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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0 09:00

구도자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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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이거룡,불경-차차석,‘06.3.11.1606 집에서



❍ 1부 베다 - ‘나’에 이르는 무한한 실험

1. 신자가 없는 종교의 대륙

- 힌두교는 어떤 특정한 창시자에 의하여 만들어진 종교가 아니다. 장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수 대중의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하여 형성되어 온, 지금도 형성 도상에 있는 미완의 종교이다. 힌두교인은 힌두교인으로 태어난다. 애초부터 종교라는 이름으로 의식되는 테두리가 없으니 벗어날 테두리도 없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자신의 종교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정통ㆍ이단 시비가 없다는 것이다. 분명히 서로 다르지만 싸우지 않는다. 이들에게 ‘다르다’는 것은 다만 다른 것일 뿐, 결코 ‘틀린 것’이 아니다.

- “힌두교인은 보다 훌륭한 힌두교인이 되고, 무슬림은 보다 훌륭한 무슬림이 되며, 기독교인은 보다 훌륭한 기독교인이 되라.”는 것이 우리가 잘 아는 마하트마 간디의 가르침이었다.

2. 낯선 이름을 가진 인류 정신사의 고전

- 만일 어떤 브라만이 성상을 숭배하지 않는다 해도 힌두교인으로서 아무런 문제도 안 되지만, 베다에 규정된 일상적인 기도와 의무로 규정된 예식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힌두교인이 아니다.

- 인도의 사상이나 종교에서 정통성의 근거는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가의 여부이다. 어떤 종파나 학파든 베다의 권위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정통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베다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곧 아웃사이더임을 자처하는 것이다. 붓다나 마하비라(자이나교의 개조)의 사상이 인도 철학에서 외도로 규정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 우리가 흔히 베다라고 부르는 본집 외에도 제사에 관한 상세한 절차와 의미를 담고 있는 브라흐마나, 아란야카, 우파니샤드도 베다에 포함된다.

3. 인도에 정복당한 성스러운 정복자들

- 이란과 인도의 아리아인들이 수세기 동안 한 곳에서 하나의 종교를 공유했다는 것은 분명한다. 이는 이란 아리아인들의 문헌인 『아베스타』와 인도 아리아인들의 문헌인 『리그 베다』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여러 신들의 이름이 동일한 점, 신들의 수가 일관되게 3의 배수로 언급되고 사회 계급도 동일한 이름으로 통하는 점, 그밖에도 여러 종교의식에서 나타나는 상당한 공통점은 이란 아리아인들과 인도 아리아인들의 공동 토대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어떤 의미에서 『아베스타』는 베다의 전통을 이어 후에 인도에서 나타난 산스크리트 서사시보다 오히려 베다에 더 가깝다고 할 정도로 베다와 『아베스타』는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 이란 아리아인들의 전통에는 두 종족의 공동 토대였던 에란베즈 지역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이 묻어나고 있는 반면에 인도 아리야인들은 이에 대하여 이상할 정도로 침묵한다. 초기 베다 시대의 인도 아리아인들이 지녔던 이란과 이란인들에 대한 침묵은 과거의 상처 대문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 초기 베다 찬가를 보면 모든 위대한 신들에게 아수라라는 수식어가 주어지는데 원래 이란에서도 이 말은 ‘영적이고 거룩한 존재’ 혹은 ‘신’을 의미하던 말이었다. 그런데 인도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정착하면서 아수라는 부정적이고 무시무시한 의미를 지니는 말로 바뀐다.

- 유목민이었던 이들에게 소는 가장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다. 베다의 기록에 의하면, 이들이 전쟁을 통하여 획득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소였다. 심지어 전쟁은 ‘소를 열렬히 구하는 행위’로 묘사될 정도였다. 오늘날에도 그대로 계승되는 힌두교의 소 숭배 전통은 이미 베다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으며, 소가 숭배된 것은 주로 경제적인 이유였으나 차츰 신화적인 색채가 가미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 아리아인들의 문헌인 베다에는 피정복민들을 경멸하는 듯한 인상의 표현들, 가령 검은 피부와 낮은 코의 추한 모습에 육식을 즐기며 성기 숭배와 같은 이상한 습속을 지닌, 말하자면 미개인이라는 식의 묘사가 일반적

- 아리아인들보다 훨씬 이전에 인도에 들어온 드라비다인들은 이미 상당할 정도로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모헨조다로 유적지 : 1920년대에 고고학적 발굴이 진행된 모헨조다로는 ‘죽음의 언덕’이라는 의미로, 체계적인 하수도 시설과 공동 우물을 갖춘 매우 훌륭한 도시였다. 이 문명의 주인공은 드라비다족으로 추측되는데 이들은 뒤에 아리아족에게 정복당한다. 그러나 드라비다족이 신앙하고 있던 신이나 윤회관은 아리아족에게 계승되며 인도의 사상으로 살아남는다.

- 아리아인들은 인도로 들어올 때 이미 상당수의 베다 찬가를 가지고 있었으며, 베다의 신들은 처음부터 선주민들의 신들을 압도했다. 이 점은 베다 찬가들에 나타나는 악신들에 대한 인드라 신의 일방적인 승리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악신들에 대한 아리아 신들의 승리는 곧 토착민들에 대한 정복자들의 승리를 의미

- 수세기가 지나면서 아리아 신들은 고대 인도의 신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토착민들의 신에 동화되어 갔으며, 아리아 신들의 정체가 완전히 변형되는 경우도 있었다.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신으로 숭배되던 천신 디야우스가 인도에서 이내 잊혀졌다는 것. 바루나 신의 변형에서, 그들이 인도에 정착한 이후에는 인드라 신의 변형에서 인도 신들에 의한 아리아 신들의 변질을 쉽게 추적할 수 있다.

