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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드비히하게만/채수일/심산, 2.12.2203 주말열차(서대전역)



사람이 신을 이용하라고 하였는데 신이 인간을 이용하여 종교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내가 종교 관련 책을 많이 보는 이유이다



제1장 꾸란에서 이해된 그리스도교 : 만남 - 오해 - 대결



 그리스도교 대 이슬람 실패한 관계의 역사

 무하마드는 유다인과 그리스도인들을 ‘책의 백성’으로 생각했으며, 그들의 거룩한 경전에 이미 드러난 신적인 계시를 아주 이른 시대에 받은 사람들이라고 보았고, 자기도 같은 계시를자기 부족에게 선포한다고 생각했다....이것(꾸란)은 우리(알라)가 세상에 보낸 성스러운 책이며, 이전에 있었던 것을 확증하는 축복받은 책이라(꾸란6,92)

 신이 모세, 예수, 그리고 무함마드에게 보내신 계시서들은 서로를 증명하며, 시간적으로 가장 나중에 보내진 꾸란은 신으로부터 내려온 계시서로서 이전의 두 계시서들을 증명하고, 이 두 계시서들은 다시 꾸란을 증명한다. 꾸란 13,39에 따르면 이 하나의 거룩한 경전은 신이 보관하셨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각각의 언어로 인간에게 전해졌다. 이런 계시의 신학적 개념을 가지고 무함마드는 메디나 시대의 선포에서도 신적 계시와 그것의 내용적 정체성 사이의 근본적인 일치를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키려고 시도했다.

 시간이 지나면서 유다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신적 계시의 내용적 정체성에 대한 무함마드의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또 그의 기대와 달리 이슬람을 시간상 최후의 계시로 인정하지 않는 데다 자신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무함마드는 그들에 대한 태도를 점차 바꾸기 시작했다.

- 이슬람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전반적인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유다인 부족들의 영향력을 점점 더 약화시켜야 했고,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의 활동 가능성 역시 제한해야 했다. 마침내 결정적인 명령이 내려졌는데, 그것은 유다인과 그리스도인들을 정복하여 이슬람 공동체의 관리 아래에 두라는 것이었다(꾸란 9,29 참조). 왜냐하면 이슬람은 신 앞에서 유일하게 참된 종교이기 때문이다(꾸란 3,19; 48,28;5,3 참조).

 무함마드와 그리스도인들

- 무함마드는 ‘복음’이라는 표현으로 신약성서를 통틀어 일컬었다. 아마도 얼마나 많은 성서들이 모여 신약성서를 구성하고 있는지를 그는 모르고서 그런듯하다.

- 시간이 지나자 자신의 메시지를 부각시키면서 자신이 보내심을 받은 예언자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한, 또한 자기 공동체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 상황에 따라 무함마드는 그때 그때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다른 태도를 취했다. 무함마드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태도는 우호와 적대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흔들렸다. 무함마드가 자신의 생애 마지막에, 즉 아라비아 반도에서 자신의 지배력을 확보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배제도 결정적으로 실행되었다. 무함마드는 그리스도인들을 ‘신앙인의 공동체’에서 배제하였다.

- 시리아에 있는 비잔틴 제국의 전초기지에 군대를 보내겠다는 무함마드의 군사적 결단은 그리스도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사이의 불행한 대결의 시작이었다. 신학적 정당성을 꾸란 9,29-35에서 확보하는데, 여기에서 무함마드는 유다인에게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그의 최종적인 태도를 문서상으로 확정했다. “신과 최후의 심판을 믿지 않는 자들과 투쟁하라. 신과 신이 보내신 예언자가 금지한 것을 지키지 않는 자들과 투쟁하라. 진리의 종교에 속하지 않는 자들과 투쟁하라. 그들이 천한 자들로서 세금을 마칠 때까지 투쟁하라.”

 피보호민의 권리

① 종교와 제의의 상대적인 자유, 즉 고유의 종교적 행위를 아래와 같은 조건에서만 실행할 수 있다. 첫째, 무슬림의 종교적 감성과 그들의 우월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해야 한다. 둘째, 기존의 제의시설(회당/예배당)안에서만 제의를 실행해야 한다.

② 각 종교공동체 내부의 행정과 재판의 상대적 자율성을 보장 받는다. 그러나 이슬람법의 보편적 타당성은 최고의 규범으로서 침해 받을 수 없다.

③ 생업이 제한되는 피보호민들의 재산은 생업이 이슬람법과 모순되지 않는 한에서만 침해 받지 않는다.



