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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기 세이이치,김승철,대원정사/‘06.3.18(토)1932시



- 종교의 근본으로서의 계시를 인정한다는 입장에서 불교와 기독교는 ‘우주적 계시’와 ‘양심적 계시’는 -자연적 계시-를 공유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역사적 계시’는 기독교만의 것이라고 혼다는 말한다.

❍ 제1장 바울과 정토불교

1. 사고의 축과 자리

2. 바울의 신학

- 그리스도가 우리들 (전승 성립의 단계에서는 당연히 유대인들을 지칭한다)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고백되고 있는데, 이 경우 ‘죄’는 복수이다. 그리고 복수로서의 죄는 율법 위반의 죄이다(단수의 경우에는 죄의 지배나 힘이라고 해석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율법 위반이라는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뜻이 된다.

- 그리스도의 죽음이 율법 위반의 죄를 위한 속죄라고 한다면, 죄를 율법 위반의 죄로서 이해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이미 율법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율법은 -이것은 구약 종교 혹은 유대교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말할 수 있다- 계약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 그 전승에 의하면 죄인은 그리스도의 속죄에 의하여 의로워진다. 그와는 달리 바울의 중심사상은 사람이 신앙에 의해서 의로워진다는 것이다(『로마서』3:22-28).

- 바울 이전의 원시교단에서 성립하여 바울에게 계승되었던 형태의 신학을 유형 A의 신학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것은 조금 전에 검토한 『고린도전서』15:3-5와『로마서』3:23-25의 오래된 전승이 함의하고 있는 신학의 유형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여 이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는 계약을 맺고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의무로서 율법을 주었다. 하나님은 백성과 공존하려는 의지를 버리지 않고 백성을 구원하고자 예언자를 보내어 회개하도록 하였으며 또한 앞으로 다가올 구원을 알려주었다.

- 그리스도의 속죄는 하나님의 의를 명백히 하기 위한 하나님 자신의 행위이다(『로마서』3:14-15). 여기에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성립된다. 이제 인간은 율법을 위반한 죄로 인해서 멸망받지 않는다.

-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성립되었다. 그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믿는 자들의 모임(교회)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기억하여 기념함과 동시에 속히 종말이 와서 그리스도가 오심을 기원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주여, 오시옵소서.”(『고린도전서』6:22)라고 외친다.

- 먼저 바울이 ‘율법’을 확장해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 바울은 이방인들도 율법을 위반한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노여움을 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기독교가 민족종교의 틀을 깨고 세계종교가 된 이유중 하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지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으며,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 이스라엘의 남자는 반드시 할례를 받지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즉 할례는 신과의 계약관계에 있다는 증표이다. 그러나 바울에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신과의 새로운 계약이야말로 구제의 진정한 근거이며, 이것이 이전의 계약에 대신된 것이므로, 이미 할례는 불필요하다. 기독교로 개종한 이방인은 할례를 받을 필요는 없다고 하는 바울의 주장(『갈라디아서』)은 바울이 구원의 근거를 어디로 보고 잇는가를 명료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 다시 하나님 곁으로 높이 들리워서 만물의 지배자의 위치에 이른 주 그리스도를 모든 입술이 주라고 고백한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유형 A의 신학에서 나타나는 종말론이 없다. 하지만 원시교단에는 이러한 형태의 신학이 있었다. 이런 형태의 신학을 나는 유형 B의 신학이라고 부르고 있다.

- 신랑은 정토에로의 왕생을 말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기독교에는 정토로부터 차안으로의 환상에 대응하는 것이 없다. 여기에서 양자의 차이가 드러난다. 정토불교[신랑]의 경우 (상세한 것은 다음절에 언급) 법성법신이 법장보살로서 세상에 나타나서 48가지 원을 세운다. 이를테면 “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반드시 정토에 태어난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성불하지 않겠다”고 법장보살은 맹세한다. 그래서 오겁의 사유와 조재영겁의 수행을 쌓은 후 성취로서의 정토를 건설하고 보신불 아미타여래가 된다.