※ 현대 인도의 저명한 철학자인 라다크리슈난은 이렇게 말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한쪽은 히말라야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던 인도는 오랫동안 외침으로부터 비교적 무사할 수 있었다. 풍요로운 자연이 넉넉한 식량을 보장했고 사람들은 물질적인 삶의 문제에 집착하여 자연을 개척하려 하기보다는 영적으로 완전한 삶에 몰두하였다. 믿음이 깊은 영혼들은 무성한 활엽수의 방대한 숲에서 평화롭게 거닐며, 신비의 꿈을 꾸며, 환희의 노래를 불렀다.”

4. 신보다 먼저 있었던 경전, 베다

- 우리가 베다를 인도유럽어족 최초의 경전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문자로 기록된 서물로서의 베다를 말하지 않는다. 베다가 현재 형태로 문자화된 경전이 된 것은 4세기 경으로 추정되며, 베다는 그때까지 십 수세기 동안 암송을 통하여 구전되어 왔다. 여러 전승에서도 베다를 문자화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신성한 것은 문자로 기록될 수 없다는 사고방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시무종의 영원한 지혜를 담고 있는 베다가 문자화되는 것은 곧 절대적인 것이 상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 이미 여러 종족들이 각자의 고유한 문화를 발달시키면서 살아가고 있던 땅에 새로이 이주해 온 민족으로서, 스스로의 생존과 자기 고유의 뿌리를 유지하는 것이 최고의 관심사로 떠올랐으며, 이와 같은 시대적 요청에 대한 응답이 바로 베다의 형성으로 나타난 것이다.

- 전통적으로 인도 사람들은 경험적인 시간에 대하여 무관심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어떤 사건이나 문헌에 연대를 기록한다는 것은 이들의 사고방식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오늘날에도 어떤 문헌이나 사상의 연대를 추정함에 있어서 천 년 정도의 차이는 그냥 눈감아 준다. 베다의 형성 시기에 대한 추정이 기원전 4000년에서 기원전 1200년까지 들쭉날쭉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초기 불교 문헌들(기원전 500년경)을 통해서 보면 당시 인도에는 브라흐마나와 우파니샤드를 포함하는 베다 전체가 이미 상당할 정도로 널리 유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다 찬가가 체계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는 시기는 기원전 15세기경이다.

- 베다의 형성은 다른 한편으로 카스트 제도의 확립으로 이어진다. 카스트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아리아인들이 스스로의 순수성을 보존해 가는 노력이 구체화된 결과로 나타난 제도라는 설명이 가장 설득력 있는 견해.... 베다의 편찬이 정신적인 면에서 토착 선주민들과 아리아족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라면, 카스트는 사회 구조적인 면에서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카스트는 사회 구조적인 면에서 이러한 역할을 수행.. 이 점은 카스트제도의 배타적인 측면이 특히 식사와 결혼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남과의 차별을 통해 마련된 자기 정체성은 결국 배타적인 성격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드러냈으며, 이 점은 인도 역사를 통하여 고질적인 병폐가 되었다. 인도가 애초부터 영성의 나라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 측면이 없지 않다.

※ 브라만 : 브라만교에서 힌두교로 이어지는 인도 정통 종교의 사제계급이었던 브라만은 ‘재생족’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두 번 태어났으니 해탈의 자격이 있는 자들이라는 의미이다. 이들은 카스트 제도의 최상위층을 점하며 대중의 영적인 삶을 지도했다.

- 대개의 고대 국가에서는 최상층이 통치자 계급이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정서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며, 이는 인도 사회가 처음부터 정신문화 혹은 종교와 관련된 문화를 삶의 중심에 놓고 보는 전통의 씨앗이 되었다. 육체적 노동을 해야 할 의무를 면제해 준 것에 불과. 대신 이들에게는 오로지 인간의 영성에 관한 문제에만 몰두하게 했다. 이것은 특권인 동시에 의무. 또한 베다의 찬가들이 단지 암송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충실하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스승으로부터 베다를 들어 가슴에 간직하고 전승했던 브라만들의 피나는 노력 덕분.

- 베다는 ‘슈루티’, 즉 영감을 통하여 감지되는 ‘무한자의 리듬’이라 불린다. 영감을 받은 리쉬들에게 전해진 신성한 계시가 슈루티가 된다.

- 카스트 제도가 확고해지고 브라만들의 지위가 격상되면서 베다를 신성시하는 관념들이 더불어 나타난다.

5. 무엇을 베다라고 부르는가?

- 베다는 또한 상히타라고 부르는 본집과 제식서 브라흐마나 그리고 우파니샤드라 불리는 각기 다른 문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상히타이며, 베다가 『리그 베다』『사마 베다』『야주르 베다』『아타르바 베다』로 분류되는 것도 사실 이 상히타의 종류에 따른 것이다.

- 『아타르바 베다』는 앞의 세 베다와는 매우 다른 독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것은 『아타르바 베다』가 아리아인들의 전통이 아니라 토착 선주민들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리그 베다』다음으로 중요한 문헌으로 간주되지만, 오랫동안 베다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 채 전승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기 힌두교 전통에서는 『리그 베다』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우파니샤드의 성자들은 우주와 인간의 실재와 그 의미에 대하여 상히타나 브라흐마나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접근과 해석을 시도하고 있으며, 이것은 우파니샤드 이후 인도 사상 전체에 대한 정신적인 토대가 된다.

- 아란야카는 브라흐마나와 우파니샤드 사이에 오며, 숲에 은거하는 사람들의 명상에 쓰이도록 의도된 것이다. 그가 늙어 숲에 은거하게 될 때 제의식을 대신하는 어떤 것이 필요하게 되는데, 아란야카는 이 목적에 소용된다. 제의식이 지니는 상징적이고 영적인 측면들이 깊이 명상되고, 이러한 명상은 제의식 행위 그 자체를 대신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아란야카는 브라흐마나의 제의식 종교를 우파니샤드의 철학으로 이행해 주는 연결 고리가 된다.

