센트의 득표율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과 대비되는 부분

- 어떻게 지난 6년 동안이나 거대한 관료기구와 맞서 그렇게 힘든 과업을 성취해냈을까? 소련공산당에 정면으로 맞섰고, 70년 전부터 오랜 관행처럼 내려온 당간부들의 특권을 과감하게 박탈하였으며, 그런 와중에도 군부를 손아귀에 꽉 틀어쥐고 있었다. 이것은 셰바르드나제가 고르바초프의 결점으로 지적한 미꾸라지 성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타임』지가 “계산된 무질서의 관리자”라고 찬사를 보낸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 고르바초프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붕괴되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도 심각한 내홍을 겪거나 강대국들끼리 무력충돌을 벌였을지 모른다. 어쨌든 고르바초프라는 사람이 있었기에 소련 주민들을 포함해서 전 세계인들이 끔찍한 유혈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 그가 훗날 자책했던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인민학교 시절에 가입했던 공산당에 너무 깊이 마음을 주는 바람에 공산당의 개혁성을 철석같이 믿었다는 사실이다.

- 고르바초프가 서구 사회에 측은한 인상을 주는 이유는 이것만이 아니다. 두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보편적인 영웅담에 익숙한 우리는 승리자를 좋아한다.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은 비록 좌절했지만 영웅적으로 스러져간 인물들이다. 두 번째 이유는 이렇다. 후세의 역사와 사후의 명성을 생각했다면 그는 이미지를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초라하게 자신의 입장이나 변명하는 책을 써대는 바람에 오히려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게다가 1996년에는 러시아 대통령 후보로 나와 0.5퍼센트의 득표율밖에 거두지 못하는 수모를 당했다. 서구에서 그는 이제 돈벌이를 위해 강연이나 다니고, 제막식 행사에 불려 다니고, 기념식이나 축하 행사에 구색 갖추기용 하객으로 초청받는 사람 정도로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나폴레옹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영국인 승리자들이었다.” 그들은 나폴레옹을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 보냄으로써 오히려 전설을 만들어주었다.

- 승리자들의 원래 의도대로 나폴레옹의 사후 명성에 먹칠을 하기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무인도로 보내지 말고 진수성찬을 차려놓은 향연에 초대해야 하지 않았을까?

❍ 승리를 사기당한 패배자들

8. 라이너 바르첼 - 코앞에서 수상 자리를 놓친 사람

9. 앨 고어 - 선거에 이기고도 대통령이 되지 못한 사람

- 검표기의 오작동, 헷갈리는 투표용지로 인한 유권자들의 기표 실수, 공화당 운동원들이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온갖 불법들, 그리고 심지어 11월 23일에 일어난 폭력 행위조차 모두 땅속에 묻히게 되었다. 부시는 공식적으로 플로리다 주에서 537표의 우세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마 고어가 몇 천 표는 너끈히 앞섰을 것이다. 아홉 명의 대법관 중 한 명만 더 고어 손을 들어주어 정상적으로 재검표가 실시되었더라면 말이다.

- 미국 법학과 교수 554명은 『뉴욕타임스』에 광고 기사를 실어 이보다 더 극명하게 대법관들을 비난하였다. 다섯 명의 판사가 재검표를 중지시켰을 때 그들은 더 이상 법관이 아니라 부시 후보의 지지자였다.

- 대통령 후보가 되고자 할 때부터 자신의 야망을 위해 무슨 일이든지 다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사실 도덕적으로 대통령직에 오를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 아이젠하워는 공화당의 바람대로 상대 후보에 압승을 거두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젠하워가 대통령 자리에 앉아 예의 그 매력적인 미소를 짓는 것 말고는 하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그조차도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아이젠하워는 정사를 주로 부통령인 닉슨과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 그리고 셔먼 애덤스 비서실장에게 넘겼다.

