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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30 09:00

이 집은 누구인가

조회 수 1981 추천 수 0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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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내 꿈은 빨강머리앤이 살던 'Green Gable'같은 집에 사는 것이었다. 유럽풍의 집이 좋고 앤틱 가구들의 오래된 느낌과 코지한 분위기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 집엔 앤이 결혼을 할 때까지의 모든 추억이 담겨있어서였고, 또 반짝이는 호수와 만발한 꽃 가운데에 놓여진 집에 살면 내 스스로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시인의 감성을 지닐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빨강머리앤 소설의 매니아인 내게 어릴적의 꿈은 아직까지도 유효하다.



앤의 집은 곧 앤의 삶이며, 앤의 인격과 같은 생명체다. 집은 곧 사람이다... 라는 것이 빨강머리 앤과 같이 책의 지은이 김진애의 집에 대한 철학으로 나타나있다.



건축가인 김진애는 단순한 삶의 공간이나 건축물로서의 집이 아닌 사람의 숨결이 담겨있는 집을 표방하면서, 그에 대한 열두가지 테마를 풀어낸다. 추억, 긴 동선, 구석, 집의 중심, 취향, 자연, 시간, 동네와 길, 길들이는 집....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그녀의 집에 대한 철학과 맞물려 나 어릴적에 살았던 강서구 등촌동의 작은 주택과, 거기에 살면서 경험했던 여러가지 추억들을 떠올렸다.



아주 어렸을 때 영국에서 살다 들어오면서부터 쭉 살았던 집이니 그래도 꽤 오랜시간을 보내면서, 같은 동네에 살던 사람들은 부모님들끼리 '모임'까지 만들어 여지껏 만남을 지속시킬만큼 서로 든든한 관계가 되었었다. 그들의 자식들인 우리들 또한 비슷한 또래였기에, 하교해서는 동네 골목에서 다방구나 얼음땡을 하고 놀았다. 그땐 동네 골목길이 그냥 우리 거였다.



그 골목길이 유독 기억에 남는건, 함께 시간을 보냈던 '사람'과 얽혀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꼬불꼬불하고도 긴 동선과 각각의 구석마다 내가 한번씩은 숨바꼭질을 하면서 숨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집 또한 마찬가지일거다. 집 또한 마당과 각각의 방, 다락방, 새들어 살던 새댁아주머니가 살았던 사랑방... 골목과 마찬가지로 여기저기 옮겨다닐 수 있는 긴 동선과 구석구석이 존재했기에 그만큼 사연이 많고 추억이 많은 것일게다. 건축가 승효상도 유홍준 선생의 집을 지으며 일부러 대문을 자동으로 여는 장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 들어오는 대문까지 직접 걸어가 반가이 맞이할 수 있는 정도의 부지런함과 동선, 사람의 마음을 허락하기 위해서였단다. 김진애의 '긴 동선'과 맞물리는 생각이다.



그런 구석진 공간들과 더불어 우리 집 마당엔 지붕까지 올라가는 커다란 대추나무와 철이 되면 잘 영근 배가 주렁주렁 열리는 배나무가 있었다. 그 대추나무는 가지를 다듬지 않으면 가지가 뻗쳐 다락방 창문안으로 비집고 들어가기도 했는데, 집이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집이되는 그런 순간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그걸 떠올리는 이제서야 든다니.... 그때는 왜 그걸 몰랐을까.



이 모든 것이 모여 김진애가 이야기하는 '시간의 갤러리'가 되는 것이다. 시간의 갤러리가 되는 집은 이 모든 것들의 총체다. 오랜 시간을 지내다보면 방 한 개 한 개 에서도 추억이 쌓인다. 이 방에서는 삼촌이 나를 목마태워 주셨지, 이 방은 내가 학교 입학해서 처음 내 책상을 놓았던 방이지... 이 방에서 지낼 때 내가 대학에 합격했지....

오랜 시간을 보낸 집에서는 이것저것 조화가 되지 않는 가구들과 물건들이 배치되어있다. 그러나 뭔가 어지럽고 너저분해 보여도 오랜시간 집과 함께 한 사람만은 알 수 있는 시간의 배열과 규칙이 그 안에 존재한다. 거기에 놓여진 모든 사물들은 한 해 한 해를 지나면서 모아온 물건들이고, 이날까지 아끼는 물건들일테니 말이다.



처음에 살 땐 내게 맞지 않는 옷이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고 나와 그것이 밀착되는 시간이 쌓여갈수록 내게 맞는 옷이 되고, 나의 체취가 베어들며, 내 신체에 딱 맞게 옷의 모양까지 변형되는 것처럼, 집 또한 그렇게 길들여지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것이 오래도록 그렇게되기 위해선 늘 아끼고 소중이 다뤄야만 하겠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절절한 추억들은 어린시절로 마감되고, 삭막하고 딱딱 찍어내듯 높이쌓여진 아파트에 여태까지 살고있다.

김진애는 아파트에서도 추억과 구석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단, 아쉽게도 어떻게 하면 그럴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파트의 '시공'을 어찌해야 하는지의 큰 시각에서만 언급을 할 뿐, 시공 자체는 들어가 살고있는 우리같은 사람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방법을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사람의 삶과 생각이 '공간'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기에, 개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공간인 집, 그리고 그 집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읽어보기에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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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영옥 2006.09.30 09:00
    건축과를 지망하던시절..김진애씨의 글을 좋아했던 기억이납니다. 결국 더좋아하는것을 발견해 다른과를 가게되었지만 항상 건축에 관련된 이야기는 애정이 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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