- 베다 본집(상히타)의 찬가들은 리쉬들에 의한 영감의 산물임에 비하여, 브라흐마나는 제관들의 작업이며, 우파니샤드는 철학자들의 명상이다. 베다의 이 세 부분들이 통시적인 순차성을 지니며 형성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에 나타나는 종교 사상 또한 자연 종교에서 지식 종교로, 제식 종교에서 영성 종교로 이행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6. 시간의 강은 신마저 바꿔 버렸다

- 베의 종교 또한 예외일 수 없다. 베다에 나타나는 온갖 신들 역시 인간의 욕구와 필요에 따라 탄생하였다.

- 제사의 중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제사의 여러 요소가 신격화되는 점이라든가 초기 베다에 등장하는 여러 전쟁과 정복의 신들이 차츰 농경신으로 성격을 바꿔 가는 것도 그렇다. - 신들의 종류가 3억 3,033개나 된다.

- 신과 인간은 서로에게 의존한다. 인간은 신의 위력이 감퇴되지 않도록 공물을 바쳐 힘을 유지하게 하며, 반대로 신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다. 신들은 자신들이 지닌 성격과 능력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유익함을 줌으로써 위대하며, 따라서 숭배될 가치가 있는 것이다.

- 인드라는 원래 뇌우와 관련된 신이었으나, 베다에서는 차츰 선주민들과의 전쟁에서 아리아인들에게 승리를 주는 신으로 변모되었다. 이 신은 나중에 제석천이라는 이름으로 불교에 수용되어 범천과 더불어 불법을 수호하는 신이 된다. 신들의 속성이 물질적인 것에서 인간적인 것, 도덕적인 것으로 쉴새없이 변화한다.

- 갖가지 신들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이야기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설득력을 잃고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여러 신들은 천, 공, 지 삼계의 신들로 나누기도 하였다. 이러한 작업이 진행되며 차츰 초기 베다의 다신교적인 성격이 단일신교라는 베다 특유의 종교 형태로 발전해간다. 어떤 한 신만이 최고의 지위를 점하는 주신으로 선택된다. - 다른 모든 신을 부정하는 유일신이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최고위급 신들 사이에도 상하의 구별이 없었던 것은 당시 아리아인 부족들이 하나의 단위로 통일된 채 위계질서를 갖지 않고 제각기 독립되어 살고 있던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 우주와 신성에 대한 통찰이 깊어 감에 따라서, 다수의 신들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자연스러운 경향이 나타났다.

7. 일신교와 다신교, 그리고 일원론의 절묘한 통일

- 인도 종교에서 최고의 신은 언제나 신들 중의 신이라는 성격이 드러날 뿐 오로지 하나밖에 없는 신이라는 생각은 자리잡지 못한다. 말하자면 다양성을 배제한 통일이 아니라, 다양성 속의 통일이다. 베다 시대 후기에 확립되는 ‘다양성에 대한 포용’의 자세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현재 인도인의 일상적인 삶의 특징으로 되어 있다.

- 브라흐만이 무형ㆍ순수ㆍ무감정의 존재로 깊은 사색과 영감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우주의 궁극적 원리를 말한다면, 이슈와라는 따스한 가슴으로 지닌 감성적인 사람들에 의하여 인자하고 자비로운 최고의 신으로 숭배된다.

- 인간에게는 신을 유한한 인간과 대조해서 무한한 인격으로 만들려는 경향이 있다. 극도로 논리적인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인격신 없는 종교란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성격을 지닌다.

- 철학자는 자신의 보잘것없는 언어로 영원한 궁극자를 묘사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무한하고 장엄한 우주의 모습이나 온갖 존재의 원천이며 궁극적인 것에 대해, 불충분하지만 대신 이해하기 쉬운 상징을 고안해 내는 것이 인간에게는 불가피하다. 자신의 짧은 지식에 매여있는 인간에게는 이해하기 쉽고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징, 즉 우상이 필요한 것이다. 형체도 없고 무한하고 영원한 궁극자를 쉽게 이해하고 가까이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궁극자에 일종의 사람과 같은 성질, 즉 인격을 부여하는 것은 궁극자의 존재를 제한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인격을 갖춘 존재는 ‘나’가 되고 나는 ‘다른 나’와 구별되는 존재가 된다. 즉 다른 나를 포용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인격화된 궁극자가 특정인에게 나타나 계시를 주고 있다면 그 궁극자는 그 시간에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 계시를 줄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즉 우주와 모든 존재를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 형태가 없는 우주의 절대자가 형태를 갖고, 비인격적인 우주의 원리가 인격적인 존재로 되면서, 모든 시간과 공간에 존재할 수 있는 대신 특정 시간과 특정 공간만을 차지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 우리가 이렇게 절대자를 숭배의 대상으로 하는 순간에, 그것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닌 특정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는 존재와 인연을 맺으려면, 신 역시 절대자의 위치를 포기하고 특수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 신이 완전하다면 종교가 불가능하며, 신이 불완전하다면 종교 역시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대중적인 종교와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 양자 모두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절대 정신은 무차별적으로 ‘그’ 혹은 ‘그것’으로 불린다. 놀라운 것은 그와 같은 심원한 통찰이 바로 베다 시대라는 인류 정신사의 여명기에 나타났다는 점이다.

8. 정복당한 자들의 베다, 『아타르바』

- 『아타르바 베다』에서는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중심 주제가 바로 이러한 주문들이다. 초기 베다의 제의식 종교는 주술 종교로 대체되고, 악귀를 쫓고 부릴 줄 아는 주술사가 최고의 지위를 누린다.