제2장 북아프리카에서 스페인으로 : 이슬람의 전진

 “사도 바울 이후, 그리스도교가 튀니지의 바닷가에서부터 가장 강력한 발전의 동력을 얻었다는 것은 역사의 가장 역설적인 사실이다.”라고 아돌프 폰 하르낙은 쓴 적이 있다. 테르툴리아누스, 시프리누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그 시대 교회의 내적인 발전과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후 영향사적으로도 그리스도교 신학과 교회에서 광범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더욱 결정적인 사실은 그리스도교가 그 근원지인 북서아프리카에서 7세기 말 이슬람의 등장과 함께 쓸모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3장 이슬람의 침입에 대한 서구의 첫 번째 반응

 무함마드가 그리스도교 수도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가설은 반이슬람적 논쟁의 오랜 전통에서 - 비잔틴에 기원을 둔 논쟁은 물론 라틴 제국에 기원을 둔 논쟁에서도 - 반복적으로 제기되었다. 무함마드를 가르친 그리스도교 스승이 있었다는 전설의 기원은 아마도 초기 이슬람의 바히라 이야기에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계기는 꾸란에 나타나는 비난의 언급인데, 그에 따르면 무함마드가 아랍어를 모르는 사람한테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 1096년에 십자군이 시작되고 진행되면서 라틴세계는 이슬람과 그 창시자에 대한 정보를 점점 더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무함마드가 이단적인 그리스도교 수도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전설은 그 후 수백 년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며 나타난다.

 무함마드와 이슬람의 탄생에 대한 대중적인 상상은 끝날 줄 몰랐다. 이 전설적인 전통은 모두 새로운 종교를 독창적이고 자생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이단적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으로, 그리하여 사이비 종교로 낙인찍으려는 목적을 가졌다.

 군사행동 : 십자군과 재정복

- “너희의 모든 재산과 인격을 다해서 신의 길에 헌신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구절의 언어적 의미는 모든 저항에 맞서서 신앙을 지키고자 신명을 다해 자신의 길에서 의무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지하드는 이것을 의미한다.

- 서구의 그리스도교 역사는 - 고대의 철학사상에 근거하여 - ‘의로운 전쟁’에 대한 고전적인 가르침을 발전시켰다. 개척자는 아우구스티누스(354~430)였다. 이단에 대한 그의 주장의 출발점은 누가복음 14장 23절에 있었다. “큰 길과 울타리 가로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 누가는 아마 ‘억지로라도’라는 말을 ‘가장 힘찬 선교적 실천’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을지 모르지만, 교회의 역사가 흐르면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난폭성으로 이어졌다.

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십자군의 본래의 종교적인 원동력은 전쟁과 모험심, 피를 보려는 잔인함, 약탈욕, 권력욕 뒤에서 빠르게 퇴색되었다. 그리스도인과 무슬림 사이의 관계도 최악이었다. 그리스도인에 대항하는 이슬람의 새로운 연대가 그 결과였다. 동방교회도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비참해졌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콘스탄티노플에 라틴 제국을 건설함으로써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사이의 분열도 더욱 심해졌다.



제4장 페트루스 베네라빌리스 : 최초의 라틴어역 꾸란의 발안자

 보론 : 꾸란의 자기 이해와 주장

- 신실한 무슬림에게 꾸란은 온전한 신의 말씀이며,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단어 하나하나가 무함마드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로써 꾸란은 신적 구술로 여겨지며, 그러므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다. 신적 기원 때문에 꾸란은 오류가 없으며 유일무비하다. 내용에서도 꾸란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하늘에 보관되어 있는 원본에 상응한다. 이슬람의 이해에 따르면, 하늘에 있는 원본의 아랍어판은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신의 마지막 계시이다. - 정통 이슬람에서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꾸란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다만, 다른 언어에 의한 의역이나 주석, 혹은 행간의 해설은 허용되었다.

 마르틴 루터가 조정에 나섬으로써 결국 1543년 1월 11일에 인쇄본이 공개되었다.

 “무함마드나 투르크인들을 불쾌하게 만들고, (무기를 가지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길은 바로 그들의 꾸란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꾸란이 거짓과 꾸며낸 이야기들과 혐오스러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으며, 형편없이 나쁘고, 불쾌하며, 절망적인 책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알게 되는 데 있다.



