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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야의 결혼

by 양경화 posted Nov 20,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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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아시아사 학자인 르네 크루쎄(1885-1952)는 현재까지 유목사의 최고의 책으로 꼽히는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에서 유목민족에 대해 다소 낭만적이었던 나의 생각에 찬물을 끼얹었다.




“유목민들의 생활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가난한 투르크-몽골 유목민은 가뭄이 든 해가 되면 말라버린 우물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면서 풀이 메말라버린 초원을 지나 농경지대의 언저리, 즉 북직예나 트란스옥시아나의 문앞에까지 와서 정주문명이 이룩해놓은 기적, 즉 풍부한 농작물, 곡식으로 가득 찬 마을들, 도시들의 호화스러움에 놀라운 눈빛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농경사회와 동시에 목축.수렵 공동체가 잔존한 것 - 달리 말해 한발이 드는 해가 되면 초원생활에 드러나는 끔찍한 굶주림을 겪고 있는, 여전히 목축단계에 머물던 사람들이 보고 접촉할 수 있는 곳에서 농경사회가 더욱더 발전해간 것 - 은 현격한 경제적 대조를 보여줄 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잔인한 사회적 대조를 나타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경작지역에 대한 유목민들의 주기적인 침투는 자연의 법칙이었다.”




그네 크루쎄의 글을 읽은 후 난 여행기에서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혹은 대자연이라는 칭호로 찬사되는, 혹은 호방하고 거침없는 유목생활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유목민의 삶을 알고 싶었다. 얼마 전 신문에서 영화평을 읽는 순간, 이 영화가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해주리라 믿었다. 영화라곤 일년에 한 두 번 볼까 말까 하지만 선택은 찰나에 이루어진다.



유목. 일종의 유행처럼 노마디즘이니, 유목민의 삶이니 말하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멋지다 해도 유목은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벗어나지 못하는 삶의 형태일 뿐일지도 모른다. 찬바람과 흙먼지, 부족한 물과 식량을 운명처럼 감내하고 받아들이는 삶. 투야도 그랬다.



투야는 우물을 파다가 불구가 된 남편과 두 아이를 위해 기꺼이 거친 유목의 노동을 견뎌낸다. 우물이 메말라 가자 그녀는 60리 길을 왕복하며 온종일 물을 긷는다. 투야에게 필요한 것은 ‘물’과 노동을 덜어줄 ‘남자’였다. 자신도 허리를 다치게 되자 그녀는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재혼을 결심한다. 결혼의 이유는 딱 하나. 허허벌판에서 생존하기 위해서이다. 결국 그녀는 자신을 위해 밤낮으로 우물을 파는 남자와 결혼식을 올린다.



과연 그 우물에서 물이 나왔을까. 영화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고 끝을 냈다. 우물에 58개의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려도 소용이 없었다. 과연 투야는 결혼을 통해 무엇을 얻은 것일까. 사랑? 물? 그녀는 결혼 후에도 고된 노동을 견디며 물을 찾아 초원을 떠돌지 모른다.



설령 초원에서 말라 죽는다고 해도 그녀를 동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녀는 생존을 위해 사막의 풀처럼 강인했지만, 생존을 위해 사랑을 포기할 정도로 비굴하지 않았다.

아픈 남편과 같이 살기 위해 돈 많은 남자의 구애를 내치는 여자. 얼어 죽기 직전의 아들을 초원에서 구해오면서 생계의 전부인 양떼를 내버려두며 “양들은 필요 없어!”라고 단호히 말하는 여자. 물이 나오지도 않는 우물을 파는 남자와 결혼하는 여자.

따뜻한 물이 콸콸 나오는 곳에서도 생존과 사랑을 동일 선상에서 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녀는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고결하고 완전한 삶을 살았다.



하루하루 신의 뜻에 목숨을 내맡겨야 하는 삶. 왜 그렇게 힘들게 사냐고,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사냐고 물어서는 안 될 것 같다. 땅이 아무리 거칠어도 그곳에 뿌리를 내리는 생명들이 있는 것처럼, 그녀는 존재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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