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김명자, 김건 옮김
내가 느낀 이 책의 화두(話頭)를 한 문장으로 축약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엔트로피(entropy)는 결국, 카오스(chaos)로 귀결된다는
시원(始原)으로 시작해서 탄생 → 성장 → 발전 → 절정 → 쇠퇴 → 소멸의 순환을
솔직히, 나는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을 공개하기 겁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 하고 싶고, 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은 관계로 짤막하게
둘째, 2주에 걸쳐 나름대로는 촘촘하게 짚어가며 읽었으나,
그래도 어쩌겠는가!
각종 메모와 자료의 기록으로 책이 너덜너덜 해질 정도로 혼돈과 충격 속에
이런 관계로 이 글은 원론과 개념에 대한 설명보다는,
이 책은 쉽지 않다.
그래서 이전에 읽었던 다른 책들과는 사고(私考)의 질과 양에 있어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르네 데카르트(Ren Descartes),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판단 비판을 주장한,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기독교적 주체사상을 완전히 뒤엎은, 챨스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
고전 역학론을 철저히 비판해온, 니콜라스 조지스 큐 로이젠(Nicholas George-scu-Roegen),
동양 자연과학의 최고봉이라 일컫는, 혜강 최한기의 기(氣)철학,
전체주의의 암울한 미래를 예견한, ‘1984’의 조지 오웰(George Orwell),
자연인식의 제 원리를 주장한,알프레드 노드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탈 모더니즘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창한, 미셸 푸코(Michel Paul Foucault),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현실 재구성을 위한 해체주의,
이성주의와 인간성에 대한 신념을 사회운동으로 재 창출하려는
시간이라는 인간의 측정단위 개념이 들어선 이래로,
1859년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한 후,
이로부터 시작된 인류의 생활방식은 수렵 → 농경(목축) → 산업 → 정보사회로
생활방식은 즉, 에너지의 변천사로 이야기 할 수 있는데,
물질적 풍요로운 삶은 결국, 자연으로부터 얼마만큼의 에너지를 끌어오는가? 로
에너지의 흐름이 변천하면서 인간 생활전반의 모든 것들이 같이 변화하기
그러나, 그 에너지 자원은 유한(由限)한 것이었고,
그에 발맞추어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엔트로피를 사전적인 의미로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엔트로피에 있어 중요한 물리법칙이 두 가지가 있는데,
열역학 제 1법칙이란,
제2법칙, 즉 엔트로피 법칙은,
즉,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부터, 사용할 수 없는 형태로,
본질적으로 열역학 제2법칙은 우주의 삼라만상은 질서가 있고
우주의 어느 계(System)에서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사용할 수 없는 형태로
이것들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겠다.
(도저히 간단하게 정리할 수 없는 분량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80년 초반에 출간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까지 20여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자연과학자와
그럼에도 이 책의 내용들은 미래의 예언서처럼 오늘날에도 상당히 많은 부분이
이에 반대의견으로 네겐트로피(negentropy)의 개념이 생겨나기도 했으나,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어느 곳에 질서가 더 생기는 것은, 다른 곳에 그보다 더 큰 무질서가
생긴다는 것을 절대 진리로 천명한다.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이른바, 발전에 의해 ‘더 질서 있는’ 물질적 환경을
만든다는 것은, 동시에 다른 한편에 그보다 더 큰 무질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자연 세계에서의 인공적 변화란,
사용 가능한 에너지를 불가능한 형태로 바꾸면서 주위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방향, 즉, 값어치가 있는 상태에서 값어치가 없는 상태로의
한 방향으로 밖에 일어날 수가 없다는 한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세계가 경쟁적으로 벌이는 경제 성장이란 결국,
사용 가능한 자원을 사용 불가능한 쓰레기로 바꾸면서 그렇게 하지 않아도
저절로 늘어날 수밖에 없는 엔트로피의 증가를 지속적으로 높임으로써
끝(End)을 향해 가속화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우리가 (특히, 미국이) 누리고 있는 풍요로운 혜택은
우리의 후손들이 사용해야할 에너지까지 미리 끌어다 쓰는 것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후손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말하면 2004년 현재 지구의 인구를 61억 명 정도로 추산하는데,
그 중 4% 정도를 차지하는 인구 2억 8천명의 미국이 소모하는 전세계 자원량이
100% 비율에서 40%가 넘는다.
