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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6 09:00

종교,근대의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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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근대의 길을 묻다/김삼웅,인물과사상사

‘06.7.2.2215 주말열차(유진이 뉴질랜드 배웅하고 구입)



● 시대와 충돌한 종교

-만동묘에 얽힌 유생들의 사대주의 : 송시열에 대해 일각에서는 ‘사문斯文의 종사宗師’, ‘정계의 대로大老’, ‘아동我東의 주자朱子’, ‘태산교악泰山喬嶽’으로 추앙하고, 다른 쪽에서는 ‘당쟁의 화신’, ‘골수적인 사대주의 신봉자’, ‘극단적인 권력 추구자’ 등으로 비난한다.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 이상이나 이름이 거론될 정도로 걸출한 정치인이다.

-제사문제로 유교와 충돌한 천주교 : 「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제수를 차려 놓고 향불을 피우는 것은 기운에 보답하는 것이며, 술을 올리는 것은 넋에 보답하는 것이니 이것은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를 근본을 닦고 사랑하는 마음을 숭상하여 위아래가 정리에 맞도록 하는 것은 예법의 지극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사유 방식에서 볼 때 경천敬天이 종교적이라면, 효친孝親은 도덕적이다. 따라서 제사는 종교가 아니고 하나의 효도 방식으로 예禮로 인식되었다. 관습이라는 잣대로 보자면 조상 앞에 제물을 차리고 위패나 지방 앞에서 절을 하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국기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것이나 순국선열에 대해 묵념을 올리는 행위가 우상숭배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황사영 백서, 신앙인가 반역인가 : 서한의 내용을 요약하면 ① 조선은 경제적으로 무력하므로 서양제국에 호소하여 성교홍통聖敎弘通의 자본을 얻고자 한다, ② 조선은 청국 황제의 명을 받들고 있으므로 청국 황제의 명으로써 선교사를 조선에 받아들이도록 할 것, ③ 청이 조선을 병합하고 그 공주를 조선이 취하여 의관을 하나로 할 것, ④ 서양으로부터 군함 수백 척과 정병 5만~6만, 대포 기타 필수 병기를 가지고 와서 조선 국왕에게 위협을 가하여 선교사의 입국을 자유롭게 해 줄 것 등이다.

-나라를 세우고 망친 유교인들 : 왕대비의 장례를 3년 상으로 치를 것인가, 1년 상으로 치를 것인가 따위의 이른바 예송론禮訟論이 정치의 쟁점이 되고 여기에 유학자들의 생사가 걸리게 되었다. 예송논쟁에서 이긴 편은 살고 진 편은 죽었다. 국내판 ‘종교전쟁’이었다. ‘종교전쟁’의 승자는 노론 세력이고 이들은 국가나 정부의 이익보다는 파당과 가문의 이익을 우선하였다. 종국에는 이들 대부분이 친일파로 전락하고 나라를 파는 매국적賣國賊이되었다.

-한말의 유림들이 신봉해 온 위정척사사상에는 중화적 벽이론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대주의적 모화사상의 한계성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들의 사대주의적 모화사상은 종주국을 중국에서 일본으로 바꾸면서 친일 매국노로 변신하게 되었다.

-1919년 거국적인 3ㆍ1항쟁이 전개되고 33인 민족 대표에 유교 측이 배제된 것이 알려지면서 유교 지도자들은 각성한 바가 있었다. 이렇게 하여 시작된 것이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보내기로 한 사건이다.

-김창숙이 지참한 ‘파리 장서’에는 134명의 유림 대표가 서명하였으며, 대표 파견의 경비는 유학자 황일성이 조달하였다. 신한청년단 대표로 선정되어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에게 송달하였다.

● 새로운 종교의 탄생

-동학 교조 수운의 탄생에 얽힌 설화와 신비체험 : 최제우는 신라 말 대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25대손으로서 최제우가 최치원의 호 고운의 운자雲字를 따서 수운이라 한 것과, 고운이 유ㆍ불ㆍ선 삼교 합일의 사상을 가르친 것이나, 수운이 유ㆍ불ㆍ선 삼교에 천주교까지 연구하여 동학을 창도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고운 최치원이 신라 말기의 세정世情을 개탄하여 가야산으로 은퇴하면서 하신 말씀 가운데 아직 때는 멀었으나 앞으로 1천 년 지낸 후에 우리 최씨 후예 가운데 유ㆍ불ㆍ선 삼교의 교의를 통일할 큰 성자가 나타날 것이다”라는 말에서도 고운이 수운의 탄생을 내다보았다는 주장이 나온다.