- 예수는 원시교단의 초창기에는 부활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정해졌다고 생각되었으나(『로마서』1:4), 세례의 때에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마가복음』1:9-11)고 하는 해석을 거쳐서, 그는 본질상 하나님의 아들, 즉 신적 존재이며, 신적 존재가 지상에 인간으로서 나타난 것이라고 해석되었다.(탄생이야기,『마태복음서』1:20-21:육체를 부여받은 모티브,『요한복음서』1:9-14)

- 유형A의 신학의 중심 모티브는 속죄에 의한 의의 인정이었지만, 유형B의 신학의 핵심은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 유형 B(즉 개인성을 자리로 삼는 신학)에서 개인은 이미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활동을 자각하고 있으므로 지금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고 하는 신앙이 성립되지만, 공동체성이라는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유형 A의 신학에서는 공동체 전체의 구원(죽은자는 부활로 인해 이것을 얻는다)은 장래에 대망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결과 종말론에서도 유형 A의 신학과 유형 B의 신학에는 상기와 같은 차이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순이 있으므로 바울 해석은 쉽지 않다. 심지어 19세기에는 바울이 정신분열에 빠져 있었다는 설조차 나왔을 정도였다.

- 바울이 유형 A의 신학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항상 이스라엘 또는 인류의 역사를 문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동체적[구속사적] 사고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형 B의 신학이 맴도는 사고의 축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또한 ‘신앙’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중심개념에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공동체성이 아니라 개인성이다.

- 자기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개인의 입장에 서 있는 이상, 당연히 타력에 의한 구원이 문제가 된다-분명히 언급되는 것이다. 구원자의 이른바 가장 깊은 곳에는 궁극적인 것(법성법신, 하나님)이 있다. 그러나 신앙은 먼저 구원자를 향하며, 구원자를 통해서 궁극적인 것과 만난다. 그러므로 구원자에 대한 믿음의 입장이라고 하는 점에서 신랑과 바울은 일치한다.

- 아미타불은 아미타유스 혹은 아미타바라고도 불리운다. 아미타유스는 무량수라고 해석되며 끝없는 생명, 영원한 생명을 뜻한다. 또한 아미타바는 무량광으로서 무한의 끊임없는 빛이다. 요컨대 아미타불은 생명이며 빛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서』첫머리에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의 안에서 생겨난 것은 생명이었으니, 그 생명은 모든 사람의 빛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1-4).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이며 빛이라고 보는 점에서도 정토불교의 아미타불과 비교될 수 있다.

그림5

-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은 분명 자신의 행위이긴 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아미타불 자신의 행위이다. 달리 말해 보면, 인간은 이른바 아미타불에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섭취불사라고 한다. 아무리 무거운 죄인이라도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자가 있다면 아미타불은 그를 감싸 안고서 버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를 아미타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신도는 아미타불 속에 있다). 따라서 정토불교[신랑]의 경우는 「그림5」의 ‘그리스도’를 ‘아미타불’로 바꿔 놓을 수 있는 것이다.

- 신랑의 말중에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을 얻는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번뇌를 간직한 채로 깨달음의 세계(여래의 큰 슬픔이 쉬임없이 나를 비추는 세계)에 들어가 있다는 말. 신약성서』에 의하면 인간은 죄인인 채 그리스도를 머물게 하는 존재. 인간에게 머무르는 그리스도 아래서는 죄도 죽음도 없다(『로마서』8:2-3, 9-10). 바울의 경우도 그렇고, 다음 장에게 다시금 고찰하는 바와 같이, 정토불교[신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 객관적인 것이 결여되고 주체적인 것만이 남아 있는 일면성, 이것은 열광주의이다. 역으로 객관적인 것만 있고 주체적인 것이 결여되어 있는 일면성, 이것이 율법주의이다.

- 정토불교[신랑]이 문제는 그것이 개인의 번뇌이고 미혹이지 사회윤리는 아니라는 데에 있다. 세속세계에서의 사회정의, 사회윤리 같은 문제, 혹은 사회의 구조나 질서에 대한 반성을 거기에는 찾아 볼 수 없다. 정토불교는 서민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준 것인 이상, 분명 사회적 의미는 있으나, 세속적 사회성, 윤리성은 신랑에게서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 제2장 정토불교

1. 예비적 고찰 - 성취하는 것

- 히브리적 시간감각이 명료하게 나타나 있는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예를 들면 ‘에메트, 에무나’라는 말이 있다. 이들의 어근은 ‘mn’이다. 여기에서 에메트, 에무나, 아멘, 그리고 헤에민 이라는 일군의 단어가 유래한다. 그런데 이 어근의 의미는 ‘반드시 일어나는 확실성과 힘을 갖추고 있는 것’, 따라서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2. 정토불교[신랑]의 사상

- 정토불교의 경전, 즉 『대무량수경』,『관무량수경』,『아미타경』중 가장 중요한 경전이 『대무량수경』이었다. 그것이 『교행신증』의 ‘교’이다. ‘행’은 나무아미타불이라고 부르는 칭명이고 ‘신’은 신심, ‘증’은 깨달음

- 아미타는, 부정어 ‘아’와 한정을 의미하는 ‘미타’가 연결된 것으로, 무한을 의미한다.

