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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0 09:00

문화로 읽는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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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사계절/2.25일 1130 사무실에서



❑ 자연에서 문화ㆍ문명으로

1. 선사 시대 _ 초기 인류의 문화

❖ 문자의 기원

- 원숭이인가 사람인가 : 가장 오래된 인류라고 여겨지는 것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이다. 뇌의 부피가 500cc밖에 되지 않아서 그리 현명한 존재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직립보행’을 원숭이와 구별되는 결정적인 요소. 이것의 증거는 두 발로 걸은 흔적이 있는 화석을 통해 알 수 있다. 두 손이 자유로워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오직 인간만이 죽은 동료의 사체를 정성껏 묻어준다.

- 네안데르탈인은 지금의 우리보다 몸집이 훨씬 크고 뇌의 부피도 더 컸다. 이들은 뛰어난 사냥꾼이었다. 이들이 사냥하여 먹은 짐승은 코뿔소, 맘모스, 들소, 말, 사슴, 멧돼지 따위로 아주 다양했다. 매장 관습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지능도 꽤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여러 민족의 설화에 등장하는 거인이 그 옛날 인류가 마주친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기억의 산물이 아닐까 짐작해 보기도 한다.

- 심지어는 네안데르탈인이 아직도 일부 살아남아 있으며, 가끔 신문과 주간지 1면을 장식하는 히말라야의 설인이 그들이라는 흥미진진하면서도 황당무계한 주장이 제기

- 채집과 농경, 어느 쪽이 더 잘 먹었을까? : 현생인류(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지구상에 등장한 것은 4~5만 년 전이다. 채집과 사냥으로 생활했던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살던 신석기 시대 사람들보다 훨씬 잘 먹고 더 건강했다는 점은 유골을 통해서 명백하게 알 수 있다. 구석기 시대에 1제곱킬로미터당 살 수 있는 사람 수는 0.1~1명에 지나지 않았다. 농경이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논란거리이다. 정설은 약 6천 년 전에 서남아시아의 비옥한 초승달지역(팔레스타인에서 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지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지만, 자바나 중국이 더 먼저라는 주장도 있다.

- 정착과 인구 증가, 문화의 발달 : 신석기 시대 이후 사람들은 흔히 못 먹고 병에 걸려서 일찍 죽는 가련한 상태에 빠질 위험이 컸다. 다시 말하면, 정착 생활 이후 ‘집단전체’로 보면 비교적 안정적으로 인구를 유지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500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안내서 하나가 인도에서 발견되었다. 그 내용은 돌로 제단을 짓는 데 필요한 수학적인 해설이었는데,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핵심원리였다. 그 후 고대 문명의 여러 거석 건조물들을 조사한 결과 비슷한 원리에 의해 지어졌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 문자의 기원 : 가장 오래된 문자는 기원전 3200년경에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수메르 문자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1999년 파키스탄의 인더스 강 유역의 한 골짜기에서 이보다 적어도 100년 정도 이른 시기의 문자로 보이는 유물이 발견되어서 정설이 흔들리게 되었다. 최근 이집트의 한 무덤에서 기원전 3300년에서 기원전 3200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문자의 흔적이 발견되어, 이것도 최초의 문자 기록의 후보가 됨 직하다.



2. 길가메시 서사시 _ 최초의 문명 이야기

❖ 함무라비 법전

- 문명이 홍수 통제에서 시작되었다? : 왜 네 지역에서만 문명이 발생했는가? 이에 대한 통상적인 답은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 이론이다. 강의 범람을 막고 홍수가 난 뒤 농경지를 재정비하기 위해서는 한 마을 수준의 작업으로는 힘들고 광범위한 지역 전체가 동원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중앙의 조직이 필요하며, 또 강압에 의해 사람들을 동원하기보다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돌리는 신정정치가 확립되어야 한다. 이집트 문명의 파라오 체제가 그런 대표적인 예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초기의 문자 기록들을 보면, 중앙집권화와 관개 시설의 정비는 동시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시차를 두고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명의 ‘발전’ 과정이라면 모를까 문명의 ‘발흥’에 대한 설명은 원래의 주장과는 차이가 나게 된다.

- 길가메시 서사시에 담긴 첫 문명의 모습 : 수메르와 아카드의 도시국가들, 바빌론 왕국의 메소포타미아 통일, 카시트족과 히타이트의 침입, 미탄니의 흥성, 아시리아의 대통일, 칼데아를 비롯한 여러 국가로 분열, 다시 페르시아에 의한 대통일 등 복잡한 변화를 겪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메소포타미아의 지형이 툭 트여 있어서 주변의 고원 지대나 사막 지대를 통해 끊임없이 이민족이 침입해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전반적으로 파괴와 건설이 반복되었다는 점, 그리고 거대한 국제사회 속에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 옛날에 지혜의 신인 에아가 대홍수를 피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큰 방주를 만들고 그 안에 가족과 온갖 가축을 싣고는 7일 동안을 물 위에서 표류하였다. 그는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그러나 앉을 곳을 찾지 못한 비둘기는 곧 돌아왔다. 다음에는 제비를 날려 보냈으나 마찬가지로 곧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까마귀를 날려 보내자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물이 모두 마른 것을 알게 된 노인은 가족과 가축과 함께 땅에 내려서 하늘에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 차가운 샘물이 나오는 곳을 찾아 그 샘물에 들어가 목욕을 하였다. 그때 뱀 한 마리가 지나가다 그 풀을 보고는 냉큼 먹어 버렸다. 그러자 뱀은 곧 허물을 벗더니 젊음을 되찾았다.

-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이 지역에 기원전 2900년에서 기원전 2600년에 홍수가 몹시 잦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이 당시 이 설화가 형성되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이 성경의 홍수 설화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3. 이집트 문명

❖ 이집트 상형문자 맛보기

- 피라미드는 전제정치의 산물일까? : 첫 번째 사람들은 농한기에만 나와서 일을 했으며 그것도 강제 노역이 아니라 식량을 지원 받았기 때문에, 아주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일종의 ‘영세민 취로 사업’이라고 보아도 좋다. 두 번째 사항은 언젠가 부활해서 영원한 삶을 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활한 뒤에 대한 준비에 매우 큰 공을 들였다.

- 죽음과 부활, 이집트 문화의 키워드 :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신성문자, 곧 히에로글리프라고도 하는데, 이는 그리스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이 말은 ‘신성하다’는 뜻의 히에로스와 ‘새기다, 조각하다’는 뜻의 글루페인이 합쳐진 말이다.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의 문자를 보고 그것이 어떤 성스러움을 조각한 것으로 보았다. 이집트인들은 상형문자 기호들의 효력을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글자 한 자 한 자에 정성을 쏟았다. 위험한 뱀을 나타낼 때에는 그 글자에 칼을 꽂아서 위험을 방지하려고 할 정도였다.

❖ 이집트 상형문자 맛보기 : 이집트인들은 생명이 귀를 통해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귀가 있어서 들을 수 있으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살아간다는 것은 귀 기울일 줄 알고 듣는 것을 배우고, 그런 뒤에 신발끈을 매서 걷고 행동하고 마침내 천상의 빛을 사로잡는 거울이 되는 과정이었다. (크리스티앙 자크의 이집트 상형문자 이야기 중에서)

4. 에게 문명

- 점토판에 새겨진 에게 문명의 진실 : 그리스에서만 ‘폴리스’라는 소도시 국가 단위의 사회가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것이 그리스 문명의 가장 큰 특징인 시민의 자유와 그리스적인 이성을 발전시킨 터전이 되었다고 배웠다. 그런데 점토판의 내용을 토대로 유추해 보니 그리스 문명의 출발점인 에게 문명 시기의 사회 구성은 그런 설명과는 전혀 다르다. 고대 그리스 문명이 출발점에서는 본질적으로 똑같은 신정정치 체제였다는 점은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폴리스 체제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기존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어야만 한다. 바로 그런 충격을 준 사건은 기원전 1200년 도는 1100년 무렵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시작된 도리아족의 남하이다. 충격이 얼마만큼 컸냐 하면 그리스 세계가 그동안 사용했던 선문자 체계를 완전히 잊어먹고 그야말로 암흑시대로 들어가 버릴 정도였다.

- 암흑시대가 새 문화를 낳다 : 문자가 사라지고 난 다음 남은 것은 예전의 소문과 전언의 문화, 곧 미토스(mythos, ‘속삭이듯 말하다’라는 뜻의 이 말에서 나중에 myth, 곧 신화라는 낱말이 만들어졌다)였다. 그 내용은 찬란했던 시절의 대왕과 전사들의 영웅적인 행위 같은 것들이다. 그리스 신화는 이렇게 암흑시대(B.C. 1200~B.C. 750)에 사람들의 집단적인 심성 속에서 자라난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혼란기에 방어가 쉬운 지역을 골랐고, 규모가 작은 도시 형태를 띠었다. 이것이 바로 폴리스였다. 이전의 신정정치는 완전히 사라졌다. 완전히 새 판을 짜고 다시 시작하는 까닭에 정말로 ‘모든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였다. 우주는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불인가 물인가 원자인가, 이런 것들로 시작해서, 새 공동체에서 정의는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와 같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일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측면에 대해 질문하고 성찰하게 되었다. 그 지혜를 그리스어로 소피아라고 하며,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인 소피스트가 등장하게 되었다.