-‘두려워 말고 저어하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라고 이르는데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너를 세상에 나게 하여 사람들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는 것이니 의심 말고 다시 의심 말라.’고 하였다.(『동경대전』중「포덕문」)

-한 눈으로 보는 동학의 계보 : 1대 교조 최제우, 2대 교조 최시형, 3대 교조 손병희(천도교로 개칭), 이용구(출교 처분 뒤 시천교 창설, 친일단체로 변질. 송병준ㆍ박용구 참여)→ 김연국(상제교, 손병희와의 갈등 후 시천교의 대찰사가 되었다가 계룡산에서 창설)→ 김덕경(김연국의 아들), 그 외 동학계 신종교로는 수운교 (한말 이상룡이 창시)와 동학본부(1904년 김주희 창시)가 있다. 최시형이 교조로 있던 시기 남도접주(南道接主)였던 전봉준은 최시형의 종지휘하에 북도접주 손병희와 함께 동학혁명을 이끌었다.

-동학에 깃든 인간 사랑 : 동학의 기본 정신은 평등사상이다. 그래서인지 증산교의 강일순, 보천교의 차경석 등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한때는 동학에 몸담았다. 동학은 ‘한울님’이 사람 안에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어린이’운동을 세계에서 최초로 전개한 소파 방정환도 천도교인이었다고 한다.(그는 3대 교조인 의암 손병희의 사위이다.) 동학 교도들은 서로를 ‘동덕(同德)’이라고 불렀다. 이를테면 ‘김 동덕’, ‘이 동덕’ 식이다. 현재의 동덕여자대학교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증산 유해 둘러싼 쟁투와 왼팔 유골의 행방 : 한국 근대사에서는 처음으로 1860년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립한 이래, 1880년 일부一夫 김항이 정역사상正易思想을, 1901년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이 증산교를, 1909년 홍암 나철이 대종교를, 1916년 소태산 박중빈이 원불교를 창립하였다. 과거에는 ‘인간이 일을 꾸미지만 그것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謀事在人成事在天’는 사상이 지배했지만, 후천에는 ‘하늘이 일을 꾸미지만 그것을 이루는 것은 인간이다謀事在天成事在人’는 사상으로 변화된다고 주장했다.

-증산의 왼팔 유골의 행방 : 증산이 의병 모의 혐의로 구속되면서 그의 권능에 대한 회의가 생겨났다. 신도들 중에는 그가 평소 말하던 천지개벽이 늦음을 원망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증산은 1909년 3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신도들은 그의 허망한 죽음을 보고 실망한 나머지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아 몇 사람만의 초라한 장례식을 치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여 년 후부터 신도들 사이에 유골을 차지하려는 기이한 싸움이 시작됐다. 증산교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증산의 유품을 서로 차지하려고 야밤에 묘소를 도굴하는 일이 거듭되었다. 증산의 유골 중 왼쪽 팔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이 같은 연유에서 였다. 12년 후, 무극도의 교주 조철제가 초빈을 파헤치고 증산의 유골을 가져갔다. ‘성묘도굴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증산 생존시 제자인 문공신은 1922년 1월 돌격대를 조직하여 유골을 지키고 있던 무극도 신도들을 때려눕히고 유골을 빼앗아 갔다. 이런 와중에 ‘유골의 왼쪽 팔뼈’가 부러져 나가게 되었다. 조철제는 부러진 유골을 다른 곳에 숨겨 놓고 거처를 옮겼다. 일제는 문공신에게 7년 징역을 선고하고 증산의 유골을 정읍경찰서에 이송시켰다. 이 무렵 증산의 제자로 세력을 키운 보천 교주 차경석이 유골 인도 로비를 벌여 대흥리 앞 냇가에 빈실을 지어 유골을 보관케 하고 관리를 보천교가 맡았다. 그러나 조철제는 자신이 증산 상제의 왼팔 유골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만족했다. 우주의 신비와 천지의 도수가 모두 왼손에 들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후 왼팔 유골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재판은 조철제의 패소로 끝나고 10여 년 후 문정삼이 증산 유족들과 증산의 묘소를 이장시키고자 경찰 입회하에 파묘를 했으나 유골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1974년 법원은 증산 제자들이 60여 년간 분묘를 지키고 관리해 왔다면서 관리권이 증산교 측에 귀속된다고 선고했다. 그러나 증산의 왼팔 유골은 여전히 행방을 알지 못하고 있다.

