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조회 수 1775 추천 수 0 댓글 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어느 인문학자의 나무 세기>, 강판권, 2002, 지성사



설화와 민담, 역사 속에는 참 많은 나무가 등장한다. 달에 비친 계수나무, 단군 신화의 박달나무, 불교 미술의 비밀을 반영하는 향나무 등등. 나무에 얽힌 이야기만 풀어 봐도 역사가 술술, 한 권은 족히 된다. 나무를 통해 역사를 해석하려는 새로운 시도 하에 탄생한 이 책에는 나무 그 자체의 생물학적 특성과 나무에 얽힌 다양한 설화, 역사적 사실, 저자 자신의 감상 등이 쉬운 이야기체로 담겨 있다.

주변의 사물을 통해 역사를 공부하는 방식 자체는 '성리학적 격물치지'를 본받은 태도다. 한 그루 한 그루 나무를 센다는 것은 나무에 깃든 사연을 더듬는 행위이고 더 나아가 인간의 생활, 정신사를 읽는 태도라는 설명. 눈 덮인 해인사에서 꿈에 그리던 박달나무를 만났을 때의 정황 설명, 살구씨와 닮아서 '은빛 살구(은행)'라고 불리는 은행알의 모습을 담은 사진 등이 편안한 느낌을 주는 책이다.인문학의 위기가 논란이 되고 있는 지금, 인문학 부흥을 위한 새로운 공부론을 제안하는 한 젊은 역사학도의 낮은 목소리가 있다. 성리학적 격물치지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주변의 사물을 살피는, 이른바 근사(近思)의 공부법이 바로 그것.

이 책의 저자인 강판권 박사는 나무를 통해 역사를 해석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펼치고 있다. 나무에 깃들여 있는 사연을 더듬어 가다 보면 어느덧 인류의 기나긴 정신사적 궤적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말이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학교 교정에서, 동네 어귀에서, 답사의 길목마다에서 한 그루 한 그루 나무를 세고 있다. 나무를 세는 것은 이제 그에게 더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의 '나무 세기에 관한 보고서'이다.


한 그루 나무를 통해 역사를 읽는다는 일이 사실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니다. 예컨대 "환웅이 내린 박달나무는 어디에 있을까?"라거나 "백악기 시대 속씨식물, 달 속의 계수나무는 어디에 있을까?"라는 의문을 떠올렸다고 해보자. 이들 질문들은 어쩌면 역사 이전의 단계, 즉 신화의 세계에 속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여기에는 강한 '추측'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추측과 상상을 넘나들다 보면 어느새 이들 나무들에 대한 '역사적 실체'가 조금이나마 만져지지 않을까?

본문에서는 저자가 실제 박달나무와 계수나무를 찾아 안타깝게 헤맨 이야기들이 담담하게 묘사되어 있다. 처음 박달나무를 만났을 때의 감격을 그는 이렇게 전한다. "도로변에 우뚝 선 물박달나무를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났다. 박달나무를 만났다는 기쁨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 눈앞에 나타난 물박달나무가 내가 상상했던 우주목(宇宙木) 혹은 세계수(世界樹)와는 달리 너무 왜소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안아 보았다. 굵지 않은 나무인지라 작은 가슴에 들어왔다. 비가 내린 뒤라 나무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본문 31∼32쪽)." 그러면서 이야기는 우리 민족이 왜 박달나무를 숭배하게 되었는가로 이어진다. 그 이유가 다듬잇방망이나 홍두깨, 빨랫방망이와 관련이 있다면, 과연 신성한 나무란 무엇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어진다.

화가 고흐의 자살과 측백나무를 연관지어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고흐는 왜 죽기 직전에(1년 전) <측백나무>를 그렸을까? 과연 그는 측백나무가 불로장생의 상징이자 실제로도 정신병 치료 효과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일까? (측백나무에는 신경쇠약과 불면증에 좋은 '백자인'이 있다.) 이런 생각들을 좇다 보면 참으로 인생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논어』의 「자한」 편에 나오는 "자왈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子曰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의 송백(松柏)을 우리는 흔히 '소나무와 잣나무'라고 해석하는데 사실은 '측백나무'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은 저자의 지나친 억측일까?