5. 안티고네의 고뇌 _ 그리스의 비극과 민주주의

❖ 『안티고네』중 크레온 왕과 아들 하이몬의 대화

- 아테네 민주주의의 배경 :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라고 말했다. 엄밀히 따지면 이 말은 오역이다. 이때 ‘폴리티컬’은 ‘폴리스의’라는 뜻이고,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본래 뜻은 ‘인간은 폴리스의 동물’, 곧 폴리스에 속해야만 안전하게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상공업의 발달로 ‘부익부 빈익빈’상태가 심화된 것이다. 심각한 사회 문제가 야기되자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방안들이 제시되었다. 그 중 하나는 입법이다. 강력한 법을 통해 질서를 잡자는 것이다. 드라콘이라는 인물이 이를 주도했는데 그가 만든 법은 좀도둑에게 사형을 부과할 정도로 엄격한 내용이었다. “살인자에게 더 심한 벌을 주어야 하는데 사형보다 더한 벌이 없군요.” 그 다음에 등장한 인물이 솔론이다. 솔론은 사회적 중재안을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귀족과 중간 평민들이 모여서 함께 국정을 논의하는 400인 회의와 어느 시민이라도 뽑힐 수 있는 배심원 제도를 만들고,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시민들을 복권시켰으며 토지 소유 상한제를 실시했다. 이것이 소위 참주(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왕이 된 사람)이다. 페이시스트라토스라는 인물이 그렇게 권력을 쥐고 흔들었는데, 사실 그의 정책은 경제적 부흥과 문화적 발전을 가져와서 어떤 면에서는 선정이라고 할만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히피아스가 권력을 물려받은 후에는 문자 그대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런 역사적 변화를 겪은 후 아테네는 본격적인 민주주의 개혁을 심험했으니,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이 그것이다. 참주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 개혁 프로그램이 등장 이것이 바로 ‘이소노미아’ 뜻은 ‘동등한 지배’라는 뜻이다. 그가 주도한 개혁의 골자는 독재자 또는 참주가 되려는 자를 한시적으로 국외로 추방해 버리는 오스트라키스모스(도편추방제)와 부족제 개편이다. 부족제란 결국 혈연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 세력유지의 뿌리가 되는 것이므로, 이를 손본다는 것은 기존 권력의 근거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새로운 정치의 중심 단위가 된 이 데모스에 대해서는 이전처럼 귀족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으므로, 힘이 더욱 신장된 평민들이 데모스를 지배했다. 이렇게 귀족 대신 ‘평민들 중심의 데모스가 지배한다’는 뜻의 데모크라티아가 바로 민주주의의 기원이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정적들이 힘을 쓰지 못하도록 분산시키려고 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아테네가 이전에 비해 훨씬 민주적인 방향으로 나아간 것 또한 사실이다.

- 민주주의 학교, 그리스 비극 : ‘안티고네’는, 독재의 위험을 경고하는 것이다. 국민의 뜻을 억압하는 것은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비극의 무대가 테베와 같은 이웃 나라, 특히 아테네에서 보기에 야만적인 국가의 궁정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아테네가 지향하는 민주주의의 가치가 지켜지지 않는 사례를 보여 줌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러한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강조하는 고도의 수법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 비극은 민주주의의 학교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6. 스파르타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중 ‘리쿠르고스’

- 스파르타인은 원래 기원전 1200년경에 북쪽에서 남하하여 그리스 지역 전체를 대이주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도리아족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아테네인들이 그들의 거주지에서 대대로 살아온 토박이이고 인종도 이오니아인인 것. 스파르타인은 어찌나 과묵한 사람들이었는지 지금까지도 영어의 ‘laconic(라코니아 지방의)’은 ‘과묵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 스파르타인의 아이들은 7세가 되면 아고게라는 단체에 들어가서 20세까지 단체 생활을 하게 된다. 스파르타에서는 다른 폴리스에서와 달리 여자도 강한 훈련을 받았다. 여자에게 남자들과 똑같이 달리기, 레슬링(남녀가 맞대결을 하기도 했다), 투창 같은 것을 연습시킴으로써 튼튼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튼튼한 산모가 되도록 한 것이다. 처녀들이 나체를 드러내 보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건강의 가치와 명예와 용기를 가르쳐 주는 기회라는 것이다. 일처다부 제도가 존재했다. 부부 사이에 자식이 없을 경우 여성이 다른 남자와 혼외정사를 하는 것도 인정되었다.(인정된 정도가 아니라 장려되었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청년들이 20세에 아고게를 졸업하면 다시 10년 동안 공동생활을 하며,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 이 과정을 잘 넘겨야 10년 뒤인 30세에 정식 시민이 되어서 결혼도 하고 민회에 나갈 수 있다. 20세에 가입하는 단체가 피디티온인데, 이것은 60세까지 자그마치 40년 동안이나 지속되는 것이므로 정말로 중요한 선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 피디티온은 15명으로서 이들이 함게 식사하고 훈련도 받으며 전쟁이 일어나면 이 단위가 그대로 전투에 투입된다. 스파르타는 국가 전체가 일종의 특수 부대 같았다. 이 공동식사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각자 자신의 식사 비용을 내야 했고, 만일 이를 부담하지 못하면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공동 식사 제도의 기본이 되는 제도가 클레로스 제도이다. 이것은 국가 소유의 경작지를 추첨을 하여 시민들에게 분배하는 제도이다. 스파르타인들의 생각에 매매행위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 나라의 화폐는 거래하는 데 불편하도록 일부러 크게 만들었다고 한다(돈이 어찌나 크고 불편하게 만들어졌는지 몇 푼 안 되는 액수의 돈을 운반하는 데 여러 마리의 소가 필요했다). 지배민인 스파르타인들은 오직 군사적인 일에 매진하고 농업이나 상공업 활동은 피지배민들에게 시켰다.

- “스파르타에서는 자유인은 가장 자유롭고 노예는 가장 심하게 속박되었다.”는 당시의 말이 정확한 평가이다.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중 ‘리쿠르고스’ : 리쿠르고스는 아이들을 부모의 소유물이 아닌 국가의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 남폄에게서 허약한 아이를 낳는 것보다 다른 남자에게서 건강한 아이를 낳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7. 알렉산드로스 _ 사실과 신화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중 ‘알렉산드로스’

- 실제로 그가 10년 동안 원정한 거리를 합치면 지구 한 바퀴에 해당하는 3만 5천 킬로

8. 헬레니즘 _ 코스모폴리타니즘과 인간의 원자화

9. 로마의 법 _ 불평등의 구조화

❖ 12표법

- “모든 고대사는 이를테면 많은 개울이 호수로 흘러가듯이 로마의 역사로 흘러들어가고, 모든 근대사는 다시 로마로부터 흘러나왔다.” 우리가 로마의 역사에서 보고자 하는 것 중의 하나도 그 거대한 제국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갈등을 법과 제도로 흡수하는 탁월한 능력이다.

- 로마 공화정과 민주주의는 관계없다 : 공화정, 곧 레스 푸블리카란 ‘공공의 것’이라는 의미로서, 그 뜻은 왕 또는 황제 한 사람이 모든 권력을 다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왕정과 귀족정, 민주정이 혼합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로마 공화정의 내막을 보면 조화와 균형은 표면적인 것일 뿐이었고, 실제로는 귀족이 지배권을 장악하여 평민층의 권한을 압도하였다. 하나의 예로서 민회의 의사 결정 과정을 보자. 초기의 중요한 민회로는 켄투리아회(병사회)가 있다. 켄투리아는 백인대라고 번역한다. 기병은 18개의 켄투리아, 보병은 재산 상태에 따라 1등급 80개, 2등급 20개, 3등급 20개, 4등급 20개, 5등급 30개의 켄투리아로 되어 있었다. 그 아래 시민들은 따로 5개의 켄투리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표결을 할 때에는 머릿수로 투표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각 켄투리아가 하나의 의견을 정하여 투표를 하게 되어 있었고, 과반수가 넘으면 투표가 종결되었다. 투표 순서는 부유한 켄투리아부터, 다시 말해 기병, 1등급 보병, 2등급보병, 3등급 보병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가장 부유한 기병 18개와 1등급 보병 80개의 켄투리아가 투표를 하면 이 숫자만으로 98이 되어 이미 과반수를 넘게 되고, 따라서 그 나머지는 투표를 하지도 않고 끝나곤 했다.

- 성문법 제정, 이제부터는 법대로 : 첫출발은 12표법이었다. 열 명의 법률 제정 대관들이 임명되었다. 12개의 표에 이것을 새겨서 광장에 세웠다. 귀족층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내용이 더 많다. 그런데도 이 법이 단지 귀족층만이 아니라 평민들에게도 중요한 이유는, 이제 로마의 모든 시민들이 법의 지배를 받는다는 원칙을 수립했다는 데 있다. 기원전 376년에 리키니우스법을 통해 평민들은 집정관 중 한 명을 평민층에서 선출하게 하였다. 이후 수십 년이 지나면서 차례로 독재관, 감찰관, 법무관, 신관 등을 평민층에서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하나씩 획득해 갔다.

- 갈등을 딛고 대제국으로 : 평민회도 입법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로써 2세기에 걸친 신분 투쟁이 종결되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호르텐시우스법의 제정으로 신분 투쟁이 종결된 시점(B.C. 287)과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지배하게 된 시점(B.C. 275)이 거의 같다는 점이다.