- 『아타르바 베다』는 사제들이 중심이 된 제사 종교의 전통이 이어지는 베다 시대가 아니라, 일반 대중들 가운데 널리 성행했던, 아직 아리아적인 요소에 물들지 않은 민간 종교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유일한 책이다. 대체로 『아타르바 베다』는 사제들의 종교라기보다는 일반 대중들의 종교였던 것 같다.

- 사악하고 무분별한 주술은 비난되고 선한 목적의 주술이 장려되었다. 선주민들의 주술 종교는 아리아인들의 제의식 종교를 통하여 정화되는 장면이 『아타르바 베다』의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후기 힌두교에서는 주술과 제의식을 본질적으로 구별하지 않는다. 이 둘은 모두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행해진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아타르바 베다』의 여러 곳에서 고행을 통하여 우주의 신비를 체득하는 위대한 고행자들에 관한 언급을 접한다.

- 초자연력을 인간 이성의 한계 안으로 끌어들이려 한다는 점에서 주술은 인도에서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싹트게 한 일면이 있다. - 『아타르바 베다』는 주술이나 악귀들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어떤 부분에서는 『리그 베다』를 넘어서는 우파니샤드에서와 같은 깊은 철학적인 사색의 흔적을 드러낸다. 이외에도 후기 힌두교의 쉬바 여신으로 발전해 가는 ‘루드라’라는 신이 등장한다. 소를 신성시하는 경향히 현저해지고, 행복으로 가득 찬 범계에 대한 언급이 보이는가 하면 공포와 고통들로 가득 찬 지옥에 대해서도 상당히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범계에 대한 묘사가 황홀해질수록 지옥에 대한 묘사는 점점 더 섬뜩한 공포로 물든다.

9. 영적 삶으로 돌아가는 정신의 아침

-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우파니샤드는 극단적인 형식주의 속에 죽어 가는 종교의 참된 가치를 부활시키려는 운동의 결실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파니샤드는 베다 종교에 대한 일대 혁신인 동시에 그것의 완성이다. 베다를 계승했으면서도 동시에 반베다적인 셈이다. - 우파니샤드에서 우리는 영적인 삶의 원천으로 다시 돌아가는 인간 정신의 신선한 아침을 본다. - 우파니샤드의 최종 목적은 인간을 바른 삶으로 인도하는 데 있다.

- 사실 세계의 모든 고등 종교는 그 출발에 있어 어느 정도의 염세적인 요소를 띠고 있다. 우리의 현존에 원죄의 십자가를 지우든, 업의 굴레로 속박하든, 아무튼 현실은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출발하는 경우는 드물다.

10. 세속의 승리자만이 갈 수 있는 길, 산야신

- 베다 이래로 힌두교 전통은 네 가지 단계를 거치는 이상적인 삶의 형태를 강조하고 있다. 첫 단계는 금욕과 학습의 기간이다. 두 번째 단계는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단계다. 세 번째 단계는 경제적인 기반과 가업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숲으로 들어가 명상하는 단계다. 아내와 함께 혹은 무리를 이루어서 숲으로 들어가 명상에 전념한다. 마지막 단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운수의 길을 떠난다. 이때는 탁발이 주요 생계수단이다.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세상을 떠도는 산야신이 된다. 인생의 마지막 단계는 포기에 바쳐진다. 행위도 가족도 사회도 초월하며, 해탈에 대한 집착도 벗어 버린다. 이 네 단계를 통하여 이루어야 할 인생의 목적은 부의 축적, 욕망의 실현, 의무의 실천, 그리고 해탈이다.

- 누구나 산야신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세속의 삶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힌두교는 철저하게 길의 종교다. 힌두교는 목적보다는 길 자체에 충실할 때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종교인 것이다. - 근자에 들어 인도 사상에 대한 관심이 가난한 인도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물질의 풍요를 체험한 서구 사람들에 있다는 것은 이점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11. 포기할 줄 아는 가슴의 지혜

- 베다가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포기의 철학’이다. 쌓아 올리는 것은 결국 버리기 위하여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 ‘포기의 철학’은 인간의 무게 중심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인간의 가장 내밀한 본질은 지가 아니라 정이다.



❍ 2부 불경 - 대자유를 향한 마지막 집착

1. 인도적 전통의 반항아

- 윤회와 업 같은 인도의 전통적인 사상들을 받아들이면서도 베다의 권위를 거부하고 브라만교의 고착화된 폐습을 부정하는 일군의 무리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출가사문(원래는 고대 인도에서 베다 성전의 권위를 정면으로 부정한 혁신적인 출가 수행자를 총칭하는 말이었으나 후대에는 단순히 출가한 승려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들이었다.

- 모든 것을 신이 창조했다면 세상의 온갖 고뇌와 모순도 신이 창조했다는 말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는 인간의 행위나 생각에 의해선 결코 자신의 운명이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모든 것이 전생의 업에 의해 결정될 수 밖에 없다는 입장도 배격했다. - 싯다르타는 속세의 욕망과 출가사문의 고행이라는 양 극단 너머의 중도에서 삶의 무상함을 씻어 줄 진리를 구한다.

2. ‘친숙하고 편안한 모든 것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 석가모니는 세계의 시작이나 끝, 존재의 유한함과 무한함, 사후의 세계 등에 대한 규명에 궁극적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석가모니는 이를 독화살을 맞은 사람에 비유하여 이야기하였다. 독화살을 맞은 사람에게 취해야 할 가장 바른 일은 먼저 독화살을 뽑는 것이다.

