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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의 추억 1 : 윌슨의 정리

by 이정원 posted May 2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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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의 추억 1 : 윌슨의 정리 


 

누가 나에게 추억할 것이 있느냐고 물으면 '몰입의 순간'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몰입했던 대상에 대한 느낌은 수 년이 지나도록 머릿속 깊이 박혀 있다.

며칠 전 고등학교 동기 홈페이지에 한 친구가 갑자기 '정수론'에 대한 책을 보고싶다는 글을 올렸길래

<윌슨의 정리>에 대한 추억을 끄집어 내어 본다.

 

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는 <윌슨의 정리>는 물론이고 아예 정수론을 다루지 않는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여자 선배로부터 물려받은 <정수론> 책에서 이 문제를 처음 접했다.

증명이 복잡하거나 길지는 않았지만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증명을 이해하고 나서는 굳이 왜 이런 방법으로 증명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논리적인 오류나 비약을 찾아보려고도 했고 다른 방식으로 증명해 보려고 했지만 결국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깔끔한 증명이었다.

 

일단 승복하게 된 증명이니 여러 번 베껴 써 보았다.

국어시간이나 사회시간에는 교과서 밑에 노트를 숨겨 증명을 여러 번 써 보았다.

보고도 써보고 외워서도 써보고 내가 스스로 논리적인 연결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몇날며칠 그 증명이 신경쓰였고 틈틈이 증명을 떠올렸다.

정수론은 교과과정에서 다루지 않기 때문에 시험에 나올 리 없는 증명이었다.

고등학생 중에 정수론 책을 본 사람은 1%도 되지 않을 것이고

윌슨의 정리 증명을 베껴써 보거나 외우고자 했던 사람은 0.01%도 안 될 것이다.

어디가서 자랑할 데도 없지만 나는 그저 즐거웠다.

깔끔하고 명쾌한 <윌슨의 정리> 증명이 내 머릿속에 들어있다니!

 

그로부터 몇달이 지났는지 아니면 해가 바뀌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 학년 수학선생님에게 일이 생겨 윗학년 수학선생님께서 중간고사 문제를 출제한 적이 있었다.

박사학위를 가진 그 선생님은 학생들을 골탕먹이기로 유명한 선생님이었다.

그 선생님이 내 주신 중간고사 수학문제를 받아든 순간 깜짝 놀랐다.

 

'윌슨의 정리를 증명하시오.'

 




기쁨과 흥분 속에 답을 써내려 갔지만 쉽지는 않았다.

증명을 공부한 지 시간이 많이 지나서인지 답을 쓰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른 문제보다 특히 공을 들여서 증명을 써내려갔다.

 

내가 답으로 써 낸 증명이 100% 완벽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도


나는 그 문제에서 점수를 깎이지 않았다.

그 문제에 답을 써낸 학생은 나밖에 없었다.

선생님의 표현에 따르면 <윌슨의 정리> 증명을 '흉내'낸 학생이 한 명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나였다.

 

'정수론' 책을 보고싶다는 친구의 글에 댓글로 <윌슨의 정리> 얘기를 툭 던졌다.

<윌슨의 정리>가 고등학교 중간고사 문제로 나온 적이 있는데 기억하냐고.

한 친구가 고등학교 중간고사 문제를 어떻게 다 기억하고 있느냐고 놀라워 했다.

3년 내내 전교 1등을 하던 친구였다.

그런데 고맙게도 다른 친구가 댓글을 달아 주었다.

 

'윌슨의 정리 기억난다. 정원이가 윌슨의 정리를 흉내냈다고 수학샘이 얘기한 것도 기억난다.'

 

2008. 5. 27

이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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