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본에 대한 대담
문창 : 인간이란 무엇인가?
용두 : 그냥 무시하자니 개운찮고 답을 구하자니 막막하군.
문창 : 이 의문의 당위성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용두 : 누구나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데 꼭 되새겨야 하는
부분이다
문창 : 삶의 의미를 행복 추구라고 하는데 우리 모두 최면에 걸린
것인지도 모른다.
용두 : 결국 우리는 토론과 사유를 한다 해도 캄캄한 암흑으로 들
어 갈 것이다.
문창 : 그래도 우리는 최선을 다한 선택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용두 : 결국 우리는 캄캄한 암흑 반대편에 있는 불확실한 희망을
붙잡고 빛이라 믿고 싶어 하겠지
문창 : 진정한 희망 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용두 : 우리는 모두 희망이기를 바라는 자기 최면을 걸고 이것도
모자라 타인 까지도 최면을 걸어 무리를 지어 불안함에서
멀어지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문창 : 이런 것도 불안함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인가?
용두 : 인간과 비인간의 차이는 사유 능력이다 동물은 주어진
본능대로 쏘아진 화살처럼 날아가듯 살지만 인간은 본능
대로 사는 그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문창 : 이 사유능력은 행운인가? 불행인가? 많은 빚을 진 빚쟁이
가 어느 날 빚진 사실을 망각하고 빚의 고통에서 벗어났다.
행운인가? 불행인가?
용두 : 하하 우리는 사유 능력이 있으므로 사유하는 것이 자연스
러운 것이다 사유 능력이 있는데 사유하지 않는 것은 멀
쩡한 다리를 두고 기어 다니는 행위와 같다
문창 : 우리가 이 의문을 회피하는 것은 우리 기본 속성을 저버리
는 행동이고 자신의 삶에 대한 무책임한 방임이다
배 부른 돼지이기 보다 고뇌하는 소크라테스이고 싶다
용두 : 데까르트의 위대성은 처음부터를 생각하게 한 것이라고
하는데 근원적인 처음부터를 생각할 때 분리해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창 : 큰 줄기는 아무래도 인간을 몸과 마음으로 나누어 생각해
야 한다
용두 : 몸은 우리의 겉모습이니까 특별한 이견이 없는 것이고
마음이란 무었인가?
문창 : 마음이란 몸의 행위를 하게 하는 시발점이다
용두 : 마음은 비물질적인 것을 뜻하나?
문창 : 그렇다
용두 : 마음은 몸과 별개의 것인가?
문창 : 글쎄! 단언 하기보다 여러 경우를 모두 봐야 할 것이다
첫째. 마음을 뇌의 작용으로 생각할 수 있고
둘째. 몸과 별도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용두 : 마음을 몸의 작용으로 본다면 인간은 일정한 시간을 생존
하는 생명체이므로 복잡 할 것이 없다.
마음이 몸과 별도의 것이라면 몸은 자연에서 왔고 마음은
어떻게 나왔나?
문창 : 일자에서 나왔다
용두 : 마음이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가?
문창 : 인간이라면 본질적으로 같아야 되므로 그런 구별이 있다면
다른 종으로 봐야 한다
용두 : 그렇더라도 겉모습으로는 구별이 안되므로 구별이 어렵다
그런 경우는 없기를 바란다
문창 : 그런것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므로 논외의 것이다
용두 : 일자에서 우리 개개의 마음은 각설탕의 무더기처럼 개개가
모아져 있는가? 아니면 바닷물처럼 경계가 없는 일체인가?
문창 : 바닷물 같은 일체이다.
용두 : 경계가 없는 일체에서 마음은 어떻게 분리 되는가?
문창 : 절대자의 속성은 충만이고 이 충만이 차면 밖으로 뻗쳐
나간다 멀리 뻗쳐나가면 중심과 변질돼 중심과 분리된다
이것이 마음의 출발이다
용두 : 상식적으로 이해 안되는 부분이다 유일자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행위가 일어 날 수 있는가? 시공이 없는데
문창 : 이성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부분이다
용두 : 우리의 정상적인 사유를 통한 결정이 아니라 믿음의 바탕
이 주사위 놀이 같은 선택에서 출발하는가?
