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공지
2008.01.31 09:26

사람의 마을에 눈이 오다

조회 수 4001 추천 수 0 댓글 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하산 중에 펄펄, 흰 눈을 만났다. 남녘 매화가지 꽃눈을 다독이는 1월의 눈이다.


거대한 특고압 송전탑들이 <접근금지>라는 붉은 팻말을 걸고 선 청주 서쪽의 부모산.


휘날리는 눈발 속에서 한 달의 휴가를 정리하는 고요함 - 찻길 너머 교회의 첨탑이 환영처럼 신비하다.


산의 관자놀이를 안타깝게도 관통한 송전선 아래를 걸어 내려오면서


1월 5일에 처음 찾았던 독서클럽의 신년 산행을 떠올린다.


 


새 인연에 섞여 함께 올랐던 계룡산. 독서클럽의 길잡이 되신 선생님들과 친절하고 풋풋한 회원들을 처음 만났던 곳. 마침 방학 중이라 이후로 몇번을 더 대전을 드나들며 클럽이 베푸는 토론과 강의에 참가했다. 항공우주공학을 공부 중인 아들과, 낡아가는 교사인 나에게 무척 신선한 방식의 모임이었다. 앞서 많은 시간을 공유해온 회원들의 순수한 열정이 주는 탄력감 때문일 것이다.

 

생명의 유한성을 인정하면서도 초조함 없이 대우주,소우주의 비밀과 감동 찾기에 몰입하는 사람들. 고압 송전탑 아래에도 십자가를 세우고 절을 짓는 사람의 마을처럼 이 독서모임은 따뜻하다.

시공간에 떠도는 온갖 학설들의 귀와, 눈과 입들을 불러 모아

그 진위와 혼란을 수습하고 온당한 정신의 집을 짓기 위해

방위를 보고 터를 닦아 길을 트는 선생님과 서까래를 다듬는 학우들 .

이들의 본 보이기는 성결한 종교적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장 소중한 것들을 (청춘을 지난 자에게 시간은 분명 돈 이상으로 귀한 사유재산이므로 더욱 그렇다)  공동의 것으로 돌리는 생각과 말과 실천이야말로 제대로 학문하는 자의 진면목이 아닐까.

 

오십 중반에 서도록 이렇다 할 이타적 삶을 실천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부러움이 앞선다. 당연히 존경하고 따를 수밖에 없겠다.

내일이면 겨울방학 끝. 나는 다시 아이들의 마을이 있는 괴산으로 돌아간다.

이미 발원이 있었으니 접근금지, 고압송전탑이 가로막더라도 언제든 우린 다시 만나리라.

책과 사람들이 어우러져 은하수처럼 환한 이 마을에서...

 

-청주를 떠나면서, 옥순원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08-02-10 21:23:50 회원게시판(으)로 부터 복사됨]

Who's 옥순원

?
구슬네
  • ?
    강신철 2008.01.31 09:26
    2월3일 천문우주모임에서 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꼭 오세요.
  • ?
    송나리 2008.01.31 09:26
    가장 소중한 것들은 공동의 것으로 돌리는 생각과 말과 실천!
    좋은 말씀 가슴에 새기며

    언제든 다시 만날것이기에 그날을 기다립니다.
  • ?
    임석희 2008.01.31 09:26
    글을 읽는 동안 옥순원 선생님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리네요.. 환청???
    사람마다 글 냄새가 다른데, 선생님의 글은 참으로 뭐랄까... 따뜻합니다. ^^
  • ?
    윤보미 2008.01.31 09:26
    선생님.. ^-^ 저도 오십의 중반에 들어서는 날이 오겠죠. 과연 그 때에 선생님과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지... ^-^ 저도 닮고 싶어요
  • ?
    김주현 2008.01.31 09:26
    그림이 그려지는 글. 따듯한 옥순원선생님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7 봄밤에 11 file 이기두 2010.03.21 2176
106 실연 失戀 4 전광준 2010.03.25 2340
105 시공을 생각함. 4 이기두 2010.04.01 2479
104 침팬지가 느끼는 동료의 죽음 5 file 이기두 2010.05.02 2845
103 Let it be 10 전광준 2010.05.11 2504
102 귀환-1 문경수 2010.05.21 2034
101 삶의 아이러니 6 전광준 2010.05.24 2362
100 창디 총무로서 섣부른 고해성사 8 전광준 2010.05.26 2474
99 출근길, 소소한 즐거움 8 임은정 2010.05.27 2579
98 귀환-2 문경수 2010.05.27 2148
97 [스위스] 0. Intro - 열흘 간의 스위스 여행 13 이정원 2010.07.05 3082
96 [스위스] 1. 체르마트 - 마터호른이 보이는 마을 6 이정원 2010.07.31 3236
95 [스위스] 2. 체르마트 - 잊을 수 없는 진정한 퐁듀의 맛 7 이정원 2010.08.01 4539
94 [스위스] 3. 라보 포도밭 - 세계자연유산의 명품 와인 2 이정원 2010.08.01 2902
93 [스위스] 4. 체르마트 - 클라인 마터호른 전망대 7 이정원 2010.08.01 2854
92 [스위스] 5. 아스코나 - 재즈아스코나 페스티벌 10 이정원 2010.08.03 2745
91 어떤 야합에 대해 전광준 2010.08.05 3247
90 요르단 방문기 (자유게시판 전재) 3 현영석 2010.08.14 3736
89 요르단 방문 단상 2 현영석 2010.08.14 3663
88 나 보다 영리한 내 의식의 경향성 1 손동욱 2010.09.26 2295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2 3 4 5 6 7 8 9 10 ... 11 Next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