- 스티븐슨은 ‘우아한 독설가’로도 유명했다. “공화당에 제안을 하나 하겠다. 만일 그들이 우리와 관련한 거짓말을 유포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도 더 이상 그들과 관련한 진실을 말하지 않겠다.” 그는 두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아이젠하워를 상대로 44퍼센트와 42퍼센트라는 놀라운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 왕좌에서 쫓겨난 패배자들

10. 메리 스튜어트 - 참수당한 ‘음모의 여왕’

- 1542년 메리는 세상에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스코틀랜드의 왕좌에 앉았다. 부친이었던 스튜어트왕가의 제임스 5세가 서른 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는 숙부인 헨리 8세의 잉글랜드 침략군에게 참패를 당한 뒤 쓰러져 정신이상에 빠졌었다. 메리는 생후 6개월에 계약결혼을 했다. 스코틀랜드의 섭정자가 메리를 헨리 8세의 아들이자 왕위계승자인 여섯 살짜리 에드워드와 결혼시키기로 약속을 한 것이다.

- 6개월 뒤 한 살이 된 메리 스튜어트는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 계약이 결국은 남쪽의 이웃나라 잉글랜드에 예속되는 것을 의미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 맺은 계약을 파기한 것이다.

- 스코틀랜드 자체도 깊은 분열 속에 빠져있었다. 영어가 스코틀랜드의 상류층사이에서 서서히 퍼지면서 켈트어는 북부 고지대로 밀려 나고 있었다. 두 번째는 귀족 대지주와 소작인 ㆍ소농ㆍ도시 빈민들 사이의 계층적 갈등이었다. 세 번째는 가톨릭과 칼뱅파의 종교적 분열이었다. 두 종파 모두 헨리 8세의 영국국교회(영국성공회)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 스코틀랜드에서는 의회가 칼뱅파를 국교로 승격시켰고, 이에 격분한 가톨릭교도들이 들고일어나 내전에 버금갈 만한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더구나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이단자로 간주되었음에도 2년 전에 잉글랜드 여왕으로 등극한 엘리자베스 1세가 스코틀랜드의 칼뱅파를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실정이었다.

-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은 무효였고, 엘리자베스는 사생아였다. 따라서 잉글랜드의 왕위는 당연히 헨리 7세(헨리 8세의 부친이다)의 증손녀인 메리 스튜어트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가톨릭 측의 생각이다.

- 스코틀랜드의 새 여왕이 된 메리는 국내의 칼뱅파들, 특히 그 중에서도 막강한 대지주 계층과 투쟁을 시작했다. 뚜렷한 목표의식과 유연한 전술은 퍽 돋보였다. 메리 여왕은 강력한 적대자인 존 녹스를 초청해서 자부심과 재치와 경건함으로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고, 동시에 칼뱅파 지지자들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용하는 아량을 보였다. 다른 한 편으로는 윈스턴 처칠이 영어권 민족의 역사를 다룬 책에서 썼던 것처럼 ‘감정과 정치를 분리시키지 못한 메리의 무능력함’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메리에게는 경쟁자인 엘리자베스 여왕이 갖고 있던 자제력이 부족했다. 또한 신하와의 재혼이라는 신중치 못한 결정을 내리는 바람에 귀족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 단리 백작과의 결혼이 가톨릭 의식으로 진행되자 스코틀랜드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칼뱅파가 다시 봉기를 일으켰다. - 왕의 신분이었던 단리는 비밀리에 칼뱅파를 지원한 사실과 왕의 지위를 평생 보장해 달라는 요구로 메리의 분노를 샀다. - 3월 28일 보스월 백작이 이끄는 2,000명의 기병대가 반란군을 진압했다. 8개월도 지나지 않아 새로 태어난 왕자의 아버지인 단리 백작이 에든버러 외곽의 한 영지에서 교살된 채 발견되었다. - 보스월 백작은 자신이 속해 있던 왕실 추밀원에까지 출석해서 자신을 변호해야 했고, 결국 무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보스월은 1567년 5월 3일 첫 번째 아내와 이혼했고, 메리 스튜어트는 5월 15일 그를 남편으로 맞아들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새 남편을 스코틀랜드 왕에 책봉하지 않고 오크니 앤드 셰틀랜드 공작에 임명하였다.

- 전남편이 죽은지 이제 겨우 4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남편의 살해범으로 의심까지 받는 사람을 새 남편으로 맞았으니 누가 이 결혼을 축복하겠는가! 게다가 보스월은 가톨릭 결혼식을 거부하는 프로테스탄트였다.