❑ 중세의 꿈과 현실, 그리고 근대의 여명

10. 로마 말 중세 초 _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 유럽으로

- 로마 제국 말기의 변화 : 기독교라는 새로운 신앙이 널리 퍼지면서 그동안 로마를 지탱했던 강건한 ‘농민-병사-시민’의 심성이 약해졌다는 설, 관료적인 복지국가 제도와 그것을 지탱하기 위해 거둬들인 과도한 세금이 국가를 약하게 만들었다는 설(빈민들이 폭도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지 않았던가), 농민층이 붕괴되고 그 반대로 라티푼디움(노예제 대농장)이 확대되었으나 노예 공급 중단으로 이 제도가 운영되지 못한데다가 지력이 고갈되어 농업이 쇠퇴했기 때문이라는 설 등으로 로마 제국이 멸망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역사가 앙드레 피가뇰은 이렇게 주장했다. “로마 문명은 자연사 한 것이 아니라 암살되었다.”

- 우주의 지도 혹은 종교의 지도가 바뀌다 : 3세기 이후 로마 제국은 일종의 동맥경화 증세를 보였다. 농업 생산성은 계속 하락, 군인 황제 시대라 일컫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암살과 쿠데타가 계속되었다. 사회적 혼란기에 흔히 그렇듯이 각종 외래 종교, 신비주의 종교, 점술 따위가 유행했다.유대족의 범위를 벗어나서 구세주를 믿는 사람 누구에게나 천국을 약속한 기독교도 마찬가지로 동쪽에서 차츰 로마 제국 전반으로 확산되어 갔다. 기독교는 특히 노예와 여성처럼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지며 사회 저변으로 퍼졌다. 로마 제국은 처음에는 기독교에 무관심했지만 교세가 크게 확산 된 후에는 황제 숭배 거부를 문제삼아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 기독교를 박해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중심으로 제국의 위기를 타개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다. 전하는 말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전쟁을 하러 나갈 때 십자가의 환영을 보고 승리를 거둔 후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하지만, 암만해도 훗날에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닐까 의심스럽다. 사실 그가 개종한 데에는 황제 개인의 심경 변화보다는 정치적 고려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 다신교와 일신교는 어떻게 다른가? 이 문제에 대해 가장 보편적인 서구 지식인의 생각은 아마도 흄이 『종교에 대한 자연사적 고찰』에서 제시한 다음과 같은 견해일 것이다. 일신교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주에 대한 조리 있는, 그래서 합리적인 견해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고력을 통해 계몽된 심성을 가진 자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 질서로부터 하느님의 존재를 추론해낼 수 있다. 이런 단계에 이른 진정한 일신교는 매우 드물며 원시적인 과거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일신교적인 관점의 사고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흄은 ‘저속한 사람들’이라 했다. 이런 사람들은 추상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과 불안에 떨게 되고, 그리하여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을 의인화하게 되며, 이것이 결국 다신교적인 사고방식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 성인 숭배의 확산과 기독교의 뿌리내리기 : 주의깊게 보려는 점은 성인 숭배의 확산이다. 성인들은 보통의 인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성스러운 힘을 가진 존재이며 하느님과 ‘친구’이다. 그들의 영혼은 하늘나라에 있지만 그들의 뼈는 이곳 지상의 무덤에 묻혀 있어서 하늘의 힘을 인간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성인의 무덤은 하늘나라와 이 세계가 만나는 특별한 장소가 된 것이다. 이것은 다신교의 한 형태이지 유일신을 믿는 일신교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4세기 말과 5세기 초에 이르면 기독교도들은 이런 ‘미신적인’, 그리고 ‘다신교적인’ 생각과 의식을 거침없이 받아들였다. 흄이 말하는 저속한 사람들이 결국 그들이 원하는 바를 관철시킨 것이다. 힘있는 가문에서는 유명한 성인의 뼈를 얻어다가 자기 집안 교회에 안치함으로써 그 성인의 공덕을 오로지 자기네 가문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성인의 보호를 한 가족만이 아니라 전체 신도들에게로 확산시켜야 했다.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이 주교들이었다.

- 민중 모두를 위한 성인 숭배 : 종교적 권위를 확보하는 데 핵심이 되는 키워드는 ‘보호’였다. 로마 제국이 몰락하는 이 시기는 극도로 혼란스럽고 불안한 시대였다.주교들은 먼저 정신의 안정을 제공해 줄 수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힘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중간 매개자인 성인의 공덕을 일반인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 줌으로써 가능했다. 예를 들면, 밀라노에서 385년에 성 게르바시우스와 성 프로타시우스의 유골이 발견되어 커다란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이 지역의 주교였던 암브로시우스가 이 유골을 빠르고도 확실하게 자신의 영향력 아래로 가져온 점이다. 자신의 성당, 그것도 나중에 자기가 죽으면 석관이 놓이게 될 자리 바로 밑에 그 유골들을 안치했다. 두 성인은 암브로시우스가 행하는 미사에 확고한 권위를 부여하게 된 것이다. 암브로시우스의 이런 방식은 다른 지방의 주교들에게 좋은 모델이 되었다.

-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교회에 기증하면서 교회의 부는 계속 증대하였다. 이를 어떻게 사용했을까? 첫째, 이 막대한 부를 이용하여 기근과 전쟁,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구제했다. 둘째, 교회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부를 재투입했다. 그래서 성골당을 사치스럽게 장식하고 화려한 의식과 축제를 벌이게 되었다. 이것이 신자들의 마음을 확실히 잡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신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며, 성인들의 중개는 모든 신자들에게 골고루 전해졌다. 주교는 이런 경향을 더욱 강화해서 현세의 힘과 부를 가진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 것을 권했다.

11. 바이킹

❖ 사가, 바이킹의 모험 이야기

- 주변부의 역사 : 바이킹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해서 인디언들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고, 또 반대 방향으로는 러시아를 가로질러 비잔틴 제국에 이르렀으며, 일부는 비단길을 거슬러 중앙아시아까지 진출했다. 바이킹이라는 낱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한 설에 따르면, 스칸디나비아어로 작은 만을 가리키는 비크라는 낱말에서 ‘아비킹’이라는 말이 나왔다. 다른 설에 따르면 교역이 이루어지는 곳을 ‘비크’라고 하는데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이런 곳을 공격하고 때로 머물러 살기도 했다. 그래서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을 가리켜 바이킹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바이킹이라는 말이 그리 흔하게 쓰이지는 않았고, 그보다 노스만이나 노르만 같은 말들이 더 자주 쓰였다. 바이킹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 이후 스칸디나비아 민족주의 운도의 결과이다.

- 바이킹의 시대 : 스칸디나비아 지역은 일찍부터 ‘여러 종족의 모태’였다. 첫 번째 것은 포괄적으로 ‘게르만족의 이동’이라고 일컫는 큰흐름이다. 대략 6세기경에 멈추었다. 그 후 약 200년 뒤에 바이킹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대략 750년부터 1050년까지의 3세기 정도를 ‘바이킹의 시대’라 한다. 바이킹들은 노략질을 할 때 아이들을 죽여서 머리를 자르고 그것을 창끝에 꽂고 다니는 것이 관례였다. 어떤 사람이 그 짓을 차마 하지 못하자 동료들이 그를 보고 ‘어린이들의 친구’라 놀려 댔다는 것이다. 9세기에 들어서자 바이킹들은 더욱 자신감이 생겼는지 약탈을 한 후 바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 월동도 하고 아예 땅을 차지하고 눌러앉기도 했다. 인구과잉, 농토 부족, 또는 호전적 엘리트 집단 사이의 갈등 따위를 꼽는다.

- 바이킹의 팽창은 크게 세 방향 : 하나는 남쪽 방향으로서, 영국 제도와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으로부터 차츰 남하해서 결국에는 지중해까지 도달하였다. 또 한 갈래는 서쪽 방향으로서, 북대서양의 섬들(오크니, 셰틀랜드, 아이슬란드, 그린란드)을 차례로 항해하여 거주지를 만들고 마지막으로는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해서 한때 정착지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갈래는 동쪽 방향으로서, 핀란드, 발트해 연안 지역, 그리고 이곳을 넘어 볼가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러시아를 지나고 비잔틴 제국까지 가서 교역을 했으며, 아마도 바그다드나 그보다 더 먼 지역까지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이킹들은 콜럼버스보다 약 500년 전에 아메리카 대륙과 주변의 여러 섬에 들어갔다. 예컨대 캐나다 뉴펀들랜드 주에서 바이킹들의 거주지를 발굴해본 결과, 철을 용해하고 대장간 일을 한 흔적을 찾아 낼 수 있었다. 또, 미국 메인 주와 북극 지방에서 바이킹과 관련된 물건들과 동전이 발견되었다.

12. 낙원의 역사

- 낙원은 어떤 곳인가? : 낙원, 곧 파라다이스 라는 낱말은 원래 고대 페르시아어 ‘아피리다에자(벽으로 둘러싸인 과수원)’에서 나온 말이다. 고대 히브리어에 받아들여져서 ‘파르데스’가 되었고, 다음에 그리스어 구약 번역 과정에서 ‘파라데이소스’로 되었다. 핀다로스의 『올림픽 찬가』에는 ‘행운의 섬’이라는 낙원이 나온다.