좋다 그러면 일자에서 멀어진 마음은 어떻게 되는가?
문창 : 구원을 통해 회복된다
용두 : 구원이 안되면?
문창 : 소멸이다
용두 : 그러면 그 현상은 1회성인가? 반복인가?
문창 : 우주의 수축 팽창처럼 반복이라고 생각한다
용두 : 일자는 자기를 끊임없이 학대하는 알 수 없는 취미를 가졌
군
문창 : 그대가 따르는 불교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용두 : 시간도 공간도 원래 없다고 하지 그러니 물질은 없다는
것이고 나라는 마음도 없다고 하지
문창 : 그러면 내앞에 있는 그대는 허깨비란 말인가?
용두 : 달에 사람 얼굴이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
기 때문에 느끼는 착각이다 그것처럼 무엇이 있다고 착각
할 뿐이지
문창 : 우리가 대화하는 주체는 무엇인가?
용두 : 말로써 표현 할 수 없고 깨침을 통해야 알 수 있다고 믿네
문창 : 그러면 불교에서는 우리가 원래 부처였는데 중생의 모습을
하고 있고 깨침을 통해 부처로 회복한다고 하는데 지금 부
처에서 벗어난 것처럼 또 중생이 될 수도 있지 않겠나?
용두 : 글쎄 안경을 끼고 있는 사람이 내가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해도 안경을 끼고는 본래 모습이 왜곡 될 수밖에 없으므로
안경 없이 볼 수 있는 시력을 회복 하는게 우선되어야 한다.
문창 : 어떻게 시력은 회복되는가?
용두 : 깨침이라 생각된다
문창 : 깨침이 있기 전에는 알 수 없는가?
용두 : 없는 것으로 안다
문창 : 알 수 없는 것을 해결하려고 알 수 없는 것을 해야한다
이성을 강조하는 불교도 결국 믿어야 안다는 유신교와 다를
바 없군
용두 : 결국 문제점만을 찿아 냈군
문창 : 그러나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문제를 찿았으니 답이 나
올 길이 열린 것이다. 이 의문에 대하여 혹 다른생각이나 과학적 견해는 어떤지 궁금하군!
여러분의 견해를 들어보자구!
마음과 몸을 분리하여 보아야 한다고 하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분해해서 또는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옳은 생각인데,
분해를 해 놓고 관계를 잘못 연결하면 딴길로 가게 될 듯합니다.
분해하는 것보다 연결하는 것이 더 어렵고,
잘 연결하는 뇌가 필요해서 깨달음을 강조하는 듯 합니다.
가부좌하고 앉는 것이 불편한 사람은 즉 요즘 뜨고 있는 시스템학, 네트워크학이 대안이 될 듯 ^ ^.
토론에서 마음이 뇌에 의하여 생긴다고 하면서 마음과 몸이 별개라고 규정하는 것은 모순으로 보입니다.
몸이 없어도 마음이 있는가?
마음이 없어도 몸이 있는가?
몸없는 마음은 주말연속극 중의 화면상 주인공과 다를 바 없고,
마음없는 몸은 태권V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마음이 생기므로 해서 생명이 생겼다고 볼 때,
마음이 있는 작용체를 몸이라고 부를 것.
그것의 물리의 작용이 물질적인 작용만을 따르지 않고
나 또는 생명은 자신의 의지로 하고자 하는(欲) 작용(능동성)이 생기고,
타와 아를 구별하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생명계를 욕계(欲界)라고 칭합니다.
마음은 물리적 작용의 연장으로 형성된 움직이려는 의지에서 생긴 것이지,
몸의 물리적작용 없이 마음이 있다고 하면,
아지랑이같은 형이상학의 세계를 헤메게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토론중에 '시공이 없다, 내가 없다, 물질이 없다, 마음이 없다'고 하는 없다(無)는 것은 (마음과 몸 등이) 물리적으로 아주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물리적으로 아주 없다고 하는 것을 단견(斷見)이라고 하며, 잘못된 견해라고 합니다.)
(나와 타자와 자연과 세계와) 구별이 없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별이 없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대칭성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대칭성으로 부터 모든 물리적 작용과 생명 현상이 생기고
또 소멸한다고 설명하는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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