- “내 반드시 다시 돌아와 이 나라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메리는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다.

- 이후 메리는 19년 뒤 처형을 당할 때까지 다시는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 대다수가 가톨릭교도로서 남부의 프로테스탄트 신흥 부자들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있던 잉글랜드 북부의 대지주들이 메리를 잉글랜드 왕위에 앉힐 목적으로 엘리자베스에 대한 반란을 모의했던 것이다.

- 시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시동생인 프랑스의 앙리 3세로부터 자신의 아들을 스코틀랜드 왕으로 옹립해서 왕권을 아들과 나누라는 권고를 받은 것이다. 모의는 사전에 발각되었다. 메리가 스페인의 힘을 빌려 잉글랜드를 칠 계획이었음을 증명해주는 편지들이 발각되었다. - 제임스가 어머니의 목숨보다 왕권에 더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그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어머니의 처형을 받아들이는 대신 엘리자베스가 죽으면 잉글랜드의 왕으로 삼겠다는 조건

- 카톨릭계는 분노했고,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이듬해에 무적함대를 잉글랜드로 출정시켰다. -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 1707년 두 나라는 마침내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통합되어 그레이트브리튼을 구성하였다. - 메리가 승리를 거둘 수 없었던 것은 오히려 욕망을 절제하게 만드는 냉철한 목표 의식과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더라도 어차피 소국의 스코틀랜드는 거대하고 탐욕스러운 잉글랜드에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11. 루이 16세 - 어떻게 그리 사랑스러운 인간이 단두대의 제물이 되었을까?

- 루이 16세(1754~1793)는 선량하고 검소하고 악의가 없는 성품인 동시에 줏대가 없고 약간 게으르고 정신적으로 편협한 사람이었다. - 아버지를 포함해서 두 명의 형이 너무 일찍 숨을 거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열한 살 때 루이 15세의 맏손자로서 갑자기 프랑스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열네 살 막내딸과 결혼을 시켰다. 그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 주인공이다.

- 루이 16세는 즉위하자마자 호사스러운 궁중생활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절감시켰다. 흐릿하던 머릿속이 갑자기 탁 트이기라도 했는지 유명한 국민경제학자 안느 로베르 자크 튀르고를 재정총감에 임명하였다. 게다가 농민들의 부역을 줄이고, 길드의 강제 가입제도를 폐지하며, 지방에 자치권을 부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조정 신료들과 귀족, 그리고 성직자들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루이 16세는 이들의 압력에 밀려 직위에 오른지 채 2년도 안 된 재정총감을 해임하였다.

- 프랑스 사람들은 앙투아네트를 극도로 싫어했다. 그들은 지엄한 왕비를 아무 호칭 없이 그냥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칭할 정도로 경멸했을 뿐 아니라 낭비나 일삼는 정신 나간 여자에다 왕을 사악한 길로 인도하는 요부 정도로 생각하였다.

- 삼부회가 소집되기 직전 루이 16세는 생애 세 번째로 진보적인 결정을 내렸다. 물론 그는 이 결정이 단두대로 향하는 첫걸음이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제3신분인 시민 계층의 삼부회 대표단 수를 두 배로 늘리는 결정을 내렸다.

- 루이 16세는 무장병력을 곳곳에 배치한 상태에서 1,200명의 삼부회의원들을 모두 소집했다. 그러고는 두 봉건 신분의 압력에 밀려 제3신분이 결정한 ‘세금특혜 철폐안’을 무효로 선언하였다. 튀르고 재정총감이 해임된 데 이어 역사적 흐름을 거꾸로 돌리는 두 번째 결정이었다. 하지만 제3신분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합당한 세금만큼은 부과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시민 대표들은 거부하고 자리를 뜨지 않았다. 궁정의전관이 와서 국왕 폐하의 명령을 듣지 못했느냐고 묻자 제3신분의 대변인격인 미라보 백작이 나서서 일장연설을 했다. “당신을 이리로 보낸 사람들에게 가서 전하시오. 우리는 지금 백성들의 뜻에 따라 여기 있는 것이고, 총칼이 아니면 우리를 여기서 끌어낼 수 없다고 말이오.” 이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 문장이다. 왕이 구세력이 아니라 신세력에게 겁을 먹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국민의회 의장이자 국민의회에 의해 파리 시장에 임명된(사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파리 시장의 임명권은 당연히 국왕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장 실뱅 베일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왕에게 제3의 길을 제시했다. 파리로 오라는 것이다. - 베일리 시장이 삼색으로 이루어진 혁명 리본을 달아주었다. 하얀색은 프랑스, 푸른색과 붉은색은 봉기를 일으킨 파리에 바치는 색이었다. 왕이 이 리본을 순순히 달았던 것은 새로운 세력에 대한 두 번째 패배를 의미했다.