제5장 이슬람과 프란치스코회ㆍ도미니코회의 대결

 새로운 강조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무슬림에게 이해시키고, 성서적 메시지의 신빙성을 전한다는 의도가 강해진 결과였다.

 “불신자들은 신이 세 신 가운데 한분이라고 말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신은 오직 한 분이시다. 만일 그들이 그런 주장을 그치지 않는다면, 그들 불신자는 고통스러운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꾸란 5,73)

 “그 분은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다. 신에게는 (아이를 세상에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아내가 없는데 아이를 어떻게 가질 수 있다는 말이며,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신은(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다”(꾸란6,101)

 “그들은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신의 아들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주장하는 것을 비웃는다. 왜냐하면 신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자기 아들의 고난 없이도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또한 인간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도록 창조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1,3,6-10)



제6장 쿠자누스와 루터의 꾸란 이해 및 비판

 무함마드와 그의 정신적 환경에 네스토리아니즘이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시 중동지역에는 네스토리아니즘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지배하던 시기에 네스토리아니즘은 그리스도교로 인정된 종교였다. 597년 페르시아인들이 아라비아 남부를 공략함으로써 그 지역이 그리스도교 교회들이 서구 그리스도교로부터 격리되었고, 그래서 네스토리아니즘이 이 지역에서 우대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비록 직접적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무함마드가 소문으로라도 네스토리아니즘과 접촉하였으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꾸란에서도 네스토리우스파적인 요소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 마리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사자에 불과하며, 그의 말씀일 뿐이다. 신이 그를 마리아에게 보내셨고, 자기 영을 주셨다.(꾸란 4,171)

 꾸란의 용어들이 애초에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무함마드는 자신이 대표하는 엄격한 일신론의 입장과 모순되지 않는 새로운 의미를 거기에 부여했던 것이다.

 아브라함이 자기 후손들에게서 신이 보내신 분이 나오도록 간청한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미할 수 있다고 해석한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무함마드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마엘을 거쳐 나타난 후손이라는 꾸란의 족보를 간과하고 있으며, 전적으로 신약성서의 전통을 이해의 근거로 삼고 있다.

 꾸란에서 신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을 찾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실패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꾸란은 신과 인간 사이를 제3자가 매개할 가능성을 일체 부정하기 때문이다. 중재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인간도 신 앞에서는 홀로 선다. 아무도 종말의 심판 때에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질 수 없다. 신과 인간 사이에서 어떠한 중재자 역할도 꾸란이 엄격하게 거부한다는 사실은 꾸란이 원죄를 부정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그래서 구원의 신학도 쓸데없는 것이 된다.

 신의 심판인 투르크인의 위협

- 투르크인들은 “신의 채찍이며, 악마의 자식들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고 루터는 1529년에 쓴 『투르크인과의 전쟁에대하여』에서 단정했다.

- 그가 1517년 10월 31일에 발표한 95개조 선언문에 대한 변론서이자 해명서로 쓴 것인데 - 결론 부분에서 오스만의 위협을 신의 심판으로 해석했다.

 십자군 정책에 대한 거부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전쟁, 십자가의 표징 아래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마태복음 5장 38절 이하에 나오는 평화의 명령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루터는 본 것이다. 루터는 이 경우에도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전제를 제시했다. 첫째, 그런 전쟁은 황제의 이름으로, 황제의 주권과 지휘권 아래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둘째, 그런 전쟁은 국토와 국민을 지키기 위한 방어의 필요성을 절대적으로 전제해야 한다. 루터는 투르크인들에 대한 전쟁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투르크인들에 대항하는 전쟁’에 반대했던 것이다.

 이슬람을 종말론적인 권세로 보는 해석

- 루터는 성서적-묵시문학적 예언을 근거로 이슬람을 신학적으로 종말론적인 권세로 해석하려고 시도한다.

- 무슬림이 지배하던 9세기의 스페인에서는 이미 톨레도의 명의주교인 에울로기우스(859년 사망)와 코르도바 출신의 평신도 파울 아부루스(800(?)~860(?))가 이슬람의 지배를 적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임재를 준비하는 것으로 해석

- 루터에게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종말론적인 적그리스도는 벌써부터 로마에 살고있으며, 언젠가는 교황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또한 적그리스도는 교회의 품으로부터 열매로서 자란 것으로, 그 전조가 이슬람이라는 것이다.