- 신랑은 다른 부처님을 염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미타의 서원이 위대하고 심중하므로 미타를 염불하면 그 원력에 의하여 왕생하기 쉽기 때문이라고(『신랑』48면) 설명한다. - 정토진종은 이 세상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사후에 정토에 왕생하여 거기서 깨달음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 기독교에서는, 종종 schon(이미)과 noch nicht(아직…아닌)의 긴장을 말한다. 예수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지배’는 이미 세상에 임재해 있다. 분명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미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 ‘이미’와 ‘아직’의 긴장이 있다.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아직 종말과 하나님의 나라는 이르지 않았고 그리스도는 재림하지 않았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이미 성령이 주어져 있어서 그리스도의 활동에 참여해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따라서 이미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활동에 관여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 분명 우리들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으며 정토에 태어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이미 정토에 태어나 깨달음을 얻는다는 사실이 정해져 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우리들은 깨달음의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 그 참여라는 것은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이렇다. 번뇌에 가려져 나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아미타의 대비는 쉬임없이 나를 비추고 있다.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것이 ‘이미’와 ‘아직…아니’의 긴장이다.

- 미타의 서원력은 모든 장애를 타파하고 승리한다는 점에서 구제의 확실한 근거가 된다. 구제의 확실함은 기독교에서도 곧 잘 문제시되곤 한다. 기독교의 경우에도 구원의 확실함은 자신의 노력이나 재량, 수행이나 덕이나 업적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서 계시한 하나님의 은혜[결정]에 있다. 정토불교[신랑]의 경우도 구제의 확실함은 미타 서원력의 힘이 절대적으로 승리하는 곳에 있다. 미타의 서원력은 모든 장애를 타파하고 승리한다는 점에서 구제의 확실한 근거가 된다. 구제의 확실함은 기독교에서도 곧 잘 문제시되곤 한다. 기독교의 경우에도 구원의 확실함은 자신의 노력이나 재량, 수행이나 덕이나 업적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서 계시한 하나님의 은혜[결정]에 있다. 정토불교[신랑]의 경우도 구제의 확실함은 미타 서원력의 힘이 절대적으로 승리하는 곳에 있다.

- 신자는 죽은 후 정토에 왕생하여 여래의 설법을 듣고서 깨달음을 얻으면, 다시금 이 세상에 환생하여 중생 구제를 위해 일한다. 유형 B의 신학에서는 신자가 사후 그리스도를 따라 (『요한복음서』14:3)하나님에게 가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게 된다(『빌립보서』1:23). 기독교에는 환상이라는 사고방식은 없다. 여기에 신랑과 유형 B의 산학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주의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이 세상 역사에 종말이 있다고 보는데 반해, 불교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단 순수한 유형 B의 신학이 이 세상의 종말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문제이다. 그것은 사실 세상의 종말을 말하지 않는다. 세상의 종말이란 아예 신학적 테마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3. 구제의 활동 : 회향의 구조와 삼위일체

-성령이 진리와 생명과 빛을 신도에게 가져오는 활동이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삼위일체가 포함되어 있다. 즉 하나님은 구제 활동의 궁극의 주체이며, 그리스도는 그 내용(진리, 생명, 빛)이며, 성령은 그 내용을 신도에게 전달하는 활동.

- 신랑의 경우에도 법성법신과 아미타, 그리고 회향의 관계를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미타여래는 구제의 주체이다. 구제의 궁극적 주체는 보신불 아미타여래가 아니라 법성법신이므로, 이것을 기독교의 ‘하나님’과 대응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구제라고 하는 경우, 그 내용은 정토에 태어나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중생의 정토에 태어나 깨달음을 얻는 것이 다름아닌 아미타여래의 맹세인 것이다. 아미타여래의 바람의 내용은 우리들의 구제이다.

4. 자연법이와 무상 법신의 자각

- 땅은 열매를 저절로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의 알찬 낟알을 낸다(『마가복음서』4:26-28).