- 국민의회는 왕에게 이 선언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왕의 참모들은 차라리 국왕친위대가 주둔하는 메스로 두주해서 군사를 일으키자고 권했다. 루이는 또 머뭇거렸다. 하지만 결국 세 번째로 새로운 세력에게 무릎을 꿇고 인권선언에 서명하고 말았다.

- 마리 앙투아네트가 급히 왕에게 달려가 이제는 정말 도망을 치든지 아니면 싸우든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다그쳤다. 그러나 이번에도 왕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고, 그래서 또 때를 놓치고 말았다.

- 1791년 4월 온건파의 대부 미라보 백작이 죽고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급진 성향의 자코뱅당이 권력을 잡자 국왕 부부는 마침내 도주하기로 마음먹었다. - 루이 16세가 체포된 직후 국민의회에 편지를 보내 왕은 잘못이 없고 자신이 왕을 납치한 것뿐이었다고 밝힌 것이다. 사태 확대를 바라지 않던 국민의회로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의회는 형식적으로 왕을 조사한 뒤 무죄 석방하였다. 국민의회는 격렬한 논쟁 끝에 왕의 다른 권한은 전부 박탈하지만 의회 결정에 대한 거부권은 인정하기로 결론을 모았다.

- 망명객들을 제재하는 법률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법안 내용은 이랬다. ‘1월 1일까지 프랑스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은 전 재산을 몰수하고 목숨도 보장하지 않는다.’ 두 번째 거부권은 성직자 계급에 관한 법안이었다. ‘성직자들도 이제 일반 국민으로서 법과 종교의 자유를 존중하겠다는 맹세를 해야 한다. 만일 이 맹세를 하지 않는 사람은 반역 혐의가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루이 16세는 이 두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새 헌법하에서 구체제 기득권자들을 옹호하는 반둥으로 몰렸고, 그와 함께 그의 몰락도 한층 가시화되었다.

- “나는 두렵지 않다. 교회의 성사는 모두 마쳤다. 그러니 그대들 마음대로 하라!” 루이 16세의 인생에서 가장 군왕다웠던 순간을 들라면 아마 이 두 시간이었을 것이다. - 국민공회는 387:334로 단두대의 처형을 확정지었다.

12. 빌헬름 2세 : 어떤 패배자도 그처럼 무기력하게 무너지지는 않았다

- 빌헬름은 충동적이고, 끈기가 없고, 생각과 일에서 무절제하고, 그저 다방면으로 관심만 많고, 신하들을 선택하는 것도 서툴고, 측근의 귀엣말에 쉽게 혹하고, 교만함을 숨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입이 간지러워 견디지를 못하는 사람이었다. 즉흥 연설로 청중의 감동을 이끌어내는 명연설가였다. 그런데 독일의 역사가 골로 만의 지적처럼 바로 이러한 기고만장하고 거침없는 연설이 글로 인쇄되는 순간 외교적 재앙이 되었다. 빌헬름 황제의 인터뷰나 전보도 마찬가지였다.

- 독일의 마지막 황제는 세계사의 위대한 패배자들 가운데에서 두 가지 기록을 세웠다. 첫째, 한창 강대국으로 융성하던 제국을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잃어버린 지도자는 없었다. 러시아의 차르와 고르바초프도 제국을 잃었지만, 그들이 잃은 것도 이미 오래전부터 휘청거리고 있던 제국이었다. 둘째, 패배한 뒤에도 반감과 물질적 걱정, 절망과 부끄러움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살았던 사람은 없었다.

❍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몰린 패배자들

13. 요한 슈트라우스 - 아들에 가련진 아버지,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위해 바이올린을 켰지만 결국 아버지가 패배했다.