그럼 이런 생각은 어떤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된 팔만대장경의 비밀이 산벚나무와 돌배나무에 숨어 있다는 얘기는? 지금까지는 이 팔만대장경판이 자작나무로 만들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250개의 표본을 추출해 분석한 결과는 기존의 설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팔만 가지의 번뇌를 새긴, 81340매의 경판을 이루는 나무의 주종은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류였다고 한다. 또,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렸더니 / 내 심은 탓인지 기다려도 오지 않고 / 무심한 일편 명월이 빈 가지에 걸렸더라"는 시조처럼 큰 뜻을 품었던 옛 선비들의 기상을 기리는 대목에서는 오늘날 이땅의 지식인들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길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케 한다. 정녕 벽오동은 봉황을 기다리고 있는데 봉황은 선비가 그리운 것은 아닌지…….

이렇듯 이 책은 열여섯 나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들에 얽힌 역사와 신화를 더듬어 보는 책이다. 하지만 단지 나무에 얽힌 온갖 지식의 단편들을 주워 모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무'라는 하나의 고리를 통해 새롭게 역사를 들여다보고 '생각하는 방법'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나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더욱 풍요로운 경험들은 독자의 몫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아름다운 세상'이 아닐까?
  • ?
    최경희 2009.09.17 07:34
    책소개 무척 관심있게 보았습니다.
    이중훈님 독서량 엄청나요 게시판 올리는글 관심두고 있는 데
    어떤 분인지 궁금 합니다.
    책을 선정 하는 것도 조금 독특한 면이 있고 소개도 잘 하세요.
    난 아주 마음에 듭니다.소개한 책 중에 일부 읽었던 책도 있었지만
    직접 읽을 때보다 설명이 오히려 더 크게 와 닿았어요
    지금 이책은 읽지 않았지만 설명으로 어떤 책 일거라는 상상도 되고
    빨리 책 구해서 봐야지 하는 욕심이 나요
    저자도 아주 톡특한 분이고 대구에 계시기에 지면으로 만나기도 하는 데
    나무 예찬론자이죠
    아름다운 세상이 되고 행복의 단위가 높아 지려면 나무를 사랑하고
    나무와 함께 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지론을 저자의 책을 통해서 배우고
    한 책을 두고 같은 시각으로 공감 한다는 것 좋은 느낌 ~
    올리신 글 감사 합니다.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144 공지 오세정 학장의 글-[중앙시평] 광우병 괴담과 과학지식의 소통 [중앙일보] 3 이석봉 2008.05.08 1569
3143 공지 [여행] 10. 폼페이 : 비극적인 종말을 맞은 도시 6 이정원 2008.01.25 1569
3142 '회원의 강제 퇴출'에 대해 운영위원회에 질문드립니다. 1 홍종연 2011.05.24 1569
3141 The NewYork Review of Books에 소개된 라마찬드란의 신간 남인호 2011.03.19 1570
3140 공지 경주 여행의 하이라이트-박영호 선생 5 이석봉 2008.05.01 1571
3139 공지 [기사] 당신이 잠든 사이, 뇌는 창의성 발전소 3 서지미 2008.11.27 1571
3138 공지 책한권 소개 드립니다. ^^ 8 file 김영이 2008.08.17 1572
3137 공지 가입인사-감사의 글 4 최선희 2008.11.05 1572
3136 공지 25일날 그냥 가면 되나요? 7 김학성 2008.11.23 1572
3135 공지 [공지] 4/22 (화) 독서토론회 <뷰티풀마인드> 2 이정원 2008.04.21 1572
3134 페이스북에 백북스 그룹 만들었습니다. 2 김기욱 2011.04.24 1572
3133 가입인사 올립니다~ 이희심 2011.08.17 1572
3132 공지 다음 주 독서모임 내용 관련 1 박문호 2007.04.08 1573
3131 공지 [축하]온라인회원수 5000명 돌파! 4 file 강신철 2008.11.27 1573
3130 신체가 정신에 미치는 역할, <베르그송 사상에서 신체와 기억> 다지원 2010.12.14 1573
3129 '깨어있기' 과정 -이원규, 미내사클럽 대표 (한국정신과학학회 6월 월례회 강연) 김선숙 2014.06.16 1573
3128 공지 과학과 새로운 인문학의 최전선에서 벌어지는 토론들 3 장종훈 2008.11.25 1574
3127 공지 Obamerica의 도전과 시련 1 file 고완히 2008.12.03 1574
3126 참가신청합니다. 늦었나요? 정우석 2011.03.02 1574
3125 공지 100Books 발표 예정자 5 박문호 2008.04.29 1575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54 55 56 57 58 59 60 61 62 63 ... 216 Next
/ 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