- 인위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배의 활동에 의해 저절로 그렇게 되어 간다는 의미에서 자연법이와 본질적으로 맥을 같이한다. 자연법이는 의가 없음을 의롭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자의 인위적 행위가 없어도 미타의 맹세의 활동에 의해서 나무아미타불의 칭명이 성립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아미타불의 활동에 의한 ‘자연’이다. 연래가 그와 같이 활동해 줌으로써 “행자가 선한지 악한지 생각하지 않는 것을 자연이라 한다고 듣는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 유럽과 비교하여 볼 때 동양의 마음의 특징은 자연, 즉 ‘저절로’, ‘자연히’라는 것이다. 분명 신랑 쪽은 ‘자연’임에 비해서 유럽 철학의 사고는 반성적이다. 그것은 사유의 사유이고 사유의 자각이지, 직접성[자연]은 아니다. 자연에는 그러한 앎의 영위 자체에 대한 방기가 포함되어 있다.

- 신랑에게서는 법성법십→ ←그리스도이면서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기독교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요컨대 ‘마음 그대로’라고 하는 것이다. 즉 “그 마음대로 이루어라”(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이다. (『마태복음서』6:10 ;『마가복음서』14:36) ‘그 마음 그대로’란 자아의 재량을 버리고 하나님 마음의 성취에 내 몸을 내맡긴다는 것이므로, 비행비선이나 자연법이에 상당히 가까울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같다고까지 할 수 있다.

- 첫째, 바울을 다루는 장에서도 지적했듯이, 바울에게는 ‘그리스도가 신도[나]안에 있다’고 하는 표현과, ‘신도[나]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표현이 있다. 신랑의 경우는 어떠한가? 바울의 경우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있다”고 하는 표현은 그리스도는 나의 자아보다 더 깊은 주체임을 나타낸다. 거기에 해당되는 신랑의 사상은 아미타불의 ‘회향’이다. 아미타여래의 회향은 인간의 주체성을 이루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자아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미타 자신이야말로 신도의 실존에 대한 진실된 주체인 것이다(자연법이).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내 안의 그리스도’와 상응하는 신랑의 사상은 회향이다. 한편, ‘내가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은혜의 근거이며, 나는 그리스도에게 받아들여지고,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의 활동에 근거하여 항상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의미이다. 아미타의 자비, 섭취불사라고 하는 구제활동이다. 아미타여래는 인간을 받아들이고 버리지 않는다. 이것이 여래의 자비이다. 그러면 나의 주체, 즉 나의 주체성보다도 더욱 주체적인 것으로서의 그리스도의 활동이 나의 일체를 둘러싸는 것과 대립하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동등하다는 구조는 신랑의 경우에도 성립된다. 또한 바울과 정토불교[신랑] 모두에게 있어서 구제자는 신도의 참된 주체이면서 동시에 구제를 고지함으로써 신앙으로 불러들이는 대향적 인격이며 신앙의 대상이다. 두 번째로, 바울에 있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갈라디아서』2:20 ;『로마서』8:10). 그리스도는 신도 각자각자에게 내재함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에 임재한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듯한 말투를 사용하였다.(『고린도전서』12:12) 만일 이와 연관해서 그리스도를 빛으로서 표상한다면 - 바울은 그처럼 말하고 있지는 않으나- 교회로서의 그리스도는 하나의 커다란 빛이며, 또한 그 빛은 개개의 신도에게 내재하는 그리스도로서의 빛에서 성립될 것이다. “무량광불의 빛에는 무수한 아미타가 계시고, 화불 각자각자의 무수한 광명이 무량무변하다” 셋째, 바울과 정토불교[신랑]는 모두 초월자로부터 성립되는 자아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 양자에 공통되는 죄의 자각이 그것이다. 그런데 자아란 말을 하고, 말을 사용하여 생각하는 주체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자아는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말의 주체로서의 자아는 또한 역사적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자아는 말의 세계 속에 있기 때문에 말의 전통 속에 놓여있다. 바울의 특징은 구속사적인 사유와 (신학 A의면), 『로마서』4장 등 많은 곳에서 보여지듯이, 스스로 새로운 계약의 입장에 서면서, 구약의 말을 인용하고, 구약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자신의 주장을 구약성서의 권위를 가지고 뒷받침하려 한다는 점이다. 한편으로는 구약의 세계로부터의 단절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나아가서도, 동시에 이전의 원시교단의 그리스도 선교를 계승하여 이것을 전개시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 자신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 제3장 예 수

1. 예수 사상의 분석

- 사랑에 관한 가르침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그것은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의 지배’ 위에 성립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배를 인격화한 사람이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예수의 경우 종말론은 이미 현재의 역사적 현실안에 하나님의 지배가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전면적으로 성취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림13



2. 사랑에 관한 말

- 『누가복음서』10:25-37에 나오는 이른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자.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것이다.”