- 지상낙원은 보통의 인간들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있다. 높은 산에 걸려 있든지 대양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땅과 아무 관계가 없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큰 강물이 흘러나와서 이 땅을 적시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r한 주장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 대한 전설이다. 노아는 땅을 세 등분하여 셈, 함, 야벳 세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중 셈에게 돌아간 땅이 가장 좋은 땅인데, 이는 북쪽의 티나 강(다뉴브 강)과 남쪽의 기혼 강(나일 강)을 경계로 하고 있다. 바로 이땅의 동쪽 끝에 에덴동산이 있고 중간에 시온산이 솟아 있으며 남족에 시나이 산이 있다.

- 낙원을 찾아서 : 콜럼버스는 지상낙원이 아주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고, 그곳의 날씨는 온화하며, 엄청난 양의 물이 나오는 곳에 있다고 자기 나름대로 정리했다. 유럽인이 지상낙원에 도착하는 날 그곳의 힘과 부를 이용해 이교도들을 모두 정복하고 세계 만방에 기독교를 전파하며, 그때 인류는 마침내 잃었던 낙원을 되찾고 역사가 완수된다는 종말론적인 사고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앵무새는 낙원의 새로 알려지게 되었다. 원죄 이후 모든 동물들이 말을 잃었다고 한다. 그런데 새가 인간의 말을 흉내내다니! 그래서 앵무새는 낙원에 아직 남아 있는 새로 알려진 것이다.

- 낙원의 상실은 곧 복수하는 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런 내면의 의식은 어떻게 해서든 지상의 낙원을 찾고 그곳에 들어가야 한다는 강박증을 낳았다. 무엇엔가 내몰리는 사람처럼 끊임없이 찾아 헤매고 무엇인가를 향해 전진해야 하는 문명의 성격, 아시아로, 또 아메리카로 공격해 들어가서 땅을 빼앗고 사람을 짓밟았던 역사, 이런 흐름의 저 깊은 뿌리에는 낙원의 상실과 지옥의 공포라는 근원적인 갈등이 존재한다.

13. 아시아에 대한 꿈

❖ 사제 요한이 비잔틴 제국 황제에게 보냈다는 편지

- 중세의 세계 지도 : 노아는 세 아들 셈, 함, 야벳에게 각각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을 분배해 주었다고 한다. 세계의 중심(지도의 한가운데)에는 예루살렘이 있다. 사제 요한의 전설이다. 그 기본 생각은 이교도 지역 너머에 강력한 기독교 왕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8세기 이후 이슬람 세력이 강력해져서 기독교권 유럽과 원수지간이 된 후에는 이슬람권을 양쪽에서 협공할 우군으로서 이 전설의 기독교 왕국은 더 큰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 사제 요한 왕국 이야기 : 에티오피아의 콥트교, 일부 역사가들은 사제 요한의 이름 ‘Jean’이 에티오피아의 지배자 'Zan'의 변형이 아닐까 추론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사제 요한 왕국의 소재지로서 아프리카도 후보에 올라가 있었으나 대체로 12세기경에 사제 요한 왕국은 아시아에 있는 것으로 확정되기에 이른다. 사제 요한이라는 직위가 처음 명시적으로 나오는 문건은 1145년의 오토 폰 프라이징의 서술이다. 십자군 지휘부가 교황에게 원군을 더 보내 달라는 요청을 하였는데, 교황이 그 사자를 만나는 자리에 배석했던 오토 폰 프라이징이 이 일을 기록하면서 사제 요한에 대해 쓰고 있다. 그 내용은 동방의 왕이며 네스토리우스파 사제인 요한이 예루살렘 교회를 구하기 위해 티그리스 강까지 진격해 왔으나 아직 강을 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20년쯤 뒤에는 사제 요한이 비잔틴 제국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에게 보냈다는 편지가 나돌았다. 아마도 이것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위조 문서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사제 요한이 통치하는 동양의 왕국은 엄청난 부와 힘과 덕성을 자랑하는 강국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 시기에 아시아에서 대제국을 건설하던 칭기즈칸을 전설의 사제 요한으로 오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 네스토리우스는 시리아에서 태어나 428년에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지만 ‘신의어머니’는 아니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결국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정통 아타나시우스파의 삼위일체 교리에 맞서는 주장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431년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이단 판정을 받고 추방 당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지역으로 퍼졋는데, 특히 중국에는 경교라는 이름으로 들어와 한때 당나라 황실에까지 전해졌다.

14. 중세의 개인주의 _ ‘나’를 찾아서

❖ 죄란 무엇인가?

- 바늘 끝에 천사가 몇이나 앉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당시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치열하게 싸운 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우습기 짝이 없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정말로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그렇게 싸운 것이다.

15. 기사도

- 기사의 일생 : 기사의 서임 방식은 흔히 무릎을 꿇은 사람의 머리와 양쪽 어깨에 칼로 가볍게 건드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원래 방식은 그보다는 과격했으니, 칼등으로 기사 후보의 목을 있는 힘껏 내리쳐서 기절시키는 것이었다.

- 기사도, 기사 길들이기 : 우리가 생각하는 ‘기사도’를 갖춘 고결한 귀족으로 변모하기 시작하는 것은 유럽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무력 충돌이 완화된 11~12세기 이후의 일이다. 걸핏하면 칼을 휘두르는 단순무식한 칼잡이들을 얌전하게 길들인 데에는 교회의 역할이 컸다.

16. 인쇄술

- 지식의 보급이라는 잣대를 대어 보면 : 인쇄술의 기능으로서 지식의 ‘보급’이라는 측면을 이야기했지만, 또 한 가지 아주 중요한 기능이 있으니 그것은 지식의 ‘정확성’을 높인 것이다. 주로 수도사들이 책을 베끼는 일을 담당했는데, 이것은 수도사들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로 꼽혔다.‘실수’는 그렇다고 해도 더 심각한 것은 의도적인 왜곡이다. 성경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내용을 바꿔 쓰기도 하였다. 이런 일을 두고 양심에 거리끼는 일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어서, 도리어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학자에게 자신이 한 수 가르쳐 주었노라고 뿌듯해했다.

- 우리나라의 인쇄술은 지식의 정확한 보존이라는 측면에서는 무척 공을 들였으나 지식의 보급이라는 점에서는 취약했다. 정확성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철저했다. 한국의 관료들은 “한 장에 한 자의 잘못이 있을 때에는 감독관과 조판인이 태형 30대요, 한 장당 한 자의 글자가 너무 검거나 너무 희미한 불량 인쇄일 때에는 인쇄인에게 태형 30대를 가한다.”고 했으니 인쇄공의 충원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17. 루터의 종교개혁

❖ 세계를 바꾼 대자보, 95개조

- 불안한 시대 : 15세기 말 유럽은 기독교 세계라고 할 수는 있으나, 이것은 다음 사실들을 전제로 한 이야기이다. 첫째, 일반인들의 종교적 심성은 기독교와는 관계가 없는 마술적 사고에 상당히 크게 물들어 있었다는 점, 둘째, 이 시대는 영적으로 불안한 시대였지만 기성 교회는 이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기독교 이전의 많은 민중 신앙이 가톨릭 교회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예컨대, 농사가 잘되라고 신부가 밭 둘레를 돌면서 밭에다가 성수를 뿌리는 행위, 병에 걸렸을 때 특정 성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기독교 이전의 신앙과 관련이 있었다. 힘을 다스릴 수 있는 무당이나 신에게 부탁해야 한다는 사고인데, 아마도 기독교 이전에 한참 ‘날리던’ 지방의 신이 가톨릭 성인으로 변신해서 편입해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는 마법의 메달을 달고 살았고 귀족들은 점성술에 빠져 있었다.

-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 : 유럽적인 사건으로서 인문주의자들의 주목과 많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게 된 데에는 ‘시대의 발명’인 인쇄술의 영향이 컸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곧 소책자로 만들어서 사방에 뿌렸던 것이다. 살해당할 위험마저 있었으므로 그를 지원하는 영주 작센 공의 보호를 받아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 살았다. 이제 ‘루터교’ 수준으로 확대된 그의 견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둘째, 구원에 성수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며, 따라서 가톨릭 교회와 같은 조직이 따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만인이 스스로 사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셋째, 하느님의 뜻은 오직 성경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며 지냈는데, 이는 종교적으로 중요한 일일 뿐 아니라 독일어의 표준어 정립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그의 정치적 견해는 매우 보수적이었다. 그가 원한 것은 오직 종교 차원의 변화였지, 사회의 변혁 같은 것은 아니었다. 농민들이 오해하여 루터의 이름을 걸고 영주들의 봉건 질서를 깨고 새로운 세상의 건설 운운하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루터가 한 말은 “기사들이여, 이 날강도 같은 농민들을 칼로 찔러 모두 죽여 버려라.”였다.

18. 마녀사냥

- 이해하기 힘든 역사적 사실 : 15세기 말부터 수백 년 동안 유럽에서 마녀로 판정을 받고 처형당한 사람이 약 10만 명이다. 어떤 연구자들은 여자들이 바에 집회를 연 것이 사실이며, 다만 그 내용이 악마 숭배하고는 거리가 멀고 고대로부터 은밀히 전해 내려오는 다산 숭배, 말하자면 농업적인 의식이라는 주장이다. 이와 달리 어떤 연구자들은 그런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순전히 조작된 내용일 뿐이라는 주장을 한다.