- 그는 다른 세계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 그는 사후에 신과 함께 살기를 원하는 이들은 이름과 얼굴, 거주지를 비롯한 그 어떤 것도 모르는 여인을 사랑하며 그리워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불경에는 종종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신들의 이야기가 등장하곤 한다. 이는 신들이 비록 인간보다 힘이 세고 오래 살지 모르지만 결국 그들도 ‘존재’인 이상 탄생과 소멸이라는 윤회의 순환 속에 들어있는 덧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 수면 위로 꽃을 드러낸 연꽃은 이미 깨달았다는 점에서, 너무 물 속 깊은 곳에 있는 연꽃은 인연이 없다는 점에서 자신의 가르침이 필요없겠지만, 안간힘을 쓰고 잇는 연꽃에는 자신의 힘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감지

- 석가모니는 존재하는 일체를 영원할 수 없는 무상한 존재임을 일깨웠다. 생겨난 모든 것들은 결국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제행무상)이었다. 이는 어떤 존재라도 주위로부터 독립하여 제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결국 그 인연을 쫓다 보면 인간의 역사, 수많은 존재가 얽혀 이룬 인연의 다발인 우주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책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인연에 따라 존재할 뿐이며 이러한 인연이 다하면 소멸할 뿐이다(제법무아, 불교에서의 법은 어떤 속성, 현상, 질서, 존재, 가르침, 진리 등 여러 의미를 지니는데 여기에서 제법은 모든 존재를 일컫는다). 이러한 세계의 실상을 깨닫고 세상과 하나 되어 번뇌를 여의는 것(열반적정)이 불교도의 최종 목표로, 앞서의 두 가지와 함께 불교 진리의 요체가 되는 삼법인이 된다.

- ‘나’라는 존재 역시 제반 인연의 모음이며, 이러한 인연이 흩어지는 것이 ‘나’의 소멸인 셈이다. 즉 나는 세계의 모음이고 세계는 나의 흩어짐이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연기(서로 연결되어 일어남)라 하는데 12연기를 통해 인간의 무지와 집착과 행위가 사물의 탄생에서 소멸의 과정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밝히고 있다.

- 세계에서 벌어지는 어떤 현상도 반드시 대립되는 현상을 전제로 하며(기쁨은 슬픔을, 선은 악을, 생명은 죽음을)그 대립되는 현상을 부정함으로써 하나의 현상은 존재한다.

- ‘나’에 집착하는 제자에게는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무아론)’고 이야기 하였다. 동시에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허무에 빠진 제자에게는 ‘나란 존재한다(유아론)’고 가르쳤다.

- 부처는 앞서 얘기한 대로 욕망이나 욕망의 주체, 그리고 욕망의 대상(그 모든 존재와 현상, 언어까지)은 늘 변화에 굴복하고 세상은 덧없이 변하게 마련이라고 설파하였다. 이때 해탈은 바로 절대화된 존재의 도그마에서 해방되어 결코 충족될 수 없는 탐욕과 집착을 지양하며 우주의 실상을 그대로 보는 것을 말한다.

- 긴 시간을 옆에서 시봉하며 다가오는 이별의 순간을 슬퍼하는 아난다에게 석가모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난다야, 슬퍼하지 말아라. 사람에게 친숙하고 편안하게 여겨졌던 모든 것은 소멸하고 사라질 수밖에 없다.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다. 일단 생겨난 것이 어찌 소멸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 “내가 열반에 들거든 법과 스스로에 의지하여 모든 장애를 극복해 가라. 나를 섬겼던 것처럼 계율을 공경하고 스승으로 삼으라. 부처의 제자가 길흉점을 보며 개인적인 치부를 해선 안 된다. 검소하게 사는 법을 익혀라. 최상의 공양은 수레바퀴만한 아름다운 꽃을 부처에게 뿌리는 데 있지 않다. 법(불교의 진리)을 법답게 받아 법답게 실천하여 스스로 깨달음의 꽃을 피우는 것, ‘나 없음’을 깨닫는 것이 인생의 최고 목표이며 최상의 공양이다. 게으르지 마라. 나는 게으르지 않아 스스로 바른 깨달음을 얻었고 한량없이 많은 선행도 역시 게으르지 않아 얻을 수 있었다. 일체 만물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란 없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이다.”

3. 영원히 계속되는 불경 편찬의 역사

- 석가족 출신으로 뒤늦게 출가한 한 비구승 때문이었다. “부처가 계실 때는 법과 계율이 엄중하여 항상 잔소리가 많았지만 이제 그 늙은이가 가셨으니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되어 기쁘지 않으냐. 이제부터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다.”라는 말을 하게 된다. 카시야파를 비롯한 많은 제자들을 당혹스럽게 하였다. 그들은 인생과 교단의 올바른 방향을 위해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히 지키는 것이 최상이라 생각하여 경전 편찬을 서두르게 된다.

-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법은 아난다(석가모니의 사촌동생으로 시자가 되어 25년간 석가모니를 보좌하면서 가장 은 설법을 들었다. 따라서 그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에서도 다문제일.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부처님의 설법 가운데 8만 2천 가지와 다른 사람이 그에게 전해 준 2천 가지 이야기를 기억해 냈다고 한다)가 암송하고 계율은 우팔리(10대 제자 중 계율제일. 이 외에도 10대 제자들 중에는 지혜제일, 신통제일, 설법제일 등이 있어 독특한 불교의 흐름을 만들어 간다)가 암송하면 5백 대중은 이에 대한 진위 여부를 논의 .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정식 인정되면 이들이 함께 암송하며 기억하는 방식으로 작업이 진행. 즉 자료의 출처도 제자들의 기억이었고 정식으로 인정된 경전도 머릿속에 기록하는 작업이었다. 당시 인도에선 절대적이고 무한한 진리의 세계를 범속한 문자로 고정시키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강했다. 7개월 동안에 걸친 작업 끝에 초기 불교의 경전과 계율이 정비. 이때 편찬된 경전이 『아가마』즉 『아함경』이라 불리는 책들이다.