-매국노 척살 앞장선 대종교 나철 대종사

-대종교 신자들 : 대종교는 종교로 출발하였지만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인 분위기 탓으로 항일 독립운동에 더 큰 공헌을 하였다. 민족 정기를 되찾는다는 신념으로 북간도의 백두산 기슭에 대종교 본사를 설치하고, 만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군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는 것에서 대종교의 정신이 잘 나타난다. 또 1910년대 민족주의 사학ㆍ조선어학회를 이끌었던 지도자의 많은 수도 대종교인이었다. 대표적인 대종교 신자를 보면 북로군정서를 조직한 서일을 비롯해 청산리 전투의 두 영웅인 김좌진과 이범석, 그 외 홍범도, 초대 부통령 이시영, 신채호, 박은식, 정인보, 최현배, 이상설, 이동녕, 신규식, 박찬익, 조성환 등이다.

-‘나병 환자 취급받으며 대각(大覺)’ 원불교 교조 박중빈 : 원불교에서는 이 무렵 선지자들의 후천개벽의 순서를 날이 새는 것에 비유하여 ‘수운의 행적은 세상이 깊이 잠든 가운데 첫 새벽의 소식을 내린 것이요, 증산의 행적은 밝으려 하매 그 다음 소식을 알린 것이며, 소태산은 날이 밝으매 그 일을 시작하신 것’이라 주장한다. 또 ‘일년 농사에 비유하자면 수운은 해동이 되어 농사지을 준비를 하라 하신 것이요, 증산은 농력의 전후를 일러 준 것이고, 소태산 박중빈께서는 직접 농사법을 지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련과 대각의 소태산의 길 : 인근에서는 나병에 걸렸다는 악소문까지 나돌았다. 온몸에 고름이 엉겨붙은 모습을 지켜 본 사람들이 나병 환자로 오인하게 된 것이다. 소태산은 5년간의 고행 끝에 26세가 되던 1916년 4월 28일, 영광군 백수읍 길룡리 노루목 대각터에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청풍월상시 만상자연명’淸風月上詩 萬像自然明,맑은 바람에 검은 구림이 걷히고 달이 떠오르니 만물은 자연히 드러나도다. 이 시는 그가 대각을 이루면서 읊은 것이다. “만유가 한 체성體性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다. 이 가운데 생멸없는 진리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뚜렷한 이름을 지었도다”-대각大覺의 ‘대각일성大覺一聲’이었다. 어려서부터 건장하였던 그는 대각 이후에 육체적 건강에 정신적 득도가 함께 하면서 키180cm, 몸무게 90kg의 우람한 체구에 얼굴은 보름달같이 훤하고 피부는 맑으며 두 눈은 청량했다.

-무학대사의 ‘불종불박’ 일화 : 조선왕조 건국에 크게 기여한 무학대사와 관련한 한 가지 일화가 전한다. 대사가 충남 논산군 신도안 대궐 터(삼동원,三洞院) 주춧돌에 ‘불종불박佛宗佛朴’이란 예언적 글을 새겨 놓았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원불교 교도들은 ‘부처님 중에서도 제일 큰 부처님은 박씨로 이는 곧 소태산 박중빈의 출현을 예언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여러 종교ㆍ종파들이 피안이나 유토피아를 찾는데 비해 원불교는 생활개선을 통해 현실적인 삶의 복락을 누리고자 했다. 새 교단 설립의 기초가 저축조합으로 마련되면서 일본에 숯을 팔아 큰돈을 모으고 이것을 기금으로 간척사업을 벌였다. “일원一圓은 우주만유宇宙萬有의 본원本源이고, 제불제성諸佛諸聖의 심인心印이며, 일체중생一體衆生의 본성本性이며,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이며,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이며, 언어명상言語名相이 돈공頓空한 자리이다. 전통적인 불교와는 크게 달리 불교의 현대화ㆍ생활화를 주장하여 신앙의 대상을 불상이 아닌 법신불法身佛의 일원상(一圓相,‘ㅇ’으로 표현)으로 삼고, 시주ㆍ동냥ㆍ불공 등을 폐지하는 대신, 각자 정당한 직업에 종사하여 교화사업을 시행한다는 생활불교철학을 내세웠다.