- 요한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는 했지만, 아들에 대한 질투심으로 찢기고 지친 나머지 마흔다섯 나이에 에밀리에

트람푸시라는 여자의 초라한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이 여자와의 사이에서 다섯 명의 자식을 두었다.

14. 하인리히 만 - 동생에게 짓밟힌 형, 토마스 만의 그늘에 가려 살아야 했던 고통

15. 렌츠 - 괴테에게 발길질당한 천재 작가, 미워하기에는 너무 재능이 뛰어난 사람

16. 라살 - 마르크스에게 눌린 패배자, 노동운동의 메시아

- 열렬히 사모하는 여인을 얻으려고 그 여인의 스무 살 약혼자에게 결투를 신청했다가 목숨을 잃고, 세계적인 명성조차 마르크스에게 빼앗긴 한 남자가 있다. 페르디난트 라살이다.

- 라살은 600명이 되는 대의원들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은 건립해야 할 교회의 반석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노동자들은 열광했고, 라살은 몇 차례 형식적인 고사 끝에 ‘전독일 노동자동맹’(독일 사민당의 전신이다) 총재직을 수락하였다. - 라살은 사회주의를 이론이라는 감옥에서 해방시키고 대중에게 상품화하는 비결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사회주의에 토대를 둔 첫 노동자 정당도 창건할 수 있었다.

- 마르크스는 라살의 성공을 접하고 분노를 금치 못했다. 자신은 이제껏 그렇게 대중적인 관심을 한 몸에 받은 적이 없었는데, 그 한량 같은 인간은 화려하고 열정적인 연설로 단번에 대중을 휘어잡았으니 억울할 만도 했다. -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서신 교환을 보면 노동자들을 ‘황소’, ‘혹’, ‘어리석은 당나귀’라고 지칭하는 대목들이 나오는데, 특히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을 만나면 현란한 수사학으로 그들을 징치했다는 사실을 엥겔스에게 자랑삼아 늘어놓기도 했다. - 그가 죽은 지 26년 뒤, 마르크스가 죽은 지는 7년이 흐른 1890년 라살은 그해에 출간된 마이어 대백과사전에서 마르크스보다 세 배나 더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 마르크스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것은 레닌이 마르크스주의를 소련공산당의 이념적 토대로 천명한 1917년 이후였다. 1919년에 독일공산당을 창당하자 이제 사회민주당내에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이끄는 우파만 남게 되었다. 이후 사민당은 여성 참정권까지 보장하는 만인의 평등 선거권을 쟁취하고, 강령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포기함으로써 라살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17. 트로츠키 - 스탈린에게 쫓겨난 패배자, 10월 혁명의 열혈한

- 브론슈타인은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트로츠키라는 이름으로 위조 여권을 사용해서 도망쳤는데, 그 뒤부터 이 이름을 혁명가로서 자신의 가명으로 사용하였다. - 트로츠키는 1879년 11월 7일 우크라이나의 한 마을에서 비교적 풍족한 유대인 농부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 1906년 10월 트로츠키는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누리며 전 러시아제국에서 유명인사로 부상하였다. 그 무렵 레닌은 거의 6년 동안을 외국에서 생활하며 사회주의 사상가들 사이에서만 알려져 있었고, 스탈린은 아직 카프카스 사회주의 조직의 하급 간부에 불과했다.

- 한 오스트리아 장관이 러시아 혁명의 전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누가 혁명을 한다고요? 설마 첸트랄 카페에 죽치고 있는 그 트로츠키라는 사람은 아니겠죠?” - 1912년 프라하에서 레닌이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다수파를 ‘볼셰비키’라 부르며 독자적인 당을 선포하자 노동자 운동 진영은 분열되었다. 트로츠키는 이러한 분열 행위에 격분해서 레닌의 ‘더러운 음모’를 소리 높여비난하였다.

- 트로츠키는 마차를 타고 가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제1인터내셔널이 창설된 지 반 세기가 지났건만, 전 세계 인터내셔널 회원들을 다 모아도 마차 네 대면 충분하구나!”

