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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대전시향 :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

by 이정원 posted Dec 3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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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이맘때쯤이다.

대전시향이 연주하는 베토벤 교향곡 제 9 번 <합창>을 들으러 간다.

 

 

베토벤은 청력을 잃은 상황에서 일생일대의 대작 <합창>을 작곡했다.

1824년 빈의 케른트너토어 극장에서 합창교향곡 초연을 위해 베토벤이 직접 지휘대에 올랐다.

하지만 실제 지휘는 움라우프가 따로 해야 했다.

연주가 끝나고도 박수 소리를 듣지 못한 베토벤은

청중 쪽으로 돌아서고 나서야 환호하는 청중을 볼 수 있었다.

 

청력을 잃은 음악가가 작곡한 70분 짜리 교향곡은 그 자체로 드라마다.

하지만 어떤 작곡가도 교향곡을 들어보면서 작곡할 수 없다.

초연 리허설 전에 자신이 작곡한 곡을 들어볼 수 있는 작곡가는 없다.

<생각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어떤 작곡가는 음악을 듣기보다 악보 보기를 즐긴다고 했다.

음파 형태의 자극 없이도 머리 속에서 음악을 재생하는 능력은 베토벤만이 가진 것은 아닐 것이다.

 

베토벤이 <합창>에서 보여준 위대함은 인생역정 드라마에 있는 것이 아니다.

4 명의 성악가와 합창단을 교향곡 형식에 도입하는 파격을 취하면서도 조화를 잃지 않았다.

베토벤은 쉴러의 시 '환희의 송가'를 30년 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고,

결국 자신이 작곡한 마지막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에서 남김없이 발산해 버린다.

나는 특히 2 악장을 좋아하긴하지만 역시 <합창교향곡>의 진수는 '환희의 송가'가 울려퍼지는 4 악장이다.

 

4 악장의 시작 부분은 혼란스럽고 암울한 기운이 가득하다.

합창의 주제는 계속 머뭇거린다.

머뭇거리다보면 이내 곧 혼란스런 연주에 묻혀버린다.

마지막 절망의 순간이 잠시 멎은 틈을 타 앉아있던 바리톤이 일어나 그제서야 입을 연다.

"오, 친구여, 이런 곡조는 그만두고 좀더 즐겁고 기쁜 노래를 함께 부르자"

 

이어지는 합창의 선율은 전세계 인류를 위한 것이다.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환희에 가득찬 그 멜로디는 어느 누구에게만 특별한 것이 아니다.

베토벤은 자신이 절망에 처한 상황에서도 환희의 멜로디를 인류 모두에게 나눠주고자 했다.

 

 

<합창>을 듣고 나오니 대전문화예술의전당의 광장에 눈이 쌓여 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카라얀이 베를린필과 연주한 음반을 듣고,

주말 동안 푸르트벵글러의 51년 바이로이트 실황연주와 아바도가 빈필과 연주한 음반을 차례로 들었다.

오늘 아침에는 헤레베헤가 지휘한 연주를 들었고,

4 악장만 비교해도 다른 지휘자의 연주보다 5 분이나 길게 연주한 첼리비다케의 실황음반도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카라얀의 음반을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