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한 천재 미술가의 삶과 죽음, 예술이 남긴 것… | ||||||||||||||||
부산 비엔날레 고 박이소 유작 전시…고독한 예술혼의 죽음 애도 | ||||||||||||||||
그의 귀국은 한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의미
박이소는 아시아계의 문화적 특수성을 이용해 미국 사회에서 문화적 주류로 성장할 수 있었지만 1994년 돌연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미국의 사회분위기가 나에게 은연중에 요구하던 복합문화주의, 소수민족, 이민자, 오리엔탈, 이국적인 것 같은 굴레의 한계를 벗어나고 싶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에 대해 정헌이 한성대 회화과 교수는 “미국이 제3세계 국가에 허용한 문화적 혜택을 받아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인정받은 작가였고 계속 있었으면 더 유명해 질 수도 있었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돌아왔다”며 “그런 식으로 성공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를 기점으로 그동안 한국 미술이 가슴으로 ‘느끼던’ 미술에서 언어로 ‘설명하는’ 미술로의 전환이 시작됐다는 주장도 있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봤던 한 대학교수는 “그분이 처음 한국에서 개인전을 열었는데 특이하게 카탈로그에 평론가들의 대담을 실어 현대 미술을 엄청 까발렸다”며 “솔직히 그 당시에는 내가 대학교수였음에도 그분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정도로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어 “이 분의 그림은 공모전에서 상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당시 공모전은 단순히 그림에 상을 줬을 뿐 그림에 담긴 미술을 평가할 정도의 이론적 배경은 갖추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후 박이소는 한국 사회의 날림성, 기저가 없는 문화적 배경에 대한 비판작업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예술적 삶과 사회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중단하지 않았다. 2002년 에르메스 미술상을 수상했고,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한 ‘2010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 10선’에서는 자본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정헌이 교수는 “그의 미술은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며 “기존 미술처럼 긴장하고 보기를 강요하는 미술이 아닌 누구나 자유롭게 다가와 느낄 수 있는, 뭔가 다시 생각할 수 있게끔 반성하게 만드는 미술이었다”고 평가했다. 부산비엔날레 박만우 큐레이터는 “고인은 ‘SADI(Samsung Art&Design Institute)’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를 했는데 가장 형식적이고 실험적인 교육자로 기억한다”며 “단순히 현대 미술의 흐름이나 주류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 미술에 대한 포지셔닝을 가장 날카롭고 통찰력있게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재능은 시기할 수도 없었다”
고인과 함께 SADI에서 교수생활을 했던 박성환 작가는 “그의 재능은 시기할 수도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한번은 박이소가 액자에 원고지 한 장을 달랑 넣고 ‘창작자의 죽음’이란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박 교수는 이 작품을 보고 가슴이 파이는 충격을 받았단다. 박 작가는 “박이소는 언제나 함축적으로 현대 미술의 방향을 제시하고 서양 사조들 가운데 우리는 어느 공간으로 나가야 하는가 등 언제나 한국 미술과 불합리한 시스템에 대해 고민했었다”며 “아직 그에게 주어진 많은 일들이 남았는데 너무나 일찍 가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박 작가는 이어 “공식 석상에 작업복을 입고 나오고 누런 갱지로 명함을 만들어 나눠주는 등 권위적이고 형식적인 것을 싫어했던 사람이었다”며 “한번 시작한 일은 철저하리만큼 완벽하게 처리했으며 불의와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한국의 아티스트는 죽었다” 많은 지인들은 “고인은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에 많이 힘들어 했다”고 입을 모았다. 그들은 “패가 갈리고 중간에서 좀 튄다 싶으면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회에 대한 절망, 이상한 편법이나 부조리를 보지 못 해 더더욱 신경쇠약과 통증으로 나중에는 자포자기까지 했었다”며 “또한 작품 활동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은 것도 이렇게 빨리 떠나게 된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고인이 평소 유족들에게 미술계쪽 얘기를 하지 않아 컴퓨터 메일을 정리하다 그의 죽음이 두달이나 지나서야 미술인들에게 알려졌다는 이야기는 그의 성정을 짐작케한다. 박이소의 가장 절친했던 친구인 계원조형예술대 이영철 교수는 여전히 슬픔에 잠겨있다. “아티스트는 물질적 풍요가 높아지고 야만의 사회로 바뀌고 있는 요즘의 현실을 비판하고 치료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아티스트는 무능하고 수동적이며 버림받은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박이소는 이러한 인간적, 사회적, 예술적 영혼을 회복시키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을 겁니다. 아마도 그는 스스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가 해야 할 일이 있기에 멈출 수 없었을 겁니다. 오늘 그런 그가 보고 싶습니다.” |
2011.03.02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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