- “그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인 요한네스힐텐의 기이한 예언을 그들에게 들려주었는데, 힐텐은 수년 전에 이미 다니엘의 어두운 예언에서 투르크인들의 고난이 예언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충격을 받은 루터는 자기 나름으로 이슬람을 종말론적인 권세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사탄이 자기가 부리는 짐승을 통하여 투르크인들을 찾기 때문이다. 사탄은 다니엘서 7장 25절이 말하듯이, 성도들을 신앙과 충돌시키기 위하여 세속적인 지배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왕국, 그리스도의 성인들과 교인들도 찾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슬람이 단지 군사정치적인 세력으로서만이 아니라 종교적 혹은 영적인 세력으로서 이해된다는 것이다.

 내적인 적으로부터 외적인 적으로

- “성서는 우리에게 두 명의 폭군에 대하여 예언해 주는데, 이들은 최후의 심판 날에 그리스도교를 황폐화시키고 파멸시킬 것이다. 한 폭군은 영적으로 술수를 써서 거짓 신을 섬기게 하여, 올바른 그리스도교 신앙과 복음에 대항하도록 할 것이다. 그에 관해서는 다니엘이 11장에서, 이 사람은 자신을 가리켜 모든 신보다도, 모든 예배보다도 높은 존재로 여긴다고 서술한다(다니엘 11,36,37). 사도 바울도 이 폭군을 데살로니가 후서 2장 3절에서, 불법을 행하는 사람, 즉 멸망의 자식이라고 칭한다. 이 폭군은 교황청에 있는 교황인데, 그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데서 충분히 서술했다. 다른 폭군은 칼을 가지고 가장 높으신 분의 성도들을 괴롭힐 것이라고 다니엘은 7장 25절에서 예언한다. 마태복음 24장은 그때에 큰 환난이 닥칠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런 환란은 세상 처음부터 이제까지 없었던 것이며, 그것은 바로 투르크인들이다. 이로써 루터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한편으로는 끔찍한 외부의 적에, 다른 한편으로는 훨씬 더 까다로운 내부의 적에 협공을 받는 상황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외부의 적에 대항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교는 먼저 내부의 적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루터는 생각했다. 루터에게 이슬람과 교황청은 같은 적그리스도의 차원에 있었다.

 루터는 교황을 그리스도교의 가장 나쁜 적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슬람의 창시자가 아니라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보았다. “나는 무함마드를 적그리스도로 여기지 않는다. 무함마드는 매우 조잡한 인물이며, 신앙과 이성을 사용할 줄 모르는 유치한 검은 악마를 부리고 있다. 무함마드는 로마인이나 이교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밖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이교도일 뿐이다. 그러나 교황은 온전한 적그리스도이다. 그는 그리스도교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높고 아름다운, 세밀하고도 번쩍이는 악마를 부리고 있다.”

 루터의 이슬람 해석의 귀결

- 루터의 눈에 이슬람은 종말기의 적그리스도적인 세력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무함마드와 꾸란에 대한 그의 논박 역시 매우 강경하고 단호했다.

- “악마는 거짓말쟁이이며 살인자이다. 악마는 거짓말로써 사람의 영혼을 죽이고, 살해로써 인간의 몸을 해친다.”는 요한복음 8장 44절을 인용하면서, 루터는 무함마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무함마드는 거짓 영에 사로잡혔고, 그의 악마는 꾸란을 통해서 영혼을 죽였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혼란시켰다. 나아가 이제는 인간의 몸을 죽이기 위하여 칼을 잡았다. 투르크인의 신앙은 설교와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칼과 살육에 의해 발전한다.”

- 루터는 무함마드와 꾸란을 공격하는 전통적인 논점 가운데서 잘 알려진 두 가지 비난을 다시 제시한다.

① 악마가 무함마드를 교사하고 있기 때문에 꾸란은 악마의 작품이다.

② 이슬람의 확대는 전쟁행위의 결과이다.

③ 나아가 루터는 이슬람의 결혼규정을 비판한다.

 이슬람과의 신학적 대결에서 결정적으로 그리스도교적인 것

- 『투르크인에 대항하는 군대의 출정설교』에서 루터는 이슬람과의 신학적 대결에서 명백하게 그리스도교적인 것을 총괄하고 있다.

