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박사님 감사합니다.

by 임석희 posted Mar 1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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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 박사님을 초청해주신 백북스에 감사드리고, 연결시켜주신 운영위원님들께 감사드려요.
생각나는대로 적은(아직 다듬지 못한) 강연 후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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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 선생님의 강연은 역시 명강이다. 솔직담백하신데다 유쾌하시기까지! 자칫 무겁고 어두운 얘기가 될 수 있는 주제지만, 어찌나 쉽고 재밌게 설명해 주시는지! 대부분의 말씀에 공감에 또 공감을 하다보니, 선생님의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를 받아적는다. 아니, 그 말씀들은 이미 내 마음에 후비고 들어왔다. 

 

독서학파 Vs. 소장학파.백북스에 들어오기 전까진 나도 소장학파였다. 물론 백북스 활동을 하면서 집에 널린 안 읽은 책들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읽는 책보다 사 모으는 책이 더 많은 나의 안된 현실. 그래도, 그 소장서들이 언젠가는 또 어떤 인연으로 내 인생의 씨줄 날줄이 될 것이라는 말씀에 살짝 위안을 받는다. 하긴, 몇 년전 영풍문고에서 헐값으로 파는 그림책이 있길래 덜컥 사들고 왔는데, 몇 년 후 그 책이 중세미술책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바로 얼마전 나에게 큰 위안을 준 고딕미술책. 모든 건 우연이고, 인연이다. 며칠전 그 책을 펼쳐보며 얼마나 좋아했던지!

조금씩 천천히 쉬지않고(고3때 어느 학급의 급훈이었다), 그렇게 나는 소장학파에서 독서학파로 옮겨 가겠지. 작은 희망사항. ^^

 

 모든 학문은, 혹은 인류의 관심은, 가장 작은 나 자신과 가장 큰 우주이다. 나와 우주, 우주와 나. 고박사님은 ('나'라는) 존재와 우주에 대한 탐구를 고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나를 포함한 세계에 대한 총체적 설명이 철학임을 볼때, 고전은 곧 철학이고, 고전의 탐구는 철학에 대한 공부인 셈이다. 나 자신을 둘러싼 세상 모든 것에 대한 포괄적 설명을 함에 있어, 서양 철학은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인류, 인간. 그 넘어설 수 없는 간극에 대한 그리움과 괴로움. 이것이 현대 철학의 모습이고, 현재 우리의 세계관, 사고 방식으로는 건너지 못하는 강인 셈이다. 이것을 넘어설 수 있는 시도들이 현재 혹은 앞으로 진행될 터인데, 미래로서의 과거인 동양철학은 우주와 나를 하나로 봄으로써 그 간극을 메웠고, 서양에선 가장 최근의 석학이라고 할 수 있는 베르그송에 의해 그 간극을 넘어서고자 노력했다는 점이 떠올랐다. 

 

 사실, 나와 우주를 하나로 놓고 생각하게 되면, 이 세상 사물 어느것 하나도 사사로이 여길 수가 없게 된다. 애초에 내가 우주의 전체이고, 하여 이 모든 것이 나의 일부이기에. 주변에 널린 풀 한포기, 돌 하나에도 애정이 가게 된다. 이제 모든 사물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게 되는 것이다. 고독한 승방의 승려가 자연과 대화를 하게 되는 것처럼!

 

연애를 하게 된다면, 동의보감을 같이 읽으시라는 말씀은 꼭 실천해봐야겠다. 나 자신을 이렇게도 솔직하게 만들 수 있다니! 라는 말씀에, 이미 나는 한꺼풀을 벗은 느낌이다. 