만일, 지구 전체인구가 미국과 같은 풍요로운 삶을 산다면,
현재 지구 자원보다 대략 280배가 들어간다는 통계가 나왔다.
그야말로 미국은 지구의 전체 자원을 긁어모아서 자신들의 풍요를 유지하는
것이다.
만약에, 자국에서 만들어내는 헐리우드 영화와 같은 아마겟돈(Armageddon)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미국의 숨은 양심을 지닌 사람들이 우려하는대로
인류 최후상황의 그 중심에는 미국이 존재할 것이란 것이
나와 그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도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과학, 산업기술을
부러워하고, 찬양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존재하듯, 그것이 무조건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과학, 산업기술에도 야누스(Janus)의 이중성이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과학적 물질만능을 숭배하며, 그대들이 눈부셔하는 물질의 풍요 속에
서양의 근대 이후의 과학은 원초적인 유기성과 통일성을 깨뜨린 상태에서
오로지 인간의 실리적인 관점에만 집중하여, 인간욕구의 탐닉(耽溺)한
방향으로 기술을 끌어옴으로써
결국, 자연을 무모하게 착취하였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다만, 내가 우려하는 것은,
서양의 근대화 이후 동,서양 간에 물질적 질량의 차이가 점점 커짐에 따라
그들을 따라가기 위해 동양은 과학과 산업기술에 관해 서양의 발전양상을
그대로 답습(踏襲) 해왔다는 것과,
이제 서양에서는 일방적 성장론 그 자체에 대한 문제점이 붉어져 나오기
시작한 시점에서 우리는 그간 고도성장의 단맛에만 빠져 엔트로피 확대의
폐해에 대한 미래의 준비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에 대한 것이다.
어찌 보면, 지구상의 엔트로피를 정지시키는 방법은,
인간 그 자체의 소멸로서만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류가 존재하는 한은 엔트로피를 최대한 늦추는 방법뿐인데,
그 일은 인류가 간절히 소망하고 기다리는 메시아(messiah) 혼자의 힘이나,
어느 순간으로 우연찮게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현대인의 삶에서 과학과 기술은 결코 버릴 수 없는 상황이 이르렀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것들이 사람의 삶을 지배하게 함으로써 삶의 의미와 목적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을 더 이상 범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도 다시 옛날의 기억을 되살려
‘인간과 자연은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 는 근본적 믿음을
복원시켜야 한다.
이런 간절함이 통(通)한 것인지,
요즘 전세계적으로 오리엔탈리즘 으로의 복고(復古)나,
자연을 근간으로 둔 희랍사상이나,
동양철학을 배우려는 친환경적인 서양인들이 점점 늘고 있다고 한다.
참으로 불행 중, 다행한 일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후손이나 인류의 미래역사에 대한
생각 없이, 그냥 우리끼리만 즐기고, 잘살다 죽으면 그만 이라는
사고방식이라면 엔트로피의 존재에 대해 우리는 더 이상 아무런 위협과
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나는 다만, 몇 세기가 흐른 후에 우리의 후손들이, 선조였던 우리의 행적을
어떻게 평가할지가 궁금할 뿐이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깔아놓은 그 두터운 시멘트 바닥을 뚫고 피어나는
이름모를 풀 한 포기를 지켜보는 나는,
생명의 기적을 만들어내는 대자연에 대해 형언할 수 없는
경의(敬意)의 예(禮)를 표한다.
추신 : 이 글을 읽는 회원 중 혹시, 자연과학이나 사회철학 분야를 연구하시는
분이나, 엔트로피에 관한 관심과 정보를 가지고 계신 분이 계시면
의견을 나누고 싶은 바램이 있습니다.
많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 개인적평점 : ★★★★★
** 표현의 언어 중, 가장 마음에 남는 구절 **
너무 많은 관계로 한 문장으로 정리하겠다.
“천인합일(天人合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