- “바로 주기도문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은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신앙으로부터 구별된다. 유다인들도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투르크인이나 사라센인들도 마찬가지

- 루터에게 개인적으로 그의 삶의 실존적인 의미의 핵심이자 그의 신학의 중심이었던 것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 근거를 두는 ‘십자가의 신학’이었는데, 이 십자가의 신학은 신학 자체가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상황으로 걸어 들어가는 실천적 수행에 근거를 갖는 한편, 내용적으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이신 신을 인식하게 되는 근거를 갖는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꾸란은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거기〔꾸란〕에서는 그리스도가 구세주도 아니고, 구원자도 아니며, 왕도 아니고, 죄를 용서하시는 분도 아니며, 은혜와 거룩한 성령을 주시는 분도 아니다”라고 루터는 탄식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틴 루터가 이슬람의 긍정적인 면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측면에서 매우 모범적으로 보인 무슬림들의 태도였다.

⇒ 루터는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특징을 인상적으로 강조한다. “불쾌한 것도 있지만 우리가 투르크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성직자들이 매우 진지하고, 용감하고, 엄격한 삶을 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들을 인간이 아니라 천사로 여기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황청에 있는 우리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은 이런 삶을 장난으로 여긴다. 둘째, 그대는 그들이 기도하기 위하여 수시로 성전에 모여, 단순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 안 어디에서도 그런 질서와 정숙함을 찾아볼 수 없다. 셋째, 그대는 그들이 그리스도 신앙이 아니라 무함마드에 대한 신앙으로 죽은 많은 투르크인 순교자들을 순례하면서 기리는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넷째, 그대는 투르크인들이 외적으로도 얼마나 엄격하고 성실하게 사는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며, 우리가 그러는 것처럼 술에 취하거나 포식하지 않는다. 그들은 경박하게 옷을 입지 않고, 크게 수다를 떨지 않으며 황제와 영주에게 복종하며, 예의를 갖추고 경외한다. 그런 태도는 우리가 독일에서도 기꺼이 실현하고 싶은 것들이다.”



제7장 계몽의 시대

 이성의 극대화와 인간성이라는 기준

- 임마누엘 칸트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이 미성숙 상태가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이 상태의 원인이 오성의 결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지도 없이도 스스로의 오성을 사용하겠다는 결의와 용기가 없는 경우이다. 따라서 기꺼이 알아라 너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줄 아는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야말로 계몽의 표어이다.”

 보론 : ‘만족스럽지 못한 계몽’

- 카트의 의견에 따르면 이런 종교적 영역에서의 미성숙 상태야말로 ‘가장 해롭고 또 불명예스러운 것’ 이기 때문이다.

- “한 교회기관이 모든 교인들 위에 군림하며 지속적으로 후견인 역할을 함으로써 민중을 지배하고, 이런 지배를 영구화하기 위하여 어떤 불변의 신조에 자신을 가두어두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진전된 계몽을 방해하는 그런 계약은 법적으로 무효이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다음 세대들을 위해서도 계몽을 포기하는 것은 “인류의 거룩한 권리를 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칸트가 2백년 전에 이성의 이름으로 설득력 있게 주의를 환기시킨 문제는 오늘날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교회법으로 조직된 그리스도교의 위계질서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연구와 교육의 분야에서조차 교회적으로 이미 주어진 교리에 일치하는 경우만을 허용한다. 이런 형태의 비판적 문제제기를 전혀 받지 않는 이슬람은 그런 위계질서를 이른바 신앙과 지식의 일치를 파괴하는 서구적 사고범주로 낙인찍으면서 꾸란의 무비적(無比的)인 지식으로 되돌아간다.

 하드리안 레란트 : 『무함마드의 종교에 대하여』

- “[그리스도교이외의] 여러 종교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대변자들이 착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멍청하고 또 놀림감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줄곧 생각해 왔다.” 왜냐하면 신은 개개의 인간이 무슨 종교를 가졌는지 와는 무관하게 “ 모든 인간에게 이성을 주셨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런 입장에서 계몽의 정신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레란트는 한편으로 이런 계몽의 정신에 개방적이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계몽 이전 시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그가 전통적인 반이슬람 논쟁의 경우와 전적으로 같은 의미에서 이슬람 안에서 사탄의 책략을 인식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레싱 : 『현자 나탄』

