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아이러니

by 전광준 posted May 2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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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이창동의 <시>를 본 후 닷새



 스무살 인호는 4일전 나를 두고 오늘따라 우울해보인다는 이야기를 했고, 15년지기 친구는 토요일 아침 간밤 꿈자리가 어수선했다며 안부를 물어왔다.



 황금종려상을 탈꺼라 부화뇌동했던 언론들과 평론가들의 기대 속에 이창동의 <시>가 오늘 아침 각본상을 탔다. 발칙스럽게도 아무 상도 못탈 것이라 예상했던 나는 각본상이라는 말에 무릎을 탁 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작년에 친정부 성향의 영진위 위원장이 이 각본에 0점을 준 일이 떠오른다. 시나리오답지 않고 소설형식이라 그랬다는 주장은 듣보잡 국내용 영진위원장이 세계적 거장을 향해 할 수 있는 변명은 아니었다. 추측컨대, 극 중 '희진' 혹은 '미자'가 다리에서 뛰어내린다는 암시를 두고 작년 이맘때 봉하에서 서거하신 '그분'의 반정부적 이미지를 떠올리곤 심히 불쾌했기 때문이리라. 참여정부에서 문화부 장관을 했던 감독일테니,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이창동의 <시>속 내러티브에는 사회반영적인 서브텍스트를 확고히 깔고 있었다! 모든 위대한 예술작품들은 그 작품들이 살아온 시대를 치열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위대한 것 아닐까. 듣보잡 영진위원장이 <시>의 각본을 읽으며 그분을 떠올렸듯 깐느의 엘리트 심사위원들도 그분을 떠올렸으리라. 나 혼자만의 즐거움에 빠져 살던 나는 이제서야 <그분>을 떠올렸다. 남의 죽음을 두고, 국격을 떨어뜨린 자살이라느니 지금도 시끄럽다.



  천안함을 두고도 말이 많다. 선거운동 개시일에 딱 맞춰 어뢰를 보여주었다. 천안함을 정치적으로 이용 안겠다는 대통령의 약속은 어디 갔나. 비명속에 목숨을 잃은 천안함 장병들을 떠올리면 어찌 그럴 수 있을까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또한 앞서 언급한 '그분'의 죽음을 선거에 이용한다.




  영화 속에서 그 누구의 슬픔과 아픔도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즐거움에 빠진 미자라는 인물에 대해 감독은 시를 못쓰게끔 설계해 놓았다. 그런 상태에서 쓴 시야말로 거짓시일 뿐이지 않느냐고 감독은 반문한다. 




  남의 죽음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라는게 극중 '미자'마냥 '아무개가 죽었대요~ 그 엄마를 봤는데,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라고 말하면서도 거동이 불편한 노인의 몸을 씻겨주고 1만원 받았다고 즐거워하는 모습이나, 희진 죽음에 가해자의 보호자로서 합의금을 빌리러 다니는 꼴이다. 그렇게 불완전하고 퇴화된 오늘날의 인간군상의 모습을 이창동의 <시>는 차갑게 고발하고 있었다. 메세지가 좋은 영화였다. 그 외 평론가들처럼 이 영화의 다른 이유를 들어 걸작의 대열로 볼 것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영화 <시>를 통해 알 수 있듯, 타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이 슬픔과 우울을 문학과 예술을 통해 승화시키는 일은 충분히 가치 있다고 느껴진다. 엊그제 다녀간 강한솔씨의 혼과 힘을 다한 열정적인 연주 속에 나는 예술과 현실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과 희망을 봤다. 강한솔씨의 연주가 내게 위로가 되주었던 까닭은 내 마음 속의 갑갑함과 분노가 건반을 향해 내려꽂는 힘찬 진실과 일체됐기 때문이었다.




  극 말미의 '미자'마냥 웃지 못해 나도 이 글을 쓴다. 역량상 위대한 예술작품마냥 내안의 우울과 분노를 승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겠지만, 걷고자하는 그 길 위에서만큼은 성실하게 찾아야겠다. 앞만 보고 가던 삶을 또 다시 멈춰 세우고 온 길을 돌아보게 해주었던 <시>...




  <시>를 보고난 닷새, 그렇게 사람들을 둘러보며 나 자신도 둘러본다. 아울러 국내에서는 각본점수 빵점 받고 깐느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시>의 이창동 감독님께 진심으로 축하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