-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마녀사냥이 가장 극성을 부렸던 시점은 1590년대이며, 그 후 1630년대와 1660년대에 다시 정점에 올랐다.

- 근대의 권력 당국, 곧 국가와 교회는 그들의 권위에서 벗어나려는 자들을 제거하고 모든 국민들의 복종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국가는 교회로부터 이데올로기를 빌리고 교회는 국가로부터 힘을 얻는다. 근대 국가는 ‘균질한 영혼’들이 국가 기구에 복종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이것이 마녀사냥이 결과적으로 행한 역할이다.

19. 민담과 동화 _ 정신분석적 접근과 역사적 접근

- 무의식이 읽어 내는 이야기 속 이야기 : 강을 건넌다는 것은 대개 한차원 높은 수준으로 성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강을 건너는 것은 둘이 함께할 수 없다. 인간의 성숙은 곧 독립적인 자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20. 마테오 리치 대 리마두

- 과학을 들고 선교하러 나서다 : 리치가 중국 궁중에 본격적으로 한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유럽의 발전된 과학 기술에 힘입은 것이었으며, 그 첫 번째 열쇠는 시계였다. 하나의 중요한 계기는 일식에 대한 예측이었다. 조정의 역관들은 10시 30분에 일식이 시작되어 2시간 동안 지속되리라고 예상하였고, 예수회 신부들은 11시 30분에 시작되어 2분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예수회 신부들에게 역서의 개정 작업을 맡겼고, 이때 중국인 학자들이 수학, 광학, 수리학 등의 문헌을 번역하고 망원경을 제작하였다. 서양 과학의 힘이 본격적으로 중국의 문을 열어 제치기 시작한 것이다. 서양 선교사 들은 이런 것들이 중국에 처음 소개된 것이라고 자신만만해했고, 땅이 평평하다고 믿는 중국인들에게 한 수 가르쳐 주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미 267년에 페르시아인 천문학자 자말 앗딘이 쿠빌라이 칸에게 지구의와 6가지 천문기구들을 전해 준 사실을 그들이 알 리 없었다. 지구구형설만 해도 중국에서는 이미 기원전 4세기에 나왔던 이론이다. 게다가 벌써 1402년에 한국의 권근이 세계 지도(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만들 정도였다는 것도 알 리가 없었다. 과학을 앞세워서 ‘과학을 낳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 선교사들이 몰랐던 것 : 중국이 많은 면에서 유럽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 예수회가 중국 과학에 공헌한 점으로는, 첫째, 일식 예측의 개선, 둘째, 천체 운동에 대한 기하학적 설명 체계 개선과 유클리드기하학의 도입, 셋째, 해시계와 천문 관측의 개량, 넷째, 지구구형설과 위도ㆍ경도를 통한 공간 구획, 다섯째, 새로운 대수학과 계산법과 새로운 계산 기구 도입, 여섯째, 새로운 과학 도구, 특히 망원경의 도입 등이 있다.

-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전하지 않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로 설명하려던 것이었다. 예수회는 이 중 망원경은 전했으나 코페르니쿠스는 전하지 않았다.

- 보편 과학을 전하다 : 과학이 기독교권의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일식을 잘 예측한다는 것은 결국 기독교 신학의 우수성에 대한 간접적 증거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이런 점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불거진 것이 ‘西’와‘新’의 문제였다. 황제는 칙령을 통해서 新이라는 말 외에는 쓰지 말라고 했다. 예수회가 중국 문화에 대해 너무 양보하고 있으며, 또 과학을 이용하여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태도도 잘못이라는 것이다. 나바레트 수사는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우리 전도사들이 중국에서 손에 시계와 지도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는 목에 십자가를 두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 리치와 그 일행은 중국에 들어올 때부터 중국 사람들에게 익숙한 요소를 이용해서 전도하려는 생각을 했음에 틀림없다. 그들이 마카오에 첫발을 들여놓았을 때 의탁한 중국인 통역사를 통해 한 말을 보면, 스스로 천축, 곧 인도 출신의 불교 승려라는 이미지를 풍기게끔 하고 있다. 리치는 중국에 오래 살게 되면서 사실은 불교가 배척받고 있는 종교이며, 또 실제 내용을 보더라도 유교의 내용이 차라리 기독교 교리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을 유사 이미지로 바꾸고자 했고, 결국 승복을 벗고 유복을 입었다. 그가 예수회 총장에게 보낸 편지에 이 점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 진보와 갈등의 근ㆍ현대 사회

21. 군사 문화 _ 근대적 군대, 군대적 근대

- 근대 유럽과 군대의 상관관계 : 근대 이후 최종적으로 유럽이 다른 지역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게 된 요인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 요인이, 치폴라의 책 제목이 보여 주듯이 ‘총과 돛’(곧, 육군과 해군)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유럽의 산업혁명의 성과가 군사에 적용되기 이전 시대에는 유럽의 군사력이 결코 압도적으로 앞선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정설이다. 경제적으로 더 앞섰고(18세기까지는 중국이 유럽보다 더 잘살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문명 수준도 높았던 중국이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하든가 유럽으로 나아가서 행패를 부리든가 전세계를 호령하든가 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중국은 대륙 전체가 하나의 제국으로 발전했다. 모든 것이 하나의 제국 질서 속에 포함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유럽의 경우는 여러 개의 국민국가들이 발전해 나와서 그들 사이에 세력균형을 이루는 식으로 근대사가 전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 간에 치열한 경쟁이 끝없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상대방을 눌러 이길 군사력을 배양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력이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각국의 힘은 계속 증가하는데 유럽에서 이를 사용할 수는 없고, 그래서 그 남는 힘이 바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 유럽의 군사 혁명 :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이나 일부 지휘관이 영웅적인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전체의 승패는 이 거대한 인간과 물자의 덩어리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통제하느냐에 달렸다. 징집되어 들어온 장정들을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군인’으로 개조해야 했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이루어 낸 사람이 네덜란드의 오라녜 공작 마우리츠이다.

- 마우리츠가 강조한 세가지. 첫째, 삽질! 최소한 자기 몸을 방어할 수 있도록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방어벽을 만드는 일을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제식훈련! 마우리츠의 부대는 이동과 사격 등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었다. 셋째, 작은 단위로 구분한 부대 편성! 500명의 대대를 중대, 다시 소대로 나누었다. 근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기계적 합리성은 그것과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군대 문제에서 오히려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것이다.

- 군대식 인간의 탄생 : 흥미로운 점은 기독교 세계의 군대 음악은 오스만 투르크의 고적대에서 유래한 것이고, 이는 다시 스텝 지역 사람들의 드럼 치는 관습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기원이 된 그런 지역들에서는 제식훈련이 발달하지 않고 오히려 유럽세계에서 크게 발달하였다. 그러나 인간을 그렇게 기계적으로 옭아매면 심한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바로 ‘술’이다. 대표적인 술인 브랜디는 처음부터 군대에서 사용되었고, 곧 프로레타리아의 대표적인 술이 되었다.

22. 사랑의 해방

- 역사 속의 사랑 : 성경에는 십계명 가운데 ‘너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구절이 있었고, 아내와 아이들, 하인들은 신을 공경하듯 집주인을 공경하라는 바울의 원칙도 준비되어 있었다. 16세기 이후 가정과 교회와 국가 모두에서 가부장적인 권위가 강화되어 가다가 17세기 중반 무렵부터 서서히, 더 명확하게는 18세기부터 개인의 감성과 의지가 차츰 존중받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해석할 수 있다.

23. 사랑ㆍ가정ㆍ공동체

- 사랑의 정체 : 1539년의 보르도의 관습법을 보면 남편이 격노한 상태에서 부인을 살해한 경우, 만일 그가 회개한다는 맹세를 하면 처벌받지 않았다. 아내가 남편을 때린 경우인데, 맞은 남편이 아주 엄하게 처벌 받았다. 1375년 상리스에서는 아내에게 맞은 남편을 체포해서 당나귀에 태우되 뒤로 앉히고 마을을 돌아다니게 해서 모욕을 주었다. 당나귀에 앉히는 것은 이 남자는 바보라는 뜻이고, 거꾸로 앉게 하는 것은 그가 당연히 지켜야 할 질서를 뒤집어서 깼다는 뜻이리라. 가스코뉴에서는 그 당나귀를 모는 사람이 남편과 가까운 친척이어야 한다고 규정해 놓았는데, 이는 ‘그런 천치 같은 일을 저지른 남편을 일가친척이 잘 다스리라.’는 메시지로 보인다. 16~18세기의 각 지방 속담을 분석한 플랑드렝의 연구가 간접적인 증거는 될 수 있을 듯하다. ‘여자 발을 남자 발 위에 올려놓게 하지 마라. 이 바보 같은 창녀는 내일은 발을 네 머리 위에 놓으려 할 것이다.’, ‘언제나 개는 오줌을 누고 여자는 눈물을 흘린다.’,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박차를 가해야 하고, 좋은 마누라든 나쁜 마누라든 매질을 해야 한다.’ 이것들이 16세기의 속담들이다. 18세기에는 확실히 성격이 다른 속담들이 많이 보인다. ‘마누라에게는 동료가 되고 말에게는 주인이 되어야 한다.’, ‘자연이 여성더러 남성에게 복종하라고 했지만 자연에 노예제는 없다.’, ‘마누라를 때린다고 마누라의 바보 같은 생각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마누라를 때리는 자는 밀가루 포대를 때리는 것과 같다. 좋은 것은 날아가고 나쁜 것만 남는다.’

