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이문열 지음)
시와 소설은
다르다. 시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야기이고 소설은 남의 이야기이다. 시는 작가의
주관적 경험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고, 소설은 남의 경험을 마치 자기 경험인 것처럼 풀어낸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순수하지만 소설가는 뻔뻔하다.
소설가가 뻔뻔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소설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독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살짝 주입시킬 수 있는데,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반감을 갖게 되니, 문학적 장치를 이용하여 은근슬쩍 자신의 생각을 밀어 넣어야 한다. 마치 자신은
독자들의 흥미를 위해 이야기를 풀어 내고 있을 뿐이라는 투이지만, 사실 감추어진 목적은 (아둔한) 독자들을 가르치는 데 있다.
우리나라 현대
소설가 중에 ‘이문열’만큼 독자를 가르치는 데서 노골적인
작가가 또 있을까?
이문열의 소설을
읽으며 청소년, 청년기를 보낸 나는 그를 매우 존경한다. ‘대륙의 한’을
보면서 잊혀졌던 백제의 영광에 대해, 그리고 역사는 어차피 해석인데,
이왕이면 진취적으로 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는 주장에는 통쾌함을 느껴 술을 마셨다. ‘사람의 아들’, ‘칼레파타칼라’를 읽으며 무엇이 옳은 것인지 헷갈려서 또 술을 마셨다. (이문열의 글에 묘사된 것처럼 술집의 방을 걸음을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술병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 오직 그게 가능한지 검증하기 위해 친구들과 술을 마신 적도
있었다. 물론 실패했고, 방을 가득 채우려다가는 죽을 것
같아 탁자의 짧은 면, 한쪽을 채우는 것으로 목표를 낮추고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또 선생을 존경하게 되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부터는
소설을 한 동안 보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서 맨 처음 집어 든 것도 역시 이문열의 작품, ‘삼국지 평역’이었다. 서른이 넘어
읽는 삼국지에서 왜 그리 감동을 느끼고 빠져 들었는지, 소설을 읽는 동안 회사업무보다 소설에 정신이
팔렸었다. 다행히 며칠 지나지 않아 다 읽어 치웠는데, 마지막
책장을 덮기가 왜 그리 아쉽던지……
그러나 이문열의
작품은 여러 번 반복해서 읽기에는 거북하다. 가르침은 한
두 번이면 그뿐, 반복되는 가르침은 사족이고 잔소리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이문열의 작품 중에서 조금은 이질적이다.
가르치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사라져 잊혀지는 고향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수묵화처럼
담백하게 그려내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노교수가 수업 중에 잠시 지난 추억을 회고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할까?
수업에 대한
부담을 내려 놓고, 존경하는 노교수의 추억을 듣는 시간, 공책을
빼곡히 채우며 배우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이런 시간이 더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