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의 [무소유]란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가 만족할 줄 모르고 마음이 불안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말속에는 ‘우리는 각각의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전체의 한 부분’ 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바로 3월22일 온지당에서 몸소 깨우친 내용이다. 최재천 교수님이 말한 화엄의 궁극적 경지와도 그 맥이 닿아있다. 통섭이라는 말은 한마디로 정의 하기보다 그 말이 주는 느낌, 즉 박문호 박사님의 말을 빌리자면 높은 차원의 복합계를 통한 생각의 출현으로 표현 되어야 한다. 쉽게 말하자면 통섭이라는 단어를 한 문장으로 정의 하기에 언어의 한계를 느끼게 되므로 그 말이 주는 느낌을 갖고 그 느낌을 언어가 아닌 다양한 창조적 형태로 표출해야한다는 것이다. 너무 문자적 해석에 매달리게 되면 근대 불교학이 겪은 그리고 다산이 겪었던 더 나아가 현재 모든 학문에서 겪고 있는 매널리즘에 빠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