- 사생활이 없던 시대 : 집안 일이 집안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마을 공동체 전체가 관여했다. 이와 관련된 것이 ‘샤리바리’라고 하는 관행이었다. ‘아주아드’라는 관례도 있었다.

24. 음식과 욕망

- 후추의 진실 : 후추는 변질된 고기 맛을 감추느라고 사용되지는 않았다. 상한 고기의 맛을 좋게 하는 정도로 쓰기에는 후추 값이 너무 비쌌다. 후추 맛 그 자체를 즐기느라고 쓰였다는 것이다. 이때 향신료는 음식 맛을 돋우는 역할 말고도 일종의 의식 역할을 했다. 중세에 미각과 의식은 서로 결합되어 있었다. 중세인들은 후추가 지상낙원에서 자란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후추에는 상징적 의미와 실질적 맛이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 미각의 구조 : 미각의 구조가 장기적으로 지속되지만, 아울러 오랜 기간을 두고 보면 분명히 변화해 간다는 사실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후추로 대표되는 매운맛에 심취해 있다가 후추의 유행이 지나가자 사람들이 부드러운 맛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것을 잘 보여 주는 것이 소스의 변화이다.

- 매운맛 전파의 미스테리 : 치즈를 못먹는 기간이 수년 정도 지속되면 그 맛을 잊어버린다고 한다. 이에 비해 고추장의 경우는 혀가 매운맛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데 20년이 걸린다고 한다. “고추는 조선에서 들어왔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우리나라에 고추가 전래되었다는 정설과 달리,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고추가 들어왔다가 일본으로 수출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25. 섬 _ 로빈슨 크루소의 실험

- 식민주의를 합리화하다 : 『로빈슨 크루소』는 프로테스탄트 유럽의 중산층이 사회와 문명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고 자신의 기반을 재정립하면서 이 세계를 정복해 나가는 정신적 사고 실험을 하는 에세이로 읽힌다. 그 결론은 ‘유럽적인, 너무나 유럽적인’ 자기 합리화이다.

26. 린네와 그의 제자들

- 과학자와 과학은 순수한가? : 1640년부터 1760년까지 약 120년 동안 유럽인들의 해상 팽창은 거의 정지 상태였다. 1차 팽창과 2차 팽창 사이의 기간, 곧 17세기 중엽 이후 거의 120년 동안 왜 해상 팽창이 중단되었을까? 1640년 이후 유럽 내부의 갈등이 격화되어 외부 세계에 대해 더 이상 팽창을 새로 시작하는 것이 힘들었으리라는 설명이 그 하나이다. 탐험의 특징은 과학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는 점이다. 과학이 ‘순수한’ 학문 활동이라고 하는 것은 순진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 모든 것들은 ‘순수하지 못한’ 정치ㆍ군사ㆍ경제적 고려를 빼놓고 설명할 수는 없다. 러시아라는 거인이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미처 꽃 피기도 전에 때 이르게 쇠락의 쓴맛을 보게 된 상황에서 이제 스웨덴은 군사강국의 달성이라는 이전 방향과는 다른 국가 발전 전략을 짜야 했다. 그래서 국가가 지원하는 농업과 공업 분야의 발전을 꾀했다. 이런 흐름의 한가운데에 린네가 있었던 것이다.

- 세계의 자연은 그들에게 이용 가능성이 있는 ‘자원’이었다. 세계를 지배하고 이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계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보를 수집하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분류, 정리해야 한다. 이 시기에 유럽의 과학은 바로 그런 목적에 충실히 봉사했다.

27. 혁명과 포르노그라피

- 바스티유 함락 : 7월 14일의 봉기(오늘날 프랑스 혁명 기념일)로 바스티유 감옥을 파괴하고 보니, 당시 그 안에는 좀도둑과 정신병자 몇 명이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

- 왕이 행차할 때에는 많은 병자들이 왕의 몸을 만지기 위해 몰려들었기 때문에 이것을 피하기 위해 왕이 손으로 주무른 동전을 만져도 똑같은 효력을 발휘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전을 흩뿌렸다.

- 일단 시작된 혁명의 과정이 멈추거나 뒤집어진다면 더 큰 위험이 닥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혁명 세력은 늘 적을 찾아서 제시해야 했다. 공포 정치와 정적의 살해가 그런 기능을 맡았다.

- 공식적으로도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형당한 죄목은 근친상간과 방탕한 향연이었다.

- 사드, 혁명적 무의식의 극단 : 사디즘(가학적인 성적 욕구)이라는 낱말을 낳게 한 장본인으로서 충격적인 성애 소설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의 소설은 그냥 보편적인 인간의 성적 욕구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분명히 혁명 경험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의 텍스트는 혁명에 대한 역설적인 논평으로 읽힐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은 꽤 오랜 기간 지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이 극단으로 치달았다. 지금까지의 인간과 사회의 모든 것, 거듭 말하거니와 정말로 ‘모든’것을 부수고 새로 창조해 내려고 했다. 사드는 그런 점을 남녀의 문제를 가지고 죽음의 극단에 이르기까지 실험하고 있다. 그러나 혁명은 그것을 여지없이 깨어 버렸다. 신성함이 사라진 후 남은 것은 오직 욕망뿐이었다. 스스로 자유롭고 평등하게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또 그런 삶을 가능케 하는 형제애 넘치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으로 나타났다.

-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이를 지켜 줄 새로운 체제가 공화국이다. 혁명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국가는 이런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규율로 국민들을 강제했다. 어느 새 국가는 국민들의 ‘자유를 강제’하게 되었다.

- 혁명은 부모를 살해한 극적 상황이다. 그것은 형제들의 세계이며, 사드의 소설에서 이는 곧 여성들에 대한 억압과 남성들의 욕망 충족으로 그려져 있다.

28. 모차르트 _ ‘혁명적인’ 예술가

- 궁정 하인, 천재 음악가 : 극장 매니저가 아이디어를 던져 주면 그 자리에서 작곡하고 30분 후부터 악사들이 연습에 들어갔다.

- 자유예술가를 선언하다 : 조금 선배 세대인 하이든은 ‘완전무결한’ 하인이었다. 그의 초상화에 그려진 옷은 하인 복장 그대로. 그는 그런 지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궁정 세계에 살며 그곳의 주파수에 맞춘 음악을 만들었다. 후배 세대인 베토벤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았다. 그는 이제 자신의 음악을 귀족들의 취향에 맞추는 따위의 일은 전혀 하지 않아도 됐다. 그는 자기가 독립적인 예술가라는 의식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가지고 잇었으며, 자신의 음악적 주장을 과감하게 펼쳤다. 사람들이 그의 음악을 이해해야지, 그가 사람들의 기호에 맞는 음악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모차르트는 전환기에 살았던 셈이다. 그는 한편으로 궁정에 매여 있으면서도 자신의 음악을 자유롭게 펼치는 자유음악가를 추구하였다. 그의 지지자였던 귀족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고, 또 그의 인생의 방향을 잡아 주었던 아버지와 심한 갈등을 겪게 된 것도 다 이런 맥락에서 일어난 일.

- 왜 ‘피가로의 결혼’을 선택했나 : 봉건 귀족과 갈등을 겪고 있고 그에 반발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열겠다고 나선 그가 다름 아닌 봉건 귀족을 골탕먹이는 하층민 주인공의 이야기를 고른 것이 정말로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모차르트가 혁명을 주장한 인물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혁명적인’ 인물이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자신도 모르게 읽어 냈고, 그것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했다. 혁명적인 변화의 씨앗은 춤과 노래 속에, 사람의 느낌 속에, 어쩌면 공기속에 떠돌아다니며 발아할 곳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29.옥수수와 감자, 그리고 기근

- 기근 시기에 빛을 발한 낯선 작물들 : 어떤 지역에 새로운 작물이 선을 보여도 대개 200~300년이 지나서야 사람들의 ‘주식’ 범주에 들어가곤 한다. 어떤 작물이 기존의 음식과 농사 체제 안으로 들어가는 때는 기존의 균형이 심각하게 깨지는 시기, 곧 기근의 시기이기 십상이다.

- 옥수수와 감자가 보편화되기까지 : 옥수수는 1493년에 콜럼버스가 들여왔다. 문서 기록은 지주와 직접 관련이 있을 때 작성하는...옥수수처럼 숨어 있는 곡물, 지주 몰래 농민들이 가외로 이익을 얻는 곡물의 경우에는 일부러라도 언급을 회피.. 그래서 초기에 어떻게 옥수수 농사가 퍼져 갔는지 자세히 알기는 힘들다. 이 작물에 대해 사람들이 의심을 품고 있는 상황에서 16세기 후반에 인구 증가가 완화되자 새 작물을 본격적으로 확대해서 재배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감자는 1539년이라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스페인 사람들이 페루에서 처음 보았고, 곧 스페인 본국으로 들여왔다. 초기에 감자에 붙여진 이름은 ‘타르투폴로’, 곧 백색 송로버섯이었는데, 최고의 버섯에 비유한 이 이름은 그런대로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스페인의 용병들이 30년 전쟁(1618~1648) 시기에 독일로 출전했을 때 감자를 가지고 가서 말 사료로 쓰다가 ‘정 배고프면’ 그들도 먹곤 했다. 가장 널리 퍼진 속설은 감자를 먹으면 나병에 걸린다는 것이었다.