-종교와 조국을 배반한 이용구 : 출교당한 이용구는 친일 신도들을 모아 시천교侍天敎를 세우고 노골적인 친일행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시천교는 종교의 가면을 쓴 일진회의 하수기관이 되었다.

-친일 매국 앞잡이 대동학회 :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운동이 거세게 전개되자 조선통감부는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유림들을 동원하여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대동학회는 이 같은 이유로 조직되고 활용되었다. 1907년 12월 1일 거행된 대동학회 총회에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참석하여 강연하고 거금 1만 원을 기부금으로 내놨다. 1909년 2월 회장 신기선이 사망하고, 원로 유림들이 친일행위에 대한 반발로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결코 이들을 방치하지 않았다. 이해 10월 대동학회는 침체된 분위기를 일소하고 새로운 활력을 제고한다는 명분으로 회명을 ‘공자교’로 개칭하고 활동을 재개하였다.

-공자교 친일행위 맞선 ‘대동교’ : 유교를 ‘개량구신改良求新’하지 않으면 유교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마저 끝내는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유교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대동교’를 창설한 박은식ㆍ장지연 등은 대동학회와 공자교의 반민족 행위에 맞서 싸웠다.

-유학계의 신종교와 청학동 : 유교계는 다른 종교에 비해 종교적인 성격이 미약한 편이다. 그래서인지 유교 계통의 신종교는 얼마 되지 않고, 그 역사도 오래 가지 못했다. 1907년에 창립된 태극교와 몇몇 종단은 일제의 ‘유사 종교 해산령’으로 거의 와해되고 지금은 일심교(一心敎) 혹은 갱정유도(更定儒道)라고 불리는 교단만 남았다. 지리산 청학동에서 옛 문화를 고집하며, 그들만의 생활을 하는 이들이 이 교단의 신자들이다.

-국호는 ‘시국(時國)’ 황석산에서 천제(天祭) 후 건국 선포 : 조선시대 호기 있는 선비 백호白湖 임제林悌는 39세로 운명하면서 자식들에게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는 나라가 없었는데,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으니, 이 같은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고 한 뒤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을 만큼 천자나 제왕은 한국인의 오랜 꿈이었다. 1921년, 차경석(車京石,1880~1936)은 일본 경찰의 체포령과 비상망을 뚫고 경남 석유산 기슭의 황석산에서 대규모 천제天祭를 지내고, 국호를 시국詩國, 교명을 보화교普化敎라 선포하고 스스로 천자의 자리에 오르고자 했다. 후삼국시대 궁예가 미륵불을 자처하며 마진(태봉)을 세우고, 고려시대 승려 묘청 일파가 대위국을 선포한데 이어 실로 개국 이래 세 번째로 보천교 교주 차경석이 새 나라를 선포하고 천자가 될 것이라 주장했다. 차경석은 보화교를 보천교普天敎로 고치고 천자 등극설을 유포하여 신도들 사이에서는 차천자車天子로 불리었다.

-p125 창가학회는 어떤 종교인가 : 지금 한국에서 120만 명의 신도를 거느리고 있는 창가학회는 1253년 일본의 승려 니찌렌이 불교 경전인 『묘법연화경』의 진리를 터득한 후 바다에서 떠오르는 아침해를 보고 ‘남묘호렌겟교’라는 주문을 외친 후 창교했다고 하는 일본식 변형 불교의 하나이다.

● 저항과 굴복의 세월

-한일합병 후 종무총감 된 사노 : 임진 왜란 국난을 맞았을 때 벌떼 같이 일어났던 조선 승려들이 한일합병과 식민통치에는 순응했던 것은 조선조의 척불정책과 함께 사노에 의한 도성 출입 해금 조치도 일정한 기여를 하게 되었다.

-한국 천주교는 1993년 84년 만에 안 의사를 천주교 신자로 복권시켰다.