- 그것은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신명기』6:5)는 명령과, 너 자신을 사랑하듯 네 이웃을 사랑하라(『레위기』19:18)는 명령이다. 바울의 경우는 『로마서』13:9에서 (이웃사랑만), 구약 외경에서는 『12족장의 교훈』,. 그리고 『베냐민』3에 비슷한 내용이 있다.

- 사마리아인은 원래 유태인과 같은 족속이었으나, B.C 721년 사마리아가 앗시리아에게 망해 지도층이 외국으로 쫓겨나고 이민족이 들어와 잡혼이 이루어지게 되면서부터 정통적인 유태교로부터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사마리아인도 자기들만의 예배당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전도 모세오경만을 인정하였다.

- 양자의 발상에는 큰 차이가 있다. 율법학자는 사랑의 대상은 누구인가라고 질문하는데 반하여-마치 그 문제만 풀리면 벌써 사랑할 수 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예수는 그대는 사랑의 주체가 되라고 말한다.

- 만약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생각은 결코 자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자아보다 더 깊은 곳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사실과 관계되는 말을 인용해 두기로 하자.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낳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요한1서』4:7-8). 7절 이하에서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씌어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사랑하는 자의 사랑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에 의하여 자기가 사랑의 주체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3. 삶에 관한 말

- 『마가복음서』10:17-22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누가복음서』12:16-21)

4. 율법에 관한 말

- 공동체성을 축으로 하는 예수의 사상 :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조차도 주인이다.”(『마가복음서』2:23-28)

- “살인하지 말라”는 번역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히브리어에서 이 계명은 명령법이 아니라 직접법 미완료-히브리어에는 시제가 완료와 미완료 두 가지가 있다-로 말해지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직역하면, “너는 죽이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 슈바이쩌에 의하면 예수의 윤리란 이 종말에 직면한 중간시기, 비상시기에만 적용되는 윤리라는 것이다. 예수가 종말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예언자로서 말하고 있다. 그 틀 안에서 그는 윤리를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윤리를 논할 때에는 종말론이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가 윤리를 논할 때에는 마치 이 세상이 계속 지속될 것처럼 말한다. 즉 예언자로서의 예수와 윤리 교사로서의 예수 사이에는 단절이 있는 것이다.

- 예수의 율법론은 바울의 신학유형 A, 즉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와 기본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신학유형 A에서는 우선 율법 위반을 죄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 죄가 십자가의 속죄로 말미암아 용서받고, 용서받은 인간은 율법과 율법주의에서 자유롭게 되어 새롭게 ‘그리스도’안에서 태어난다. 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난 인간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이세상에 나타내며 사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은 성령의 역사라고도 일컫는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부터 다름 아닌 사랑이 솟아나온다.(『갈라디아서』5:6,22) 바울은 성령에 따라 사는 인간이야 말로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5. 하나님의 지배와 하나님

- 알버트 슈바이처, 그는 『예수전연구사』(1913년)에서 예수를 개인윤리를 가르친 교사로 이해하였던 이전의 비종말론적 예수 해석을 비판하면서 예수에 대한 종말론적 해석을 철저화 하였다.

- 예수는 종말이 반드시 온다고 기대하였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종말은 오지 않으므로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으로써 종말의 도래를 재촉하려 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추정(일반적으로 예수의 행동을 예수의 심리로 해석하는 방법)은 그러한 추정의 내용을 확인 할 수 있는 사료가 없으므로 확실성이 없다는 약점이 있다.

- 이와는 달리 영국의 신약학자 돗트는 예수에게서 종말은 이미 도래하였으며, 종말론은 그러므로 이미 현실화된 사실이라고 하는 이른바 ‘실현된 종말론’을 주장하였다. - 예수는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말한다”라고 하면서 모세의 권위를 부정하였으므로 예수가 자기 자신을 신격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계시를 본 사람과 예수를 신성 모독자로 본 사람이 구별되었다.