-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은 1779년에 『현자 나탄』이라는 희곡 형식의 시에서 어떤 ‘반지의 우화’를 들먹이며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이라는 세 위대한 일신교를 새롭게 정의하려고 시도했다. - 반지 하나를 세대를 거치면서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준다. 어떤 아들의 마음도 상하지 않도록, 아버지는 세공사를 시켜 똑같은 모양의 반지 두 개를 더 만들게 했다. 세공사가 반지들을 아버지에게 가져왔을 때, 아버지 자신도 원래의 반지를 다른 두 개와 구별할 수 없었다. 이것을 종교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여러 종교가 그 제의에서 - “심지어는 의복이나 음식에서도” - 서로 구별되지만, 근본적으로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 “이 세 종교 모두 같은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은가? 기록되었든지 전승되었든지 모두 마찬가지다! 그대가 그대의 조상을 믿는 것보다 내가 어찌 더 적게 우리 조상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면 그 반대여야 한단 말인가? 나의 조상에 반대하지 않기 위해서, 그대의 조상을 거짓말쟁이로 비난할 것을 그대에게 내가 요청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면 그 반대여야 한단 말인가? 똑같은 것이 그리스도교에도 타당하다. 그렇지 않은가?”

-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를 도움을 청하기 위해 불러올 수도 없고 반지를 구별할 수도 없게 되자, 재판관은 세 아들들을 물러가게 하려고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잠깐! 내가 듣기로는 진짜 반지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 레싱이 이 반지의 우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세 개의 반지는 - 즉, 세 일신교의 상징은 - 모두 신의 세 가지 은사라는 것이다. 각 종교의 진정성에 대한 질문은 이론적으로 결론지을 수 없다. 결정적인 것은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신의계시’의 비밀이 있다. 세 종교는 모두 자기 신자들이 서로 선행을 하는 데서 열심히 경쟁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 우리도 모르게 같은 방향을 제시하는 꾸란의 말씀을 떠올리게 된다. “선한 일에 경쟁해야 한다.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신은 여러분을 한데 모을 것이다. 실로 신은 전능하시다”(꾸란 2, 148. 또한 5,48도 참조)

- 레싱에 따르면 이 세 종교가 모두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신의계시’를 자발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신의 계시가 반영되는 것은 유다교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무슬림이든간에 인간 스스로가 자기 신앙에 상응하게 살 때일 뿐이다. 종교 그 자체가 인생의 성공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 성장한 자기 자신의 종교를 도와야 하는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라고 레싱은 표현한다.

- 세 일신교의 관계를 규정하는 결정적인 기준은 각각의 독자적인 신앙고백이나 혹은 전제되는 절대성의 요구가 아니라, 각 종교에서 실천되고 있는 인간성이다. 종교간의 이해에서 결정적인 것은 신학의 이론적 차원이 아니라 신앙의 실천적인 유의미성이며, 교리가 아니라 도덕이고, 주장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인 것이다. 이로써 그는 종교를 ‘역사라는 일종의 교육의 일부’로 이해한다.

- 전통적인 종교적 정체성과 함께 여러 종교의 개성을 서로 인정하고 관용적으로 대하는 태도야말로 이런 과정의 내부에서 요구되는 전제들이다. 레싱은 특히 사람들 사이의 평화는 여러 종교 사이의 평화를 전제하고 있다는 그의 확신을 표현한다.

- 프로이센왕 프리드리히 2세(1740~1786)는 옥좌에 앉은 철학자이기도 했는데, 이 왕은 그 치세에 계몽의 이념을 실현했다. 볼테르(1694~1778)에게서 영감을 받은 그의 철학은 그가 자신의 사유에 기초해서 자신의 지위를 ‘국가의 첫째 종’으로 해석한 데서 잘 드러났다. “모든 종교는 관용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이런 당위성은 어떤 종교도 다른 종교를 폄하해서는 안 되며, 모든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8장 ‘식민주의의 그늘에 가린 선교’

 유럽의 식민주의 시대와, 그에 따라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전개된 그리스도교의 선교시도는 오늘날까지도 정신적인 외상으로 남아 있다. 그리스도교 쪽에서는 무슬림에 대한 선교의 실패 경험에서 아직도 재기하지 못하고 있고, 무슬림 쪽에도 이른바 그리스도교 세력에 의한 억압과 착취의 상흔이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다.



제 9장 이슬람에 관한 역사적ㆍ비판적 연구의 시작

 선교를 통해서 이슬람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근대 그리스도교 교회의 무리한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런 움직임은 식민주의와 관련되면서 무슬림 사이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새로운 편견을 부채질했다. 더구나 논쟁적이고 변증적인 의도 없이, 이데올로기적인 강제와 교리적인 요구로부터도 자유로운 그런 만남의 기회를 잃고 말았다. 이런 과제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서야 비로소 이슬람 연구가 발흥했던 것이다.