- 파르망티에이다는 프랑스 군대의 약사였다. 그는 7년 전쟁(1756~1763)에 참전했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당시 독일군은 감자를 돼지와 프랑스 포로에게만 먹였다. 꼭 빵을 만들어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감자가 널리 보급될 수 있는 것이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울리지 않게 낭만주의적인 구석이 있어서 농사군 흉내를 내느라고 베르사유 궁전 한구석에 텃밭을 가꾸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감자를 재배하다가 감자꽃을 모자에 꽂았는데, 그러자 모든 귀족들이 왕과 왕비의 흉내를 내야 직성이 풀렸던 것이다. 왕실에서 재배하는 작물이니 이미지가 많이 개선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이제는 선전을 할 필요도 없어졌다. 배고픔이 모든 문제를 한번에 날려 버렸다.

- 하층민의 음식이 되다 : 옥수수는 대표적인 하층민 작물이 되었다. 옥수수는 생산성이 높은 장점은 있지만, 이것만 먹을 경우 영양소 결핍으로 펠라그라 병에 걸리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 병은 온몸에 고름이 나는 상처가 생기고 광기가 발작했다가 결국 사망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감자만 먹고도 살 수 있다는 점이 오히려 지나치게 감자 한 가지 작물에만 의존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에 감자마름병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자 갑자기 식량이 바닥나 버렸다. 1845~1846년 아일랜드 인구의 3분의 1 정도가 사망하거나 이민을 갔다. 미국에 사는 맥도널드, 맥아더, 맥그리거 같은 맥씨 가문사람들, 또는 오닐, 오코너, 오브라이언 같은 오씨 가문 사람들은 굶주리다 못해 신세계로 건너간 아일랜드인의 후손일 가능성이 크다. 18~19세기는 역사상 가장 못 먹은 시기 중 하나였다. 서민들의 음식 수준은 최하였으며, 그 결과 사람들의 평균 키가 작아질 정도 였다. 160센티미터 안팎으로 알려진 나폴레옹이 당시에는 그렇게 키가 작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30. 기차의 철학 _ 현대 문명의 상징

- 기차와 민족국가의 형성 : 민족국가 또는 국민국가라는 것이 무엇인가? 각 지방이 그 나름의 독자적인 단위로 자립하는 것이 아니라 한 국가, 국민 전체가 하나의 단위, 하나의 정체성, 하나의 생활권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차만큼 이것을 대규모로, 그리고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는 수단은 없었다. 또 기차와 함께 연결된 전신 시설은 의사소통과 정보 교환을 원활히 해 주었다. 기차를 타고 갈 때 차창 밖으로 우리를 쭉 따라오는 전선, 이런 것이야말로 국가의 동맥과 신경의 상징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 아주 다른 차원의 시장이 열리다 : 경제 행위가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었고 다른 가치들은 떨어져 나갔다. 폴라니는 이를 일컬어 ‘악마의 맷돌’이라고 했다. 인간이 풍요롭게 누리던 모든 가치들은 맷돌질을 통해 떨어져나가고 인간은 오로지 경제 활동만을 추구하는 원자화된 존재가 된 것이다. 기차는 이런 전국 시장이 형성되는 데 일등 공신이었다.

- 기계 시대의 공간, 시간, 인간 : 우리는 예전의 그 인간적인 공간과 시간을 상실하였다.

31. 카지모도ㆍ프랑켄슈타인ㆍ에일리언 _ 괴물의 계보

- 괴물의 탄생 : 파리에서 혁명이 터지면 곧 각국에 그 불꽃이 튀어서 연쇄적으로 봉기가 ... 1830년과 1848년이 그. 혁명의 해였다. 이 소설의 주인공 카지모도는 근대 세계의 발전 과정에서 형성된 민중을 상징한다. 카지모도는 ‘중세적’ 압제에 대해 눈을 뜨는 ‘근대적’ 민중을 나타낸다. 카지모도의 흉악함과 고결함을 모두 포착하는 빅토르 위고의 시선은 이중적이다.

- 프랑켄슈타인을 보는 시각의 이중성 : 문제는 괴물은 프랑스 혁명 당시의 민중을 나타낸다는 견해가 일찍부터 제시되었다. 위협적인 군중은 흔히 괴물로 비유되곤 했다는 점,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이 제네바 출신이며 생명 창조의 연구를 시작한 곳이 잉골슈타트라는 점을 보면, 이 소설이 프랑스 혁명에 대한 비유라는 것이 반드시 억측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는 본디 괴물이 아니었으나 사람들이 그를 괴물로 보고 배척했기 때문에 진짜 흉악한 존재가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인간의 해방’ 이라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한 혁명이 ‘인민의 면도날(단두대)’을 작동시키는 공포 정치와 나폴레옹 독재로 나아간 것과 상통하는 점이다.

- 괴물에 대한 보수적 시선 : 영화에서 괴물은 조수의 실수로 처음부터 범죄자의 뇌를 가지고 태어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괴물의 이미지가 갈수록 더 악마적인 것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은 곧 중산층의 불안이 점점 더 심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 왜 괴물이 동정을 받는가? : 대체로 보수주의 진영에서 일반 대중들의 잠재적 야만성을 나타내기 위해 괴물성을 활용하려는 데 비해, 진보주의 진영에서는 부르주아적 정상성이야말로 억압적이고 위험하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또는 정상의 이면에 괴물성이 숨어 있으며, ‘평범한 미국인이 사실은 괴물’이라는 식의 주장을 하기 위해) 괴물성을 활용하는 경향이 있다.

32. 노예

- 희생자 이미지에 가려진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 : 유럽과 미국의 발전을 위해 천만 명 이상의 흑인들이 죽음의 항해를 겪고 대서양 너머에서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야 했던 점을 보면, 근대사는 오히려 ‘야만과 억압’의 역사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과거에 서구의 학자들은 유럽의 근대적 발전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발전된 세계를 가져온 원동력이며, 유럽의 역동적인 해외 팽창으로 전세계에 유럽식의 발전이 퍼졌다고 설명했다. 길게보면 그런 아픔을 딛고 아프리카와 같은 사회가 유럽인들에 의해 근대화되었으며, 또 흑인들도 아프리카에서 비참하게 사는 것보다는 신대륙에서 노예로 사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는 주장을 했다. 이에 대해 1960년대 말~1970년대 초에 비판적인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유럽은 침략자이며, 후진 사회를 근대화시켰다는 것은 거짓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참으로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아프리카의 희생을 강조하다 보니 여전히 유럽인들은 ‘역동적’이고 ‘주체적’으로 그려졋고, 아프리카를 비롯한 비유럽 사람들은 ‘수동적’ 희생자로 그려졌던 것이다. 처음 의도는 유럽만이 근대 발전의 주체라는 유럽중심주의를 극복하자는 것이었으나, 노예 무역으로 인한 희생을 강조하면 할수록 거꾸로 비유럽 세계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 아프리카 팀북투 : 180여 개의 신학교가 있었고, 여기에서 문법, 수사학, 논리학, 신학, 법학 등의 교과목을 가르쳤다. 이 도시의 인구 5만 명 중 절반이 아프리카 전역에서 모여든 교수나 학생들이었다.

- 경제ㆍ정치적 편견을 넘어서 : 아프리카에서 노예제와 노예 무역은 언제나 있었고, 노예 획득, 이송, 판매 등은 아프리카 국가와 현지 엘리트들이 통제해 왔기 때문에 노예 무역으로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상황을 맞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아프리카 사회는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노예 판매를 했다는 것이다. 국제 노예 무역과 연결되어 이 흑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의 플랜테이션에 가서는 뜻하지 않게 인류 사상 최악의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 아메리카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다 :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노예를 기반으로 하는 농축 경제로서 노예들을 부려서 개간을 하고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벼 재배는 유럽인들이 잘 모르는 분야였으며, 특히 벼 재배와 축산 사이의 순환 같은 것은 특수한 지식과 기술이 필요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노예들은 그들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의 생활 조건을 흥정하고 개선한 것이다. 1720년에는 흑인이 백인보다 수가 많아진 점을 들 수 있다. 게다가 흑인들은 단순한 집단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작업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이 체제에서 노예는 날마다 부여되는 일정한 노동을 다 하고 나면 자기 일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이런 방식은 아프리카에서도 노예들은 ‘노예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가내 노예들은 1주일에 하루는 자기 일을 할 수 있다든지, 기니에서는 노예들이 1주일에 5일 동안 아치 일찍부터 오후까지 일을 하되 이틀은 자기 밭에서 일한다고 되어 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는 1751년의 어떤 기록을 보면,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흑인들이 재주가 있고 근면하다면 하루 일이 끝난 후 자신을 위한 작물을 심는다.”고 되어 있다. 이 지역에서 흑인 노예들을 보는 시각은 무능하고 미약한 존재가 아니라 제법 큰 책임을 지고 있고, 심지어는 무기를 들고 영국에 대해 식민지 방어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벼농사 사례와 같은 것을 보고자 하는 이유는, 지나치게 천편일률적인 백인 중심의 역사 서술을 수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흑인 노예들은 비록 처참한 고통을 당했지만 그들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던 정신적ㆍ물질적 문화를 가지고 새로운 세계의 문화를 만들어 내는 데 당당히 기여한 점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 노예의 노예, 라이베리아의 비극 : 퀘이커교도들은 흑인들이 아프리카에 가서 진정한 자유를 찾고, 아프리카의 기독교 선교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희망했다. 반면 노예 소유주들은 그런 이상에서가 아니라 하이티에서와 같은 노예 봉기를 피하자는 생각이었다. 1824년에 이 땅은 당시 미국 대통령(제임스 먼로)의 이름을 따와 먼로비아라고 했으며, ‘라이베리아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이 나라의 가장 큰 역설은, 해방된 흑인 노예들이 세운 자유 공화국을 자부하면서 실제로는 미국 출신의 지배자들(이들을 ‘아메리코 라이베리안’이라한다)이 현지민들을 노예화했다는 점이다. 남부 플랜테이션과 비슷한 집과 교회를 짓고 영어를 사용했다. 미국 국기와 거의 똑같은 모양을 한 라이베리아 국기를 보면 이 점을 잘 알 수 있다. 그리하여 5퍼센트에 불과한 이주민들이 현지민들의 땅을 빼앗고 지배하는 국가가 되었다.