-민족대표 어떻게 선정되었나 : 3ㆍ1항쟁을 주도한 인사들은 이 항쟁을 전 국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구한말의 고관 한규설ㆍ박영효ㆍ김윤식ㆍ윤치호ㆍ윤용구 등과도 상의했다. 그리고 매국노 이완용에게도 참여 의사를 타진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같이 거부했다. 기독교 측에서는 너무 노골적인 독립선언으로 일제와 충돌하는 것보다 독립청원서를 내자는 제안이었다. 이 때문에 천도교 측과 결렬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그러나 천도교 측의 최린이 “청원이나 건의는 민족자결의 정신과 다르다. 독립선언의 뜻을 분명히 밝혀 전 민족을 궐기시키고 전 세계에 결의를 밝혀야 한다”고 설득하여 방법을 ‘독립선언’으로 할 것을 재확인했다. 독립선언서는 인쇄과정에서 악질로 소문난 종로서의 한인 형사 신철희에게 발각되었으나 이종일의 설득으로 위기를 넘긴 비화와 함께 이 선언서가 일본인의 집에서 기초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인 아이러니로 남는다.

-태화관 거사 후 전원 구속 : 태화관은 중국 음식점 명월관의 지점으로, 한때 이완용이 살았던 집을 수리하여 음식점으로 변용한 곳이다. 이곳은 이완용이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조약을 밀의하던 장소이며, 1907년 7월 17일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케 한 음모, 그리고 매국노들의 합방조약 준비도 바로 이집에서 모의되었던 얄궂은 장소이다. 태화관의 비극적인 운명은 계속되어 3ㆍ1 독립선언 후인 5월 23일 새벽 원인 모를 화재로 모두 불타버렸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가 그해 6월 28일 밤 소실된 것과 함께 3ㆍ1항쟁과 관련된 두 곳의 역사적인 장소가 일제의 흉계로 잿더미로 변해버리고 만 것이다.

-서대문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 : 옥고로 양한묵은 구속된 해 여름에 옥사하고, 박준승은 21년 옥중에서 고문을 당해 사망했다. 그리고 손병희는 옥중에서 병에 걸려 1921년 5월 19일 사망했다.

-일부 민족대표의 변절 : 해방 50주년인 1995년 8월 독립기념관은 3ㆍ1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친일행각으로 논란을 빚어온 박희도ㆍ정춘수 등 2명을 변절한 친일파로 규정, 독립기념관은 또, 최린의 약력에도 친일행위를 기록한다고 밝혔다. 해방 후 반민특위 법정에 선 최린은 “독립운동을 선포한 피고가 왜 일제에 협력했는가?”라는 재판장 서순영의 추궁을 받고 “3ㆍ1운동 이후 줄곧 주목과 위협, 유혹을 받아왔다. 물리치지 못한 것이 죄스럽고 부끄러울 뿐이다”라고 울먹이며 답변했다.

-불교계 첫 명고축출 사건 : 조선시대 성균관의 유생이 죄를 지었을 때 그 사람의 이름을 써 붙인 북을 성균관 안에서 치고 다니며 널리 알리던 것을 ‘명고축출鳴鼓逐出’이라 했다. 강대련은 일제시대 불교계의 실력자엿다. 그는 1915년 1월, 30본사 연합사무소 위원장이 되어 조선 불교계의 교권을 장악하고 불교중앙학림을 세웠다. 이는 후일 불교전수학교ㆍ불교전문학교ㆍ혜화전문학교ㆍ동국대학교로 발전했다.

-기독교의 절제운동 : 외국 선교사들이 초기에 한국인들의 음주 행태를 보고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의 거리에 쌀가게보다 술 가게가 더 많았다는 기록이나, 특히 평양에는 가구의 3할이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다는 외국인의 기록을 살필 때에 1800년대 후반 한국인들의 ‘술 문화’ 실태를 알게 된다.

● 우리가 풀어야 할 역사

-민족종교 동학의 역사 : 전봉준은 현상금을 탐낸 피로리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효수된 머리-사체 행방 몰라 : “나는 다른 말은 없다.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내 피를 뿌려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 컴컴한 적굴 속에서 암연히 죽이느냐”며 꾸짖어 최후의 순간까지도 굳건한 기개를 잃지 않았다. 전봉준이 처형을 앞두고 남긴 유시「운명殞命」보면 그의 애국애족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내 뜻과 같더니 운 다하여 영웅도 스스로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허물이 되랴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공약삼장을 만해가 썼다는 주장 : 최남선은 “일생을 학자로 마칠 생각이라 독립운동의 표면에 나서지는 못하지만 선언서는 작성하겠다”고 하여 그가 선언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이를 전해 들은 만해가 “독립운동에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이 선언서를 짓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고 자신이 맡겠다고 나섰으나 최린이 이를 거부해 최남선이 작성하게 되었다.