- 캐나다와 영국 당국이 몇 차례 억류를 하는 바람에 덴마크와 핀란드를 거쳐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것은 1917년 5월 17일이었다. 레닌보다 한 달이 늦은 시점이었다. 이것이 혁명 전선에서 타고난 연설가인 트로츠키가 은밀한 전략의 달인 레닌에게 한 걸음 뒤지게 된 요인이 되었다. 레닌은 트로츠키에게 볼셰비키에 입당해서 당을 이끌어줄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거절했다. 이 행동은 당 간부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축소시켰을 뿐 아니라 많은 옛 동지들이 트로츠키를 불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레닌과 벌인 경쟁에서 트로츠키에게 불리하게 적용한 두 번째 요인이었다.

- 볼셰비키 기관지 『프라우다』(러시아어로 ‘진실’이라는 뜻)의 편집장이던 스탈린이 처음으로 전면에 등장하였다. 트로츠키는 감옥에 있으면서도 투쟁을 촉구하는 글을 『프라우다』에 연재했고, 이를 계기로 볼셰비키당에 정식으로 입당하였다.

- 트로츠키는 약 5,000명의 노동자 군대로 1억 5천만의 제국을 완전히 뒤엎어버렸다. 핀란드에서 급히 귀국한 레닌은 인민위원회 정부를 구성하고 트로츠키를 외무장관에 임명하였다. 적군의 지휘관은 트로츠키는 어떻게 혁명에 성공하고도 권력을 쥐지 못했을까? 첫째, 트로츠키는 불 같고 격정적이면서도 예측 가능한 사람이었다. 음모와 계략에는 문외한이었고, 레닌처럼 개인적인 권력욕에 사로잡히지도 않았다. 둘째, 트로츠키는 대중과 프롤레타리아의 지지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지만, 그것은 중앙권력에서는 부차적 요인이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당 간부들의 지지였다. 레닌은 그 사이 당 간부들을 육성해서 지지 세력으로 만들어놓았다.

- 1918년 레닌은 수병들을 동원해서 2개월 전에 헌법을 기초할 목적으로 선출된 인민대표자회의를 무력으로 해산시켜 버렸다. 볼셰비키는 고작 24퍼센트밖에 얻지 못한 반면 케렌스키가 이끄는 온건 사회주의 혁명파는 62퍼센트나 득표했기 때문이다.

- 스탈린은 레닌 관을 나르는 사람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레닌이 죽기 직전 흑해로 요양을 떠나는 바람에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잘못된 일정을 통보했기 때문이라고 훗날 밝혔다. “나는 혼자 머물고 싶었다.” 이걸로 보아 트로츠키에게는 권력을 향한 예민한 촉수가 부족했던게 분명하다. 이것은 패자에게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속성이다. - 트로츠키는 패배했다. 권력에 대한 의지를 최고도로 끌어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을 이리저리 요리하고 끌어들이는 기술이 없었고, 장기간에 걸쳐 치밀하게 준비하는 교묘한 술책과 공작도 그의 장기가 아니었다. 그 밖에 계산적인 침묵이 훨씬 효과적인 전략일 수 있는 자리에서도 현란하고 열정적인 말로서만 승리를 거두려고 했던 것도 패배 이유 중 하나일 수 있다.

- 어울릴 수 없는 두 남자의 대결.... 한 남자는 폭발적인 연설 솜씨에다 스케일이 크고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던 혁명 투사였고, 다른 남자는 누구에게도 찬사를 받은 적이 없지만 누가나 두려워하던 사람으로서 트로츠키가 얕잡아보듯이 대하지 않으면 그저 시큰둥하게 무시해 버리던 소련공산당 서기장이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권력욕과 복수심이 강한 빈민가 출신의 교활한 남자와 혁명의 열정으로 똘똘 뭉친 열혈한의 대결이었다.