 1910년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는 이슬람을 시야에 넣는 문제설정을 그 선교전략으로서 고려하고 있었지만, 다른 종교들, 특히 그 가운데 이슬람은 그 종교의 불완전성 때문에 다만 그리스도교의 절대성을 좀 더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요소로 사용되었다. 이슬람 신봉자들은 반동적이라는 [당시 그리스도교 쪽의] 주장과 함께, 그 종교는 반동성 때문에 멸망하며, 따라서 문화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는 그리스도교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둔다는 것이 당시의 지배적인 견해였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10장 접근과 분리 사이에서 : 해결되지 않은 문제영역

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이다. 이 선언은 언뜻 보면 미미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사이의 공통점을 강조하는 언급은 매우 중요하다. 먼저 유일신을 믿는다는 것과, 둘째로 부활과 심판에 대한 공동의 기대가 그것이다. 아브라함에 대한 조심스러운 지적 또한 세 번째의 가능한 연결점으로 평가될 수 있다. 넷째는 마리아에 대한 언급이다. 다만, 유일신에 대한 신앙고백과 함께 이슬람의 신앙고백에서 제2의 본질적인 요소인 무함마드의 사명에 대한 무슬림의 신앙, 즉 “신외에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신이 보내신 분이다.”는 명백히 고려되지 않았다. 하지만 위의 선언에서는 꾸란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부인한다는 것도 언급되지 않았다(꾸란 4,157-158 참조). 기도와 자선, 금식을 통해 신을 경배하는 것에 대한 언급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이 무슬림의 신정론의 본질을 아주 간단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꾸란 2,177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경건은 인간이 신과 최후의 심판과 천사와 책과 예언자들을 믿는 데 있다. 또한 신에 대한 사랑으로 친척과 고아와 가난한 사람과 여행자와 거지들에게 돈을 주고, 노예와 포로들의 몸값을 대신 내주는 데 있으며, 기도하며 세금을 납부하는 데 있다.”



 옮긴이의 말

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에 대하여 언제부터,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 매우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을까?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은 계시종교라는 특수한 자기주장에 근거한 신학적인 문제인가, 아니면 서구 그리스도교 제국의 역사적인 문제인가?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들 가운데서 유난히 유다교와 이슬람에 대해 더 적대적이었던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적 서구와 자신을 동일시하던 ‘코르푸스 크리스티아눔’ 시대가 지난 후에도 그리스도교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유다교와 이슬람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유다교와의 대화에 큰 부담을 갖는 것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독일 그리스도교만이 아니다. 현재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도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선뜻 발언하기를 주저한다. 그것은 역사적 경험 못지않게 신학적으로도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야말로 지난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 역사적 뿌리는 성서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주목할 것은 독일에서의 유다인 학살이 미치광이 같은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에 의해서만 저질러진 끔찍한 범죄가 아니라는 점이다. 히틀러가 처음 의도한 것은 강제 이주였지 몰살까지는 아니었다. 전쟁이 시작된 후에야 유다인 정책을 종족 말살로 돌변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의 어느 나라도 유다인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서방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600만 명의 유다인 학살을 방조했다는 최소한의 책임을 피할 수 없게

 유다인들은 신의 약속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고 본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왕국에서 그 약속이 이미 실현된 것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실패와 배신의 연속으로 보았고, 또 유다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데서 배신의 역사가 절정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 메시아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넘어 갈등을 더 심화시킨 것은 그리스도인이 성전과 율법을 무효화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학적으로 시작된 두 종교간의 갈등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한 그리스도교의 국교화에서 제도화되었다. 박해받던 카타콤의 관용적인 종교가 배타적인 종교로 탈바꿈한 것이다. 테오도시우스 1세(378~395)가 제국을 통치하던 시절에는 이교도들과 이단의 신앙 및 관습은 불법적인 것이 되었고, 그들의 사원과 교회는 파괴되거나 몰수당했다. 테오도시우스가 만든 법전은 유다인의 법적 신분을 강하게 억압했고, 뒤이어 중세까지 발전한 유다인들에 대한 부정적 관점의 기초를 놓았다. 유다인들에 대한 이런 부정적 신화는 마침내 사회적으로 결합되어 독일 나치에 의한 인종말살적 반유다주의에 이르렀던 것이다.