- 종말론의 사상적인 역사를 살펴보면 그것은 페르시아의 이원론에서 유래한다. 이 세계는 선한 요소와 악한 요소가 싸우고 있다. 그리고 선한 요소가 악한 요소에게 인긴다. 이것이 종말론의 구조이다. 일반적으로 종말론은 이러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종말의 때에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하나님에게 적대하는 모든 세력과 죽음이 멸망한다(『고린도전서』15:24-28). 그런데 지금 예수의 설교에는 선악, 정사의 구별이 없다. 아니 없다기 보다는, 그러한 구분을 넘어서 있다. 이것으로는 종말론이 성립할 수 없다.

- 우리에게 전승되고 있는 범위 내의 예수의 말 가운데 하나님 자신에 관한 내용은 별로 많지 않다. 예수는 구원 활동의 수준(하나님의 지배)에서 하나님을 말한다.

- 예수와 바울 사이의 비교 내용을 정리해 두자. 첫째, 사고의 축에서보면, 예수의 경우 공동체성, 개인성, 대인성이 있다. 이것은 바울의 경우와 같다. 그러나 대인성에 대한 바울의 사고는 독립된 신학으로써 [유형 C의 신학]전개되지 않는다. 둘째, 예수의 경우 하나님의 지배의 현재성이 지금ㆍ여기에서의 종교적 존재를 성립시키고, 하나님의 지배의 장래성이 종말론을 이루고 있다. 바울의 경우, ‘하나님의 지배’를 ‘그리스도’와 바꾸어놓는 것과 똑같이 그리스도의 현재의 작용이 종교적 실존을-또 예수와 달리 명확한 자각에 기초한 실존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와-성립시킨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장래성은 종말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바울과 예수의 차이는 자아와 초월자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바울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에서 말하고 있다.

- 바울이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자아의 입장에서 말하는 경우가 비교적 많은 반면, 예수는 그를 살게 하는 하나님의 지배의 입장에서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의 언행은 하나님의 지배[사람의 아들]가 지상에서 나타나는 표출이라는 자각이 매우 확실하다. 예수가 “나는 말한다”고 할 때의 ‘나’는 단순한 자아가 아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지배 안에서 살아가는 자아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지배 그 자체로부터 말하고 있다. 바울은 『구약성서』를 권위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면서 논의를 전개한다. 그에게는 이전의 원시교단의 그리스도 선교를 수용하여 그것을 계승하고 있다는 자각이 뚜렷하다. 이와 같이 자아의 입장에서 사고하는 경우, 자아의 죄와 약함과 고민 등이 강하게 자각되고 논해지는 것이다. 바울의 경우『고린도후서』10-13장에 이러한 사실이 나타난다. 예수는 역사와 전통의 권위에 호소하지 않는다. 예수의 ‘구약’은 구원의 근거가 아니다. 예수는 그것을 일례로 삼아 논의하는 일도 없다. 그것은 단지 전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당한 것을 승인하는 것이다(『마가복음서』10:2-9에서 예수는 『창세기』2:24을 인용하여 결혼을 긍정하고 이혼은 절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예수의 중심은 하나님의 지배의 현실에 있다. 셋째, 바울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이에 모순되는 모티브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에 반하여 예수는 ‘하나님의 지배’에 기초한 말과 모순되는 것을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다.

❍ 제4장 선(禪)

1. 예수와 선

2. 선적 자각

- 천태종에서는 일즉다라고 한다. ‘즉’이란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에 나타나듯이, 색(존재자)은 색이며 공이 아니고, 공은 공이며 색이 아니지만, 동시에 색은 그대로 공이며, 공은 그대로 색이라는 말이다.

- 화엄종은 개개의 관계를 한 걸음 더 들어가서 문제시한다. 한 그루의 나무가 그곳에 있으려면, 거기에는 대지ㆍ물ㆍ공기ㆍ태양 등이 더불어 존재해야 한다. 더욱이 거기에는 생물의 역사 전체가 전제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무가 그곳에 있다고 하는 것은 지구가 있고, 태양이 있다는 것이며, 나아가 전 우주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한 그루의 나무가 전 우주를 내포하고 있고, 전 우주의 작용이 이 한 그루의 나무를 구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화엄은 그러한 관계를 사사무애라고 부른다. 화엄에는 사법계설이 있다. 사법계, 이법계, 이사무애법계, 사사무애법계가 그것이다. 사법계설의 궁극은 사사무애법계이다. ‘존재하다’는 것은 개개의 존재자가 서로 서로에게 내포됨으로서 성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외에 무엇을 세울 필요도 없다고 한다.