❍ 끝없이 추락한 패배자들

18. 오스카 와일드 - 감옥으로 간 사교계의 스타

19. 크누트 함순 - 경솔한 말로 세계적인 명성에 먹칠을 한 작가

❍ 세계적인 명성을 도둑질당한 패배자들

20. 리제 마이트너 - 노벨상을 빼앗긴 물리학자

- 전화를 발명한 세 사람 가운데 최종적인 승리를 거머쥔 사람은 그 중에서도 가장 비양심적인 인물이었다. 벨은 메우치의 실험실에서 함께 일하면서 제대로 작동하는 전화기를 처음 보았고, 메우치는 그 전화기로 벌서 1871년에 특허를 따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메우치의 특허권은 1874년에 효력이 정지되었다. 1876년 마침내 벨이 특허를 따내자 메우치는 그를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 - 벨이 속이 또 다른 사람은 오하이오 주 출신의 전기공학과 교수 엘리샤 그레이(1835~1901)였다. 특허신청서를 들고 특허청에 도착해보니 벌써 두 시간 전에 벨이 특허 신청을 하고 갔다는 것이다. 특허장이 발부된 지 사흘 만에 열린 첫 공개 시연회에서 벨의 전화기가 그레이의 기술을 사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 스웨덴 심사위원들은 대개 기존의 노벨상 수상자들에게 자문을 구하다 보니 수상자의 절반가량이 기존 수상자의 제자라는 기현상. 게다가 각 분야에서 최대 세 명씩까지만 수상자를 뽑게 되어 있는 노벨상위원회의 정관도 문제

21. 앨런 튜링 - 영국의 승리를 도운 무명인

- 영국 법정과 정부의 수모에 못 이겨 자살한 지 20년 만인 1974년까지 묻혀 있었다. 1963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도 튜링이 거론되지 않았다. 1983년판에는 그의 이름이 목록에 나오기는 하지만, 그가 영국의 비밀요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과 그에게 내려진 야만적인 법정 판결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그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실수로 청산가리를 먹고 죽은 것으로 기술하였다.

- 왼쪽이 어디인지 확인할 수 있기 위해 왼쪽 엄지에다 빨간색 점을 칠해 두었다고 한다.

- 처칠과 전쟁사가들은 그 원인을 정교해진 레이더 시스템, 개선된 어뢰, 미 장거리 폭탄의 증강, 그리고 새로운 호송 전술의 구축으로 돌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하루아침에 갑자기 전세가 뒤바뀐 것을 설명하기엔 아무래도 부족한 듯하다. 전세가 급격하게 전환된 데에는 튜링의 암호해독반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튜링은 독일군의 일일 암호를 해독하는 시간을 한 시간으로 단축시켰고, 나중에는 단 몇 분간으로 줄였다.

❍ 더 큰 영광의 시간을 박탈당한 패배자들

22. 게오르크 뷔히너 - 스물셋에 괴테를 능가하는 성취를 이룬 작가

- 라자르 오슈 :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황제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의 경쟁자 라자르 오슈의 요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보나파르트 장군은 툴롱에서 영국군과 스페인군을 무찔렀고, 1795년에는 파리에서 혁명 반군들을 소탕했으며(그 대가로 국민공회는 나폴레옹에게 ‘조국의 구원자’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1794년에는 브레스트 주둔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방데 지방에서 귀족ㆍ성직자ㆍ농민 계층이 영국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무자비한 살육 작전 대신 관용에 바탕을 둔 전략을 끈질기게 추진해 나가서, 결국 1796년에 이 지방을 포함해서 브르타뉴와 노르망디까지 완전히 평정하였다. 프랑스 총재정부는 이 공을 기려 그에게 ‘조국의 은인’이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 국방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2주 뒤 자신의 병영에서 숨을 거두었다. 장티푸스나 콜레라로 추정되지만, 독살되었다는 소문도 끈질기게 나돌았다. 스물아홉이었다.

- 스무 살에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계사를 숙명론으로 해석. 『개인이란 파도의 거품에 불과하고, 위대함은 단순한 우연이고, 천재성이란 인형극이며, 인간의 노력이란 확고부동의 법칙에 대한 가소로운 몸부림일 따름이다.』

23. 이사크 바벨 - 마흔다섯에 악명 높은 루비안카 감옥으로 끌려간 작가

- 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 『하나의 삶 이상을 살았던 사람은 한 번 이상 죽어야 하는 법이다.』