- 진보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던 인물들의 대표는 아난다였고 보수적인 그룹의 대표는 마하카시야파였다. 문제는 아난다에게 있었다. 그는 출가 이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어갈 때까지 줄 곧 최측근에서 시봉하였던 사람으로 석가모니가 설한 법을 늘 옆에서 상세히 들을 수 있었던 제자였다. 그렇지만 카시야파는 아난다를 경전 편집 모임에서 제외하려 했다. 수행을 게을리 하여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기록에 의하면 카시야파의 문책을 받은 아난다는 7일간의 밤낮없는 피나는 노력 끝에 깨달음을 얻은 뒤 카시야파의 인가를 받아 경전 편집에 동참한 것으로 되어 있다.

- 싯다르타를 양육한 마하파제파티는 석가모니를 쫓아 출가하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아난다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결국 아난다는 석가모니로부터 “여성도 물론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 수행이 어려운 길이지만 그래도 좋다면 출가를 허락한다.”는 대답을 얻어 냄으로써 그녀의 소원을 이뤄 줄 수 있었다. 이리하여 세계 종교사상 유례없이 여성이 출가를 하여 수행 생활을 하게 되었다. - 아울러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계율은 버려도 좋다고 한 석가모니의 발언과 관련하여 아난다는 또 구설수에 올랐다.

- 인도에는 불교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남자라면 반드시 한 번은 출가하여 인생과 우주의 근본에 대하여 사색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는데, 특히 석가모니의 교단은 인도 전래의 수행 풍토에 비추어 계율을 엄수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생존 당시부터 사회의 논란이 되고 있었다.

- 아무튼 계율과 법이 편찬되는 과정에서 일군의 무리들이 이탈하여 별도의 노선을 가게 된다. 이들 중에는 10대 제자에 들어가는 부루나와 라훌라, 그리고 사리푸트라의 제자인 교범바제, 그리고 천나비구, 토라난타 비구니 등 당시에는 신망을 받고 있던 출가자들이 많았다. 자신들이 직접 들은 석가모니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겠다고 공언하며 각자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이는 카시야파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비구승들의 입장이 경전 편찬에 많이 투영되었음을 반증해 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 1차 결집이 불경의 완성을 본 사건이 아니라 장구한 불경 편찬 역사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특히 대승불교에선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도록 안내하여 주는 경전’이라면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하는 차원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 불교에서는 경전을 ‘수트라’라고 하는데 원래 실이나 끈을 뜻하던 의미가 ‘실로 꿰어서 중생을 보호하고 거두어 지닌다’는 의미로 변화한 것이다. 한자로 ‘경전’이라 할 때의 경은 ‘날실’의 의미가 있으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규범’이라는 의미가 깃들어있다. - 그러나 불교에서는 불경 자체가 신성한 가치를 지니거나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석가모니에 따를 경우 그의 가르침은 우리가 세속(차안, 이쪽 언덕)에서 깨달음의 세계(피안, 저쪽 언덕)에 이르는 데 뗏목 역할을 하는 일종의 방편일 뿐이다.

4. 이상 사회를 향한 전진기지

- 자신의 목숨을 구해 달라는 비둘기와 굶주림에 지쳐 죽을 것만 같다는 독수리의 말을 들으며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 고민한다. 결국 그는 비둘기의 살점만큼 자신의 살점을 저울 위에 올려놓게 된다. 결국 가리왕 자신이 올라가고 나자 저울은 평형을 이루고 비둘기의 무게와 같아졌다. 매우 작위적으로 들리는 가리왕 이야기의 초점은 모든 생명의 무게는 고귀하고 존엄하다는 점이다.

※ 보리수로 표현된 석가모니 : 석가모니는 꺼진 불이 장작을 필요로 하지 않듯이 자신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석가모니 임멸 후 5백 년 정도가 지나도록 불교도들은 인간의 모습을 한 부처상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필요에 따라 수례바퀴, 보리수, 사리탑 등을 통해 부처의 존재를 표현했다.

- 석가모니는 한곳에 머무르게 되었을 때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했다. 사람이 오랫동안 같은 장소에서 살게 되면 재산을 모으고 명성에 조바심을 내기 시작하며 사람들과의 규칙적인 접촉을 통해 여러 잡다한 의무와 집착이 생겨난다고 보았다. 따라서 비가 오는 우기 동안만 사원이나 동굴에서 외출을 삼가고 수행에 전념(우리나라에서는 동안거와 하안거로 바뀌어 이때는 한곳에 머물러 수행에만 전념한다)하고 그 외에는 편력 수행을 떠나도록 하였다. 아울러 출가승들은 정해진 숫자 이상의 집에서 걸식을 하여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도록 하였고 모든 재산을 공동 소유로 하였다.

- 그는 출가 수행자의 집단이 사회 개혁을 추진하는 근거지로서의 역할을 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승가는 부처와 부처의 가르침과 함께 불교의 3대 구성 요소(불법승)가 되었다.

5. 전설의 성군, 전륜성왕

- 영국의 한 유명한 역사가가 “역사에 등장하는 수만의 군주 가운데서도 어쩌면 아소카의 이름은 최고로 빛나는 유일한 별이다.”라고 극찬했던 아소카 대왕의 휘광은 그가 건설한 제국 때문이 아니다. 그는 진정한 정복이란 무력이 아닌 도덕적인 감화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깨닫는다.

6. 새로운 역사를 예비하는 대중부의 반란

- 약 1세기 동안 상좌부의 완고한 배타주의와 싸우면서 대중부는 일반신도들과 불교의 접촉면적을 넓히고자 노력하였다.