 이슬람은 그리스도교가 대적해야 했던 종교들 가운데 그리스도교로부터 가장 심하게 왜곡되고 비난받은 종교일 것이다.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를 ‘마호메트’라고 부른 데서도 드러난다. ‘무함마드’에 해당하는 스코틀랜드어 ‘머하운드’는 악마를 의미하는 말이었는데, 그를 의도적으로 ‘마호메트’라고 부른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무함마드는 우상숭배를 철저히 배격하는 한편 자신을 신의 시종이자 일개 인간에 불과하다고 했는데도 마치 그가 자신을 최고의 신으로 여긴 것처럼 왜곡했던 것이다.

 이슬람은 출발부터 강력하게 주장한 유일신 신앙과 종말론적 신앙 때문에 유다교나 그리스도교의 일파로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사이의 갈등은 두 종교의 신학에서 시작되었다.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은 동정녀 탄생을 사실로서 인정한다. 예수는 무함마드 이전 시대에 마지막으로 부름받은 위대한 예언자이자 치유자였고, 신성한 지위를 결코 탐하지 않는 사랑과 가난과 겸손의 사표라고 이슬람은 인정한다. 하지만 예수를 신의 아들이나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메시아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원죄의 개념을 모르는 이슬람은 대속의 필요성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두 종교의 신학적인 근본 차이가 있다.

 16~17세기 유럽에서는 지독하게 반이슬람적인 책들이 출판되었는데, 그리스도교의 이슬람에 대한 끝없는 증오는 동유럽에 대한 투르크의 정치적ㆍ군사적 압력과 관계된 것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이슬람에 대한 왜곡은 당시 그리스도교 서구의 열등감의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 수학, 화학 등 과학 분야에서는 물론 문학과 예술 면에서도 이슬람 세계는 서방 세계의 모델이었다. 중세 유럽인들이 이슬람이 지배하던 세계를 동양으로 표현한 것도 그들의 동양 지향성을 나타낸 것이었다. ‘오리엔테이션’이라는 말에 함축된 ‘새로운 사조나 문화에 대한 적응’ 이라는 의미도 이로부터 유래했기 때문이다.

 타종교에 대하여 이슬람이 더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라는 이야기도 사실은 역사적 근거가 없다. 이슬람은 오히려 타종교에 대하여 관용적이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이스탄불로 개칭한 오스만제국은 이스탄불을 종교적 코즈모폴리턴 도시로 만들고자 했고, 패전국의 그리스도교 문화까지도 관대하게 수용하는 정책을 폈다. 이스탄불에 지금까지도 그리스 정교회 본부가 존속하고 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 이슬람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태도는 훨씬 더 적대적이었다. 그리스도교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오늘도 이슬람을 선교의 마지막 적대세력으로 간주한다. 이슬람의 공격적인 팽창도 갈등의 심화에 기여했지만, 십자군 전쟁에서부터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에 이른 일련의 군사적 패배는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 이슬람과 유다교, 혹은 그리스도교의 적대적 관계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1918년 오스만 제국의 패전에 따른 전후문제 처리 과정에서 영국, 프랑스 등 유럽의 강국들과 아랍 국가들 사이에 빚어진 유다인의 국가건설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그 후 냉전체제 아래에서 강화된 서방의 친이스라엘 정책이 결국 오늘의 이슬람 국가들과 그리스도교 서구 국가들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킨 것이다.

 불교나 힌두교 등 전적으로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보다 이들 세 종교 사이의 갈등과 적대감이 더 심한 것은 이들이 어쩌면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오늘의 이슬람 국가들과 서방 세계 사이의 갈등과 분쟁을 ‘문명충돌론’이나 선과 악이 대결하는 ‘성전’으로 몰고가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 근대 계몽주의와 함께 비로소 이슬람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연구가 시작되었지만, 뒤이은 서구 식민주의와 그리스도교의 선교는 두 종교 사이의 갈등이 종교적으로만이 아니라 다시금 정치적ㆍ군사적으로도 심화되는 길을 열었다고 지적한다.

 통합 이후 더욱 활발해진 노동력의 이동은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사회인 유럽을 다종교 사회로 만들고 있고, 특히 무슬림의 진출은 시민권 문제, 참정권 문제, 이중국적 문제, 이슬람 종교교육의 공교육화 문제 등 매우 현실적인 과제를 유럽 사회에 던지고 있다.

  • ?
    강신철 2006.12.10 09:00
    이 세상 어느 것도 절대 선도 아니고 절대 악도 아니지요. 어느 종교를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믿고 행동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각종 종교의 경전에 쓰인 말들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옳은 말들이지요. 다만 믿는 자들이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악의 원인이 될 수도 있고 선의 근원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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