 

얼마전까지도 나는 무언가를 외치는 나 자신과 불러도 대답없는 세계사이의 공허함때문에 힘들었었다. 죽도록 해보진 않았지만, 해도해도 알 수 없을 것 같은 세상, 좀더 파고 드니 지금 21세기인들의 사고방식으론 그 간극을 메울 수 없다는 허탈함. 그래도 이건 아닌데.. 라는 아쉬움. 절망속에서의 한줄기 빛을 찾아 헤매는 나의 고단한 여정. 원래 그렇게 불안하고 힘든 것이니, 확실함과 영원함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우리는 끝없이 이어지는 불확실성 속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석학의 말들도 위안이 되진 못했었다.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견딜 수 있을때까지 불확실성 속에서 사는 삶이다.라는 프로이트가 원망스러웠다. 계속해서 마음을 비우며, 그냥 묵묵히 이 길을 걷겠노라는 나의 다짐만이,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오늘을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보는 것으로 차라리 위안삼을 지언정. 

 

21세기 현재 우리시대에 진리는 없다. 아니, 무수히 많은 n가지의 진실과 진리가 있다.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보편적 개념으로서의 그 무엇이 있다고 말할, 또 없다고 말할 근거가 없다. 여전히 그 무엇인가를 찾고 픈 마지막 관념론자로서의 나는, 오늘 고미숙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우리 조상들의 '우주와 나'를 하나로 하게 하는 그 무엇이 어쩌면 미래의 대안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물론, 나는 이것에 확신을 부여할 수는 없다. 다만, 한가지 가능한 가설로써 애정을 가지고 믿고 따르고 싶다. 아직은 내가 내 자신을 아직 모르기에. 

 

이미 서양철학에서 인과율은 오래전에 붕괴되었다. 우리가 말하는 많은 법칙들은 가설로 후퇴하였다. 과학은 확고한 진리가 아니라, 지금까지는 타당한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아직까지는 현실세계를 설명해 주는 쉬운 방법인 것 뿐이다. 과학도 믿을 수 없는 것이라면, 과연 무엇을 믿어야 하나. 신은 오래전에 내 마음에서 사라졌고, 과학은 붕괴하고. 이 감정은 3년 전에 겪었던 갈등이다. 과학을 가설로 인정하고서야 비로서, 나는 과학의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과학을 이제 진정 사랑하게 되었다. 

 

모든 것은 순환한다. 우주의 에너지를 받아 내가 태어났을 것이고, 내게 들어온 에너지를 나는 무엇인가로 발산해야 한다. 발산되지 않는 에너지는 내부에 틀어앉아 내 몸에 변형을 일으키고 병을 만든다. 

 

21세기는 해체의 시대다. 지성이 해체되기 시작하고, 이성에 부과한 우리의 믿음에 금이 갔으며, 그토록 강하게 믿었던 신도, 과학 너마저도 죽었다. 이제 과학은 가설로만 남는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과학을 폄하하는 의미는 아니다. 해체 이후에 오는 지성의 통합이 무엇이냐라는 나의 오랜 질문. 그건 다시 통합일것인데, 어쩌면 그것이 우주와 나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우주와 나라는 주제는 고전철학의 주제이기도 하고, 그리스시대에도 르네상스시대에도 이 철학하는 마음들이 모여서 결국 지성이 통합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이 세상의 끝이 종말이 아닌 통합의 과정으로 다시 수렴하게 될 것 같은 작은 희망이 든다. 하여, 이제 나는 오랜 기간 나를 눌러온 세상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게 되었다. 고박사님 감사합니다.

 

젊어서는 경험이 없어 아둔하고,나이들면 (공부없이) 고집과 아집으로 미련해진다. 경계해야 할 문구다. 평생 공부하자.

 

나의 운명은 내가 태어난 그 시공간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흉내를 내다간, 나에게 주어진 숙명과 내가 만들어내는 나의 이미지 사이에서 나는 분열을 일으키게 된다. 거짓 내가 아닌, 진짜 내 모습으로 온 우주와 소통하며 살자. 그리하면, 마음은 저절로 편안해진다. 


우리가 과거에 얼마나 시공간 개념에 익숙해 있었던가. 지금은 잊어버린 시공간의 개념들. 이사할때 개업할때 무언가 큰 일을 시작할때 우리는 반드시 길일을 보지 않았던가. 어제의 이곳과 오늘의 이곳이 당연히 다르다. 시간만 다른게 아니라, 이 시공에 있는 존재들이 다르지 않던가. 앞으론 시공을 함께 보는 연습을 해야겠다. 관찰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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