- 아소카 대왕 이후 1~2세기가 지나면서 부처를 인간의 형상으로 만들어 경배하는 전통이 정착된다. 그리고 열반이나 다르마(법)와 같은 이해하기 힘든 불교의 주제보다 윤회와 업 같은 보다 대중적인 주제들이 빈번하게 언급되기 시작한다.

- 기존 승려들은 1차 결집 때 편찬된 이외의 것을 경전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대중부는 부처의 사후 후대에 창작되어 덧붙여진 경전들도 진실한 것이라고 인정했다. 이는 불교의 교리와 경전이 석가모니가 실존했던 시대의 문제의식에 국한되지 않고 계속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셈이 되었다. 즉 실제 부처의 언행이었냐의 여부보다 불교 정신에 합당한 것인가의 여부가 더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 것이다.

- 대승불교의 이념은 한마디로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다. 즉 수행을 통해 스스로 해탈을 구하고 한편에선 보살행을 실천하여 중생의 삶을 구제한다는 운동이다. - 대승불교 추기에 성립한 경전으로 밝혀진 『금강경』이나『아촉불국경』『아미타경』등의 성립 시기를 대략 기원전 1세기 전후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상과 같은 추정은 대강 들어맞는다. - 대승경전은 이에 비해 그 범위가 확대되어 천상계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상징과 비유가 극대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 사람들을 당혹하게 하는 것은 동일하거나 유사한 문장이 지루할 정도로 되풀이되는 점이다. 때문에 독자에 따라서는 현실과 전혀 무관한 경전이라 생각될 요소가 많다. 그러나 대승경전은 누구나 수행을 열심히 하면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석가모니의 본래 뜻을 회복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 대승불교 이전에는 생사의 윤회에서 해탈하여 절대자유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아라한이라 불렀다. 아라한은 부처를 지칭하는 열 가지 호칭 중의 하나이지만 부처와 동격의 성자는 아니었다. 부처는 오직 석가모니 한 분뿐으로 부처보다 한 단계 낮은 경지의 성자를 아라한이라 하여 부처님과 구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불교의 교단 조직이 완전하게 정비되면서 후에 정착된 생각으로, 대승불교는 이를 다시 석가모니의 본래 뜻으로 되돌린 것

- 이전의 불교는 일세에 한 사람의 부처만이 존재한다고 가르쳤지만 대승경전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모두 ‘부처의 후보자’인 보살이라 하였다. 이는 더 나아가 자신이 원래 부처임을 모르고 번뇌 속에 방황하는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자원해서 인간으로 태어난 존재가 보살이라는 ‘원생보살’ 사상으로까지 발전한다. 개인의 구원과 해탈에만 머물러 있던 기존의 전통에서 벗어나 때로는 자신의 해탈을 미루면서 중생 구제에 힘쓰는 보살이란 존재가 새롭게 설정된 것이다.

7. 노자의 소개로 공자와 만나다

- 유불선의 한 축을 이루는 불교가 들어옴으로써 동아시아 3대 사상적 조류가 정립되는 계기들이 마련되어 가고 있었다. 이는 서구의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조우에 비견될 만한 동아시아의 일대 사건이었다.

- 불교와 중국의 전통 사이에는 기본적인 윤리의식에서부터 시작하여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부닥친 것이 국왕에 대한 견해 차이였다. 불교에선 국왕이란 종국적으로 세속의 한 중생에 불과한 존재였다. 이와 함께 불교와 유교가 충돌하는 원인이 된 것이 ‘출가’의 문제였다. 유교적인 입장에선 대를 끊기게 할 수도 잇는 일로 조상에게 큰 죄를 짓고 많은 경우 인륜을 저버리는 일로 간주될 수도 있었다. 기질적으로 중국인은 상식을 존중하는 매우 현실적인 민족이었다. 이들에게 있어 인간의 사회를 떠난 초월적인 세계는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아울러 중국인들은 의관(옷과 갓)을 예의에 맞게 제대로 입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는데 이 점에서도 불교는 중국의 토착문화와 충돌하게 되었다. 중국에선 인간의 의식과 인격에 대해 인도처럼 복잡하고 세세한 분석이 별로 없었다. 중국에서는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설명들이 없었지만 불교에서는 이와 관련된 많은 설명들이 있었다. 본적인 언어 구조에 있어서도 중국과 인도는 극과 극일 만큼 차이가 컸다. 당시 인도는 세계에서 최고로 문법이 발달한 언어 체계를 갖고 있었지만 중국의 한문은 오히려 이와 반대되는 언어 체계였다. 아울러 중국인은 시간과 공간을 유한한 것으로 보며 몇 세대, 무슨 왕조와 황제가 다스리던 시기 등으로 시간을 파악했지만 인도인은 그와 달리 시공을 무한한 것으로 상상하며 때로는 수십억년에 이르는 우주적인 영겁의 단위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였다.

- 이 무렵 전래된 불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그 양태가 달랐다. 예컨대 중국인들은 부처를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절대신과 같은 존재로 받아들였다. 사실 불교는 불법의 근본 정신을 깨닫고 전파하는데 도움만 된다면 이를 위한 방편에 별로 구애받지 않는 종교였다. 불교의 이러한 관대한 문화는 여러 지방의 토착신들을 불교와 보호자로 받아들이거나 불법의 가르침을 위한 여러 신으로 새롭게 해석해 내곤 했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면 종교의 전파에 있어 가장 확실하고 직접적인 효과를 주었던 것은 주술적인 효과나 초자연적인 기적이었다. - 불교 전파 초기에 부처는 여러 다양한 신과 주술적인 문화를 간직한 중국의 도교사원의 한 신으로 종종 알려졌다.