-실현되지 못한 유언 : 원세개遠世凱는 안의사의 장거와 순국을 다음과 같이 높이 찬양하였다. 평생을 벼르던 일 이제야 끝냈다. 죽을 땅에서 살려는 건 장부 아니고 몸은 한국 출신이지만 이름 만방에 떨치니 백 년을 못 사는 인생 죽어서 천년을 가리.(P.217)

-1. 일본(日本) 놈의/2. 이등박문(伊藤博文)이가/3. 삼천리(三千里) 강산에서/ 4. 사주(四柱)가 나빠/ 5. 오태산(五台山)을 넘다가/ 6. 육철포(六鐵砲)를 맞고/ 7. 칠십(七十)먹은 늙은이가 / 8. 팔자(八字)가 사나워 / 9. 구둣발길로 채여 / 10. 십자(十字)거리가 났다.

-북한은 1986년 7월 유해 발굴단을 구성하여 수인묘지를 샅샅이 뒤졌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조찬기도회를 이끈 교계 거물들 : 박정희 정권 당시 초기 국가조찬기도회를 이끈 목사는 대학생선교회CCC의 김준곤 목사였다. 2회 때는 “우리나라의 군사혁명이 성공한 이유는 하나님이 혁명을 성공시킨 거”이라고 노골적으로 군사 쿠데타를 찬양했다. 제6회 때는 “10월 유신은 실로 세계 정신사적 새 물결을 만들고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성서적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설교해 유신 전도사를 자처했다.

-전두환 조찬기도회 주최자들 고발당해 : 1993년 9월 기독교 성결교회 이선교 목사가 전두환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개최한 한경직ㆍ조향록 목사 등 기독교 각 교파 지도자 23명을 반란방조 혐의로 고발했다.

-역성혁명의 참언과 비기 : 최치원은 관직에서 물러나 방랑생활을 하면서 농민들의 참상과 관리들의 부패를 목격하고 “계림은 누른 잎이요, 곡령은 푸른 소나무鷄林黃葉 鵠嶺靑松”라는 ‘예언’을 남기고 표연히 사라졌다. 고려를 상징하는 개성의 소나무는 파랗게 푸르러 간다는 예언이었다. 최치원은 또 1천 년 후에 문중에서 자신의 유ㆍ불ㆍ선 삼교의 뜻을 이을 후계자가 나올 것이라고 말해 수운 최제우崔濟禹의 탄생을 예언했다고 전한다.

-‘천부인’에서 ‘궁을부’까지, 기나긴 부적의 역사 : 부符는 상서로움, 증험證驗, 위신爲信의 뜻으로 원래는 하나씩 쪼개어 떨어진 목판이나 대쪽이 서로 부합해 하나의 완성품을 이룸으로써 상서ㆍ증험ㆍ위신을 다룬다는 데서 유래한 글자다. 옛 사람들은 하늘이 제왕 될 만한 사람에게 내리는 상서祥瑞로운 징조를 부명符命이라 하고, 천신天神이 주는 도록圖錄을 부신符信이라 했으며, 천자天子의 옥인玉印을 부새符璽라고 했다.

-부적을 만들 때의 금기 : 동양인들은 색깔을 구분할 때 청ㆍ황ㆍ적ㆍ백ㆍ흑을 오정색五淨色이라 불러왔다. 그런데 적색은 폐부로 볼때는 심장, 계절로 볼 때는 여름, 방향으로 볼 때는 남쪽에 속하지만 오행五行으로 볼 때는 화성化性에 속하고, 황색은 비위脾胃ㆍ계하季夏ㆍ중앙ㆍ토성土性에 각각 속한다. 그러므로 중앙은 모든 방향의 중심으로 6방方, 8방方에 다 통할 수 있고 또 계하는 극양極陽으로 음邪를 누르는 최강의 세력이 되기 때문에 누런 종이에 빨간 주사로 부적을 쓰는 것이다. 회나무는 예부터 버드나무ㆍ복숭아나무ㆍ석류나무와 함께 귀신을 쫓는 나무로 알려져 왔다.

-앞에서 말하는 ‘경면주사’의 주사朱砂는 8%의 수은과 14%의 유황을 주원료로 하여 한약제로도 이용되고, 철학상으로는 심장의 적색朱砂과 비위의 황색(괴황지)이 결합해 토화상생土火相生으로 동서 사방의 사기邪氣를 눌러 비위를 편안케 하니 여기에 바로 부적의 물적 증험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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