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6.11.03 23:04 / 수정 : 2006.11.03 23:04
조용헌
옛날에는 한의사들 가운데 역학(易學)의 고수(高手)들이 많았다. 경주에 가면 5대째 한의원을 운영해 오고 있는 ‘오대한의원’(五代韓醫院)이 있다. 대대로 환약(丸藥)을 잘 만들기로 유명한 집이다. 현재의 원장은 5대 김세환(47)인데, 2대 원장이자 김세환의 증조부인 추강(秋崗) 김희영(金禧永·1867~1945)이 바로 역학의 고수였다.
김희영이 이순(耳順)이 되었을 무렵의 일화이다. 석양 무렵에 인근의 영일(迎日)에서 어업으로 크게 돈을 번 부자가 말을 타고 추강을 찾아왔다. 자신의 3대 독자 외아들이 이름 모를 병을 얻었는데, 백약이 무효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하소연하였다.
이 말을 들은 추강은 약을 한 재 지어주면서 목신(木神)을 떼어내는 부적(符籍)을 주었다. 아울러 시 한 수를 적어주면서 그 내용을 명심하라고 당부하였다. “명조세우(明朝細雨)에 걸객도문(乞客到門)이요, 도가일성(棹歌一聲)에 상판자무(商板自舞)라”. “내일 아침 이슬비에 먹을 것을 청하는 나그네가 대문에 이를 것이며, 뱃노래 한 소리에 장사 판자가 스스로 춤을 춘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아침이 되니까 부슬비가 내리는데, 이 부잣집에 몰골이 처량한 과객이 찾아왔다. 밥상을 푸짐하게 차려주었음은 물론이다. 집주인이 이 과객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으니, 삼척·울진에서 고깃배를 타다가 지난 여름에 풍랑을 만나 난파를 당했으며, 자신은 간신히 살아났으나 동료들은 물에 떠내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를 불쌍히 여긴 주인은 그 어부를 자신의 어장(漁場)에서 일하도록 조치한 다음에, 장기(長技)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어부가 뱃노래를 한 곡 구성지게 뽑았다. 주인이 그 순간에 짚이는 바가 있어서 마룻바닥의 판자를 쳐다보니까 판자가 스스로 진동을 하지 않는가! 추강에게서 받아온 부적을 그 판자에 붙였다. 그러고 나서 3대 독자 외아들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알고 보니까 사랑채의 그 마룻바닥 판자는 풍랑에 난파했던 배의 판자 조각으로 만들었던 것이었다.
풍랑에 죽은 어부의 혼신이 판자에 붙어 있다가, 뱃노래를 들으면서 해원(解寃)이 된 셈이다. ‘해원치병’(解寃治病)의 이치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조용헌·goat1356@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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