33. 알코올

- 사람들은 왜 술을 마실까? : 유럽 지역들은 물이 좋지 않기 때문에 이처럼 알코올 도수가 약한 술들이 바로 음료수로 사용되는 것이다. 마치 중국의 차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지역들은 물이 좋지 않고 또 맥주가 쉽고 즉각적인 칼로리원이라는 점이 작용한데다가, 이 시기에 소금을 이용한 식품 저장법이 널리 퍼져 있어서 그만큼 갈증이 컸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의 음주 행위가 거의 대부분 공동체적ㆍ의식적 성격을 띠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음주가 철저히 집단적인 행위였다.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음주는 종교 제의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 술 권하는 사회 : 육체적ㆍ정신적 스트레스를 손쉽고 빠르게, 또 싼 가격으로 해소할 수 있는 길은 알코올밖에 없었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된 사회에서 소외된 채 서로 어울려 술 마시고 취해 있는 이 사람들은 그리하여 알코올 중독으로 몰리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등장한 알코올 중독자는 중산층 출신도 많았고, 폭력적으로 되기보다는 오히려 육체를 둔하게 만들었다. 작가들의 음주는 이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19세기 말에 작가도 노동자와 비슷하게 지배층으로부터 소외되고 지위가 실추된 사람들이었다. 지위 실추를 자인하고 그것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 ‘취한인간’이 되었다. 이제 음주는 옛날과 달리 신비한 힘을 많이 상실했다. 알코올 중독은 과학적ㆍ전문적 관리의 대상이 되었다.

- 오늘날 사람들은 어떻게 술을 마시는가? : 첫 번째는 홀로 술 마시기, 고독한 행위로서의 음주는 매우 현대적인 일이다. 이것은 사회적 도취가 아니라 알코올에 의한 마비이다. 두 번째는 여전히 태고적 신비에 가득 찬 집단 종교 의식으로 술을 마시는 행위이다. ‘위하여!’는 곧 ‘술 마시기 위하여’ 술 마시는 행위이다. 그 자체가 목적인 이 음주 행태는 오로지 집단 전체가 하나가 된다는 의미만을 가진다.

- 백인에게 몰살당한 대서양 섬들의 부족이나 인디언 부족의 최후 생존자들은 대개 하루 종일 취해 알코올 중독자로 남은 여생을 살았다. 백인들은 강건한 인디언 부족의 저항을 무디게 하기 위해 일부러 위스키를 싼 값에 제공하기도 했다.

- 술과 영혼 : 사람들이 술을 찾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이처럼 불안감을 줄이는 음의 효과 때문이다. 고도의 고조감과 도취감을 진작시키는 양의 효과가 있다. 곧, 뇌의 행복감 회로에 작용하는 것이다. 우리 뇌에는 우리의 생존에 도움이 되도록 보상 회로와 처벌 회로가 있다. 우리 몸에 해가 되는 행위를 하면 괴로움을 주고, 몸에 이로운 행위를 하면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잘 먹고 난 후에 느끼는 포만감이나 성행위 때의 극치감(오르가슴) 같은 것이 보상 회로가 작동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그 중 알코올과 관련된 대표적인 것으로는 도파민과 엔도르핀이 있다. 술을 마시면 도파민 수치가 조금 올라간다. 음주 초기(약 20분 정도)에 나타나는 기분 고조, 활력의 증대가 이런 상태이다. 엔도르핀은 심한 스트레스나 상해를 입었을 때 뇌하수체에서 분비되는 물질로서, 고통 메시지를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마라톤을 즐기는 사람은 10킬로미터 정도 뛰면 알 수 없는 도취감 같은 것을 느낀다고 하는데, 사실 이는 몸에 들이닥친 엄청난 ‘시련’에 대해 뇌가 생존 차원에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이런 화학 물질을 방출하기 때문이다.

34. 나치와 청소년 문화

- 왜 나치즘이 나타났는가? : 나치즘이 완전히 예외적인 일만은 아니고, 서구의 전반적인 역사 발전 도상의 위기 국면에서 나타난 한 가지 현상이라는 것이다. 막연한 전체적 이념이라 할 만한 것이 없지 않았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분산된 힘들이 제각각 경쟁하는 다극적 체제였고, 이것들이 단기적인 ‘상황의 압력’으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독일은 현실을 재편할 프로그램은 갖추지 않은 채 오직 유토피아적 이상만을 떠들고 있었다. 경쟁적인 엘리트들은 그 이상을 제각각 해석하는 가운데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혼돈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침몰하지 않으려면 오로지 강력한 힘으로 밀어 붙이며 앞으로 전진해야만 했다.

- 비정상적 체제에 대한 불순종의 의미 : 첫째, 선전ㆍ선동을 통해 사람들을 세뇌시킬것, 둘째, 적을 만들어서 사람들의 주의를 돌릴 것(이것이 유대인과 집시라는 희생양을 만든 비겁하면서도 처절한 방식이었다). 셋째, 대중들에게 여가와 유흥을 줄 것, 나치의 힘은 노동자 문화와 부르주아 문화의 전통적인 형식들을 파괴하기에는 충분했다. 나치즘은 그 빈자리를 군사훈련과 시대착오적인 이데올로기의 질식할 듯한 관료제로 채워 나갔으나, 그것은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35. 디즈니 _ 자본주의적 동화 주인공

- 디즈니화의 문제들 :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에서 영화가 활기를 띠는 것은 난쟁이들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힘든 노동과 단결을 통해서 이 세상의 정의를 지키고 조화를 가져오는 신비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대공황기 미국의 노동자들을 연상시킨다. 이에 비해 여성은 집을 깨끗이 지키며 가사를 돌보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다. 그런 가운데 남성들이 맡은 바 일을 열심히 수행하면 이 세상의 질서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된다.

- 만화영화는 대표적인 노동 집약적인 산업이다. 그러나 디즈니는 이 모든 것을 전적으로 자신의 지배 아래 두었다. 그 자신이 만화영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왕자와 같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원작의 개성이나 영혼을 짓밟아 버리고 그 자리에 농담과 노래, 놀라움을 일으키는 효과를 집어넣었다. 그래서 그가 손댄 세계는 모두 축소되고 만다. 그는 늘 세상의 정복자로서 등장하지 봉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 환상의 세계를 움직이는 자본과 권력 : 디즈니는 폭력, 정치, 성, 투쟁 등을 완전히 지워 버림으로써 모든 것을 깨끗이 소독했다.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대살균제’ 또는 ‘미스터클린’일까. 그에게는 검열이 따로 필요 없다. 그가 미국 대중들의 가치, 미국의 정치, 특히 공화당 우파의 정치 신념을 완전히 체화했기 때문이다. 그가 미국의 가장 보수적 정치가에 속하는 레이건을 일찍부터 지원했다는 점, 오랫동안 FBI의 비밀 요원으로 활약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흥미로운 점은 월트 디즈니가 그처럼 보수적이고 또 FBI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는데도 FBI는 늘 그를 감시했다는 것이다).

- 디즈니의 만화영화는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아름다운 향연만이 있을 뿐이며 모든 것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한마디로 너무나도 아름다운 세계를 보여 준다. 본디 동화가 갖는 성과 폭력을 주제로 한 잔인성은 우리에게 인생에 대한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 전세계의 문화권에서 태곳적부터 전해져 오던 이야기들, 우리 내면의 심층적인 문제들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는 가운데 해당 문화권마다 독특한 풍취를 전하던 동화와 민담들은, 이제 디즈니의 만화영화 제국에서 정형화된 하나의 이미지로 영원히 굳어 버린 채 오직 재미와 즐거움만을 선사하는 존재가 되었다.

- 디즈니는 미국을 지배하는 아주 중요한 문화적 자원이며 미국을 대변하는 상징이 되었다. 미국의 문장(紋章)인 대머리 독수리는 거의 미키 마우스로 대체될 정도이다. 이들이 오직 아름다운 색깔로만 그려 놓고 있는 멋진 환상의 세계 뒷전에서는 미국의 힘, 자본의 힘, 남성의 힘이 부드럽게 뇌속에 들어와 자리 잡는다. 이러한 디즈니의 세계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서 더 이상 지우기 힘든 제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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