❍ 살아서는 인정을 받지 못한 패배자

24. 빈센트 반 고흐 - 사후에 세계를 평정한 탕아

- 모차르트의 초라한 묘지, 베토벤의 청각 상실, 나폴레옹의 비참한 최후, 클라이스트의 극적인 자살, 니체의 정신착란, 이 모든 비극적 상황이 그들의 타고난 재능에 더해져 그들을 가장 영예로운 자리로까지 끌어올렸다. 고흐도 마찬가지다. - 괴테 문학을 좋아하는 괴테 마니아들은 현실에서 드러나는 괴테의 역겨운 성격을 알게 되면 혼란감을 감추지 못하고, 마지못해 인정하거나 아니면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괴테는 실제로 오만하고 쌀쌀맞은 성격에다 렌츠, 클라이스트, 횔덜린같이 경쟁자로 생각되는 천재적인 젊은 작가들의 싹을 냉정하게 잘라버릴 정도로 야비한 사람이었다.

❍ 쓰러지면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 인생들

25. 윈스턴 처칠과 덩샤오핑 - 누구도 이길 수 없었던 두 사람

- 우리의 모든 적들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거나 아니면 이제 막 항복할 채비를 갖추고 있을 시점에 나는 영국 유권자들로부터 즉각 국정에서 손을 떼라는 명령을 받아야 했다. - 1915년에 해군장관에서 불명예 해임된 것을 필두로, 1922년에는 전쟁부(군수) 장관에서, 1929년에는 재무장관에서, 1945년에는 수상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26. 리처드 닉슨 - 토끼사냥 하듯 내몰린 대통령

- 선거 기부금을 착복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결국 닉슨은 텔레비전 방송에 나와 자신의 잘못을 고백했다. 그것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옆에는 그의 아내와 그의 개가 함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오리코에다 늘 눈물샘의 긴장이 풀려 있는 닉슨이 아이젠하워의 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1956년에는 한 차례 더 그런 영광을 누렸다.

- 존 스타인벡은 두 후보가 벌인 텔레비전 토론을 지켜본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검은 머리카락에 상을 찌푸리고 있는 닉슨은 전형적인 악당이었고, 짙은 금발에 귀족적이고 표정이 없는 케네디는 악당과 마주선 주인공이었다.』닉슨의 부정적 이미지를 은근히 강조하는 포스터였다. 이것은 여론조사 결과 0.2퍼센트밖에 앞서지 않는 박빙의 승부에서 민주당에게 승리를 안겨준 결정타였다. 포스터의 내용은 이랬다. “이 사람에게서 중고차를 사시렵니까?”

- “대통령은 자신의 말을 후세에 남기고 싶어 했습니다.” - 그는 이제 백악관에서 숨어 나오지를 않았다. 최측근 외에는 아무도 그를 만날 수 없었다. - “만약 전직 대통령이라는 직책이 있다면 닉슨은 반드시 입후보할 것이다.”

❍ 나가는 말

27. 안티히어로(Antihero)를 위한 예찬

- 보리스 베커는 청소년기에는 아주 형편없는 테니스 선수였다. 오죽하면 클럽 감독이 그를 여자선수들 틈에 끼워 연습을 시켰겠는가?

- 올림픽대회 400미터 허들 종목에서 두 번이나 우승을 일구어내고, 1977년부터 1986년까지 122차례나 대회에 참가해서 한 번도지지 않았던 에드윈 모제스도 학창시절에는 달리기 대회에서 한 번도 일등을 차지한 적이 없는 소년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말했다. “모든 패배 속에 승리가 숨어있다.”

- 만일 헨리 포드에게 이런 철학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포드 자동차사는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는 서른아홉에 두 번의 도산으로 폭삭 망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실패는 새롭게 출발할 기회를 준다. 그것도 좀더 영리하게 출발할 기회를.”

- 프랑스 외인부대 장교들은 매년 4월 30일이면 병사들 침대로 아침식사를 갖다준다. 외인부대의 전설이 되어버린 카메론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1863년 65명의 프랑스 용병들이 카메론에서 2,000명의 멕시코군을 상대로 10시간동안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마지막 남은 네 명의 용병들은 최후의 총알까지 발사한 뒤 소총에 대검을 곶고 적군을 향해 돌진했다.

- 승리자로 가득 찬 세상보다 나쁜 것은 없다. 그나마 삶을 참을 만하게 만드는 것은 패배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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