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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뿌리

by 송봉찬 posted Sep 15,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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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뿌리--김수영시선--민음사



시1--死靈



......활자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靈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아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아라

이 황혼도 저 돌벽 아래 잡초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도

행동의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아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냐





시2--강가에서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

저이는 나보다도 가난하게 보이는데

저이는 우리집을 찾아와서 산보를 청한다

강가에 가서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준다

아니 돌아갈 차비까지 다 마셨나보다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 식구나 더 많다는데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4킬로 가량을 걷는다고 한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번 새벽에 한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추탕을 먹으면서 나보다도 더 땀을 흘리더라만

신문지로 얼굴을 씻으면서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는데

남방셔츠 밑에는 바지에 혁대도 매지 않았는데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고

그는 나보다도 짐이 무거워 보이는데

그는 나보다도 훨씬 늙었는데

그는 나보다도 눈이 들어갔는데

그는 나보다도 여유가 있고

그는 나에게 공포를 준다



이런 사람을 보면 세상사람들이 다 그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도 가련한 놈 어느 사이에

자꾸자꾸 소심해져만간다

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

자꾸자꾸 小人이 돼간다

俗돼간다 俗돼간다

끝없이 끝없이 동요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