- 선적 자각의 내용에 대해서는 종교철학적인 표현도 있을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니시타니 게이지의 ‘공과 즉’이라고 생각한다. 그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지금 서로 나란히 존재하는 방 A와 방 B가 있다고 하자. 방 A는 칸막이 벽으로 되어 있으므로, 방 A와 방 B사이의 벽은 A를 A로서 한정지으면서 A를 구성한다. 따라서 벽은 A에 불가결한 A의 요소이다. 그러나 그 칸막이 벽은 A의 한계이면서, 동시에 방 B를 나타내고 있다. 이 말은 방 V가 방 A를 A답게 한다는 말이다. - A와 V는 서로서로를 내포하면서 성립한다. 이와 같이 A와 B의 상호 포함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열린 장을 공이라고 한다. 열린 장에서 A와 B는 서로 내포되고, 각각 A,B로서 성립한다. 사사무애는 바로 이러한 것이다.

3. 선과 기독교

- ‘무상의 활동’이나 ‘아미타불의 원력의 회향’, 또는 ‘성령의 역사’ 등은 의식적인 자아에게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측면과, 융이 말하는 대로, 자기에게 활동하도록 하는 측면이 있다.

- 선의 직접성은 귀중한 입장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종교철학에서 종교를 가르칠 때에도 선적인 입장을 꼭 고려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만, 선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객관화해서 논하기를 싫어한다. 그들은 객관화된 하나님은 망상이라고 주저없이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본래 공공성의 지반위에 성립된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관계에서 성립되어 있다. 공공성이라는 것이 철두철미하게 기독교의 지반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반드시 언어로 말하여야만 한다. 공공성은 말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이상 하나님을 객관화하지 않을 수 없다.

- 뿐만 아니라 공동체성에 관한 사항, 예를 들어, 사회정의라든가, 질서, 윤리 등과 같은 객관적인 사항을 통하여 하나님이 논의된다고 하는 점도 기독교적 인식은 갖고 있다. 이러한 점은 불교에는 없다. 이것이 이른바 하나님의 말씀의 체험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직접 말씀하지 않고 인격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나에게 있어서 너의 인격존재를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인격주의적인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이 기반 위에서 선교가 성립된다.

- 정토진종에서 아미타여래가 석가불을 통하여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와의 역사관계는 아닐 것이다.

- 기독교에는 원래의 인격 공동체성의 성취를 향한 소망이 있다. 즉 에메트, 헤에멘이라는 개념으로 서술한 사항이다. 이것은 성취해야 할 일에 대한 소망이다. 헤에멘이란 하나님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성취해야 할 것이 성취됨에 대한 승인과 바람, 그리고 그에 대한 주체적 참여의 맹세이다. 공동체성의 기반에서는 당연히 이것이 인격 공동체의 성취를 향한 헤에멘으로써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기독교는 그것을 교회론과 종말론으로 이미지화하고 언어화하였던 것이었다.

4. 직접성의 의미

- 남극과 북극을 지표에서 연결하고 있는 경선을 절단한 단면은 북극에 대하여 남극을 대표하는 남극의 프론트의 의미를 지닌다.

- 바울은 통합체인 몸이라는 모델을 가지고 인격 공동체 전체를 이해하고 있다. 기독교의 인격 공동체는 사사무애라기보다는 통합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렇게 보는 편이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말하면 극과 극, 부분과 전체는 사사무애이다. 인격 서로간의 사사무애라는 말과 통합이라는 말은 본질적으로 같다.

- 현실에서 무상이 작용할 때에는 반드시 두 개의 극이 생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사람, 주관과 객관, 자기와 타자, 자연과 인간, 타력과 자력과 같은 두 가지의 극이 생긴다. 그러나 둘이 나타나기 이전에 바로 붙잡는 것이 선이라고 한다. 이것은 엑트[작용]의 직접성의 현전을 말한다. 인식은 자각이지만, ‘자각’이라고 할 때에는 이미 반성을 포함하고 있어서, 그 인식을 언어로 표현하면, 반드시 둘이면서 하나이다라고 하는 표현법이 된다. 일즉다라든가, 사사무애라든가, 통합이라는 표현이 된다. 그런데 그러한 표현에는 자신을 초월한 것의 직접적인 기능, 직접성이 있다. 그것을 붙잡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여기에 선이 뛰어난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 인식=언어화는 분명히 분극되고 분절화된다. 그것은 단순히 현전하는 사물을 명명하거나 기호화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와 함께 자아가 정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아의 입장의 소멸은 언어 세계의 소멸이 아니면 안 된다. 그곳은 언어화 이전과 직접적인 소여, 전체성에서 나타난다.