- 평등설은 대중의 호응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현재의 고통은 과거에 자신이 지은 업의 결과이므로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내생에 원하는 삶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삶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면 된다는 희망이 제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8. 생사를 넘나드는 천 년의 유학길

- 많은 군주들은 불교에 있는 전륜성왕이란 이미지를 차용함으로써 세상의 선을 옹호하는 자로서의 위광을 극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 불교는 특정 인간 집단 속에서만 향유될 수 있는 종교로 출발하지 않았고 특정 지역에만 적용될 수 있는 폐쇄적인 규범들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이는 다양한 사상과 문화로 나누어져 있는 기존 세력을 통합하여 거대한 제국을 지탱하는 이념으로 채택하기에 매우 유리한 점이었다.

- 불교의 명상적이고 폭력을 싫어하는 특성은 권력에 대한 물리적인 반항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군주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었다. - 중국문화와 타협, 절충의 길을 걷게 되며 중국화된 불교로 뿌리를 내리게 된다. 아울러 세속적인 권력을 뛰어넘어 삶의 무한한 자유와 가치를 추구해 왔던 불교 교단은 중국적인 군주관을 수용하게 된다. 이는 필연적으로 권력과 친화적인 관계를 맺게 되거나 군주의 보호막 안에 안주하는 흐름을 낳기도 하였다.

- 중국에 맞는 불경의 편찬이었다. 불교와 유교의 대립 속에서 불필요한 마찰이나 오해를 줄이기 위해 중국의 실정에 맞는 불경의 편찬은 긴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 특히 도교의 용어는 불교를 번역하는 데 제한적이나마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가령 ‘가르침’을 뜻하는 다르마는 도로 번역되었고 ‘완전히 깨우친 자’를 뜻하는 아라트(아라한)는 도교에서 신선을 뜻하는 진인으로 번역되었다.

- 초기에는 편찬된 중국 불경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는 서민들을 교화하기 위해 저술된 경전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두 번째, 도교적인 요소를 가미한 불경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유교의 효사상을 나름대로 흡수한 『부모은중경』등 중국의 사상이나 문화와 융합할 수 있는 수많은 경전이 제작되었다.

- 당시 중국 불교의 종파는 중국인의 현실 중시 경향에 따라 매우 체계적인 논리를 만들어 이후 동아시아 불교를 주도하게 된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현재의 불교가 당나라 때 이룩한 불교의 업적을 아직도 뛰어넘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 『금강경』『능가경』『유마경』등 인도에서 편찬된 불경들이 초기 선종의 발전을 주도했지만 이후에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원각경』『능엄경』『대승기신론』등이 오히려 중요하게 취급

- 중국에는 유교를 비롯한 제자백가의 탁월한 정치와 윤리 사상이 있었다. 이들은 매우 뛰어난 사상들로 세계적으로도 뛰어난 지적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종교와 관련된 부분은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으며 매우 조야했다. 이러한 중국에 불교가 들어옴으로써 중국의 사상이나 종교계는 그 생각이 깊어지고 넓어지게 되었다. 불교에 대항하여 발생한 도교는 매우 미신적 요소가 강했는데 송나라 때에 이르면 환골탈태하여 매우 지적인 사상 체계로 바뀐다. 이것은 전적으로 불교의 영향이 크다.

- 당나라 이후 불교의 교리 체계에 한편 고무되고 한편 발달하여 ‘성리학’이나 ‘양명학’을 탄생시킨 것이다.

9. 한순간에 우주를 담는다

- 중국 근대 계몽사상가 중의 한 사람인 양계초는 선종은 중국인에 의해 중국인을 위한 불교로 재생된 불교이며, 이것은 인도 불교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전세계에서 오직 중국에서만 가능했던 중국인의 종교 사상이라고 지적하였다. - 인도 불교에서의 선을 여래선, 중국에서의 선을 조사선이라 하여 이 둘을 구분

- 홍인 선사를 이은 신수는 점진적인 수행을 통해 점점 깨달음에 가깝게 가는 점수를 주장하였다. 주로 그가 활동한 무대가 중국 양자강 이북이어서 북종선이라 한다. 같은 홍인 선사의 문하에서 수학을 한 혜능은 단박에 우주의 진리를 꿰뚫어 버리는 돈오를 주장했는데 그의 활동무대는 양자강 이남이어서 남종선이라 부른다. 그러다 신수의 북종선은 남종선의 혜능으로 통일되며 마침내 중국 선종의 르네상스가 열리게 된다. 한국 불교의 최대 종파인 조계종의 명칭도 혜능 선사가 활동한 조계산의 명칭에서 유래하고 있다.

- “이미 지나 버린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오지 않은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지금 이 순간 현재의 마음도 매순간 사라져 얻을 수 없는데 스님은 어떤 마음에 점을 찍어 점심을 들고자 하시는 겁니까?”

10. 소도에 들어선 한국의 사원

- 미르(용의 옛말)를 신성시하던 우리의 전통 풍습 역시 불교의 미륵신앙과 결합된다. - 한국 불교는 각 종파의 차이가 별로 없다는 점에서 통불교라 불리기도 한다. - 중국에서 수많은 불경이 제작된 것과 달리 한국에서 제작된 불경은 거의 없다. 다만 『금강삼매경』은 한국에서 제작된 경전일 수도 있다는 조심스런 주장이 있다.

11. 우리는 왜 또다시 미륵불을 기다리는가

『불경』에 대해 더 알거나 깊게 배우려 하신다면

- 『잡아함경』, 선종에서 특히 중시하며 불교사상의 핵심을 찌르는 『금강경』, 대승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경전이라 할 수 있는 『묘법연화경』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즐겨 보는 중요한 경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벽암록』이나『전등록』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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