- 불도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배우는 것이다.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자기를 잊는다는 것은 만법에 증명되는 것이다. 만법에 증명된다는 것은 자기의 신심과 다른 이의 신심을 탈락시키는 것이다.

- 마음과 법은 형태가 없어, 온 시방세계를 꿰뚫는다. 그것이 눈에 있을 때 본다고 하고, 귀에 있을 때 듣는다 하며 코에 있을 때 냄새 맡는다 하고, 입에 있을 때는 이야기한다고 하며, 손에 있을 때는 잡는다 하고 발에 있을 때는 걷는다고 한다. 본래 밝고 정묘한 한 덩어리가 나뉘어서 ‘화합’이 되는 것이니, 이미 마음이 없으면 가는 곳마다 해탈을 이룬다. - 무위의 진인의 작용을 외부에 있는 형태로써, 또는 경론의 문자든지, 혹은 종교철학적 인식이든지, 자기를 떠나서 구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점에서 선은 극단적이다. 일면적이라고 한다면 일면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 성격이 선의 특징이다.

- 그에 반하여 기독교는, 공동체성의 기반 위에 성립되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언어로 사물을 객관화한다. 그러므로 교리와 신학이라는 형태로, 즉 공공화라는 의미에서 객관화가 일어난다. 또는 정전, 교회의 예전과 제도, 종교적 윤리, 종교적 삶을 형태로 조형하는 의미에서 객관화된다. 다시 말해서 초월의 기능을 객관적으로 형태화하고, 그 결과 초월의 기능을 전적으로 자기 밖[외부]에서 구하게 된다. 바꿔 말하면, 초월의 작용과 그것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초월의 작용이 인간적 응답을 매개로 하여 역사적 현실 가운데 취하는 형태를 진리와 동일시하기 쉽다는 말이다. 그것이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면 자신의 근저에서 자신을 초월하는 존재의 작용을 직접 인정하지 않고, 그 기능이 취한 형태를 단순히 지식으로 수용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성서에 씌어 있는 것이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아무튼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 혹은 기독교의 교리를 수용하는 것이 바로 신앙이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나아가서는 성서를 바탕으로 자신의 외부에서 성성, 전능성, 의, 사랑과 같은 속성을 가지는 신의 이미지를 그리고, -그때 그 속성의 의미는 단순한 자아와 일상적 언어의 세계로 풀이되기 쉽다-하나님이란 보이지는 않지만 자신의 외부에 있는 것, 그러한 자신의 이미지에 합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신앙이라고 간주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의 선포에는 현실성과 설득력이 없어진다.

- 현재 기독교가 위기 상태에 이르고 있는 이유의 하나는 자기 성립의 바탕에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인정하는 직접성을 완전히 배재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성서의 말씀에-기초하는 객관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여 기독교가 하나의 역사관, 세계 해석, 윤리라는 형태로 일상적 언어로 전달되는 정보에 이르기까지 객관화된 결과, 특히 근대 이후 기독교적인 역사관과 세계 해석이 현실경험과 일치하지 않는 이유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초래하게 되었다.

- 다만 선에는 기독교와는 반대의 결점이 있다. 선은 그 근원의 직접성에 요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 역자후기

- 무교회주의를 따르는 경건한 신앙의 분위기에서 성장한 야기는 이른바 두 번의 깨달음을 거치면서 동양적인 선불교와의 만남을 통한 기독교 신학 형성에 매진하게 된다. 그 두 번의 깨달음이란 율법적인 기독교로부터의 해방과 서구적 기독교로부터의 벗어남을 의미하였다 - 기독교 신앙의 진수는 죄인의 의인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개념적인 언어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새로운 인식에 이르게 되었다. - 신약성서의 핵심 역시 역사에 대한 신의 초자연적인 개입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후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깨달음의